존재하는 소유와 소유하는 존재
눅 12;13-21.
나는 에릭 프롬의 책을 좋아 합니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책 가운에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 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 삶의 방식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소유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소유가 있습니다.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좀 하기 어려운 설교이고 듣기 어려운 설교입니다.
제가 설교 제목 잡은 중에 가장 여려운 제목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본질적인 설교입니다. 소유를 위하여 존재하느냐? 존재를 위하여 소유하느냐? 존재냐? 소유냐?는 중요한 가치관 문제입니다. 예를 몇 가지만 들어 봅니다.
남미와 북미의 차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사람들이 이주할 때 동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부에 살던 사람들이 서부에 금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동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종류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한 무리들은 먼저 가서 금광을 다 차지하려고 말을 모는 데 가혹하게 매일 몰아쳤습니다. 수많은 말들이 지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사람들도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간 곳이 남미입니다. 오직 황금이었습니다.
소유를 위하여 모두를 걸었습니다. 소유를 위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부중에서 LA를 중심으로한 미국 서부로 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몇 달동안 맗을 타고 오면서 안식일이면 편안한 곳에 진을 치고 쉬었습니다. 말도 하루를 쉬게 하였습니다. 사람도 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존재를 하여 소유하려고 하였던 이들이었습니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완전히 운명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소유를 위한 존재들은 지금 가난합니다. 그러나 존재를 위한 소유를 시도하였던 이들은 지금 부요합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는 소유를 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오직 유물사관입니다. 소유를 위한 존재들입니다. 쏘련 공산주의가 70년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북이 70년 되는 해가 2018년입니다. 각 국 예언가들은 어느 날 이북은 갑자기 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유를 위한 존재들은 오직 돈이 목적이기에 언젠가는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를 위하여 소유를 하여야 합니다. 존재가 목적입니다. 소유는 수단입니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공산당이 한 기술자에게 말굽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말굽만 만드는 일을 합니다. 하루 평균 24개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간부가 그 기술자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내 앞에서 말굽을 하나 만들어 다오.”
“네.” 그는 잽싸게 10분만에 말굽을 하나 만들어 주었습니다. 시간을 재고 있던 간부가 말합니다.
“너는 10분에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 시간이면 6개를 만든다. 너는 하루 8시간 근무한다. 48개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24개를 만들었다. 반은 놀았다. 사형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옆구리에 차고 있던 총을 빼서 머리에 쏘아 죽입니다.
이것에 공산주의입니다.
소유를 위하여 존재가 있습니다. 존재를 위하여 소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망할 수 밖에 없는 사상입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목욕을 하려고 하니 목욕탕에 사람들이 많은 지 적은 지 알아 보고 오거라.”
종이 목욕탕에 다녀와서 한 사람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목욕을 하러 갔습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습니다. 간단히 샤워만 하고 와서 종을 야단치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데 왜 한 사람밖에 없다고 했느냐?”
종이 말했습니다.
“주인님!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요? 목욕탕앞에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다가 걸려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모두 피하여 갔습니다. 넘어지고도 치우지 않고 갔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만 그 돌을 치우고 목욕하러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만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요?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요.”
사람들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존재와 소유에 대하여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제1차원 적인 사람 - 소유하는 존재
오직 소유에 목적을 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유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돈이 오직 하나의 목적입니다.
“돈이면 다다.”
“돈이면 다다.”
“돈이면 다다.”
빨리하다 보니 <돈다>가 되었습니다. 돈에 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신령이 나무꾼에게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소원 한가지를 들어 줄 터이니 말해보아라.”
나무꾼은 선뜻 말했습니다.
“돈과 여자를 주옵소서. 결혼도 못 하고 가난합니다.”
산실령이 말했습니다.
“한 가지를 준다고 하였더니 두 가지를 말하는 구나. 선물 두가지를 한꺼번에 준다. 돈 여자를 주마.”
유머입니다.
오직 소유하는 데 목적을 둔 사람은 소유하는 존재입니다. 모두 먹어 치우는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의 표현이 소유하는 존재에 속하였었습니다. 모두를 먹어 버립니다. 한국의 표현은 모두 먹어 버리는 소유하는 존재양식의 언어입니다.
한국 사람은 더위도 먹습니다. 더위 먹었다고 합니다.
나이도 먹습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욕도 먹습니다. 욕먹었다고 합니다.
벌점도 먹습니다. 골탕도 먹습니다. 애도 먹습니다. 겁도 먹습니다.
어느 권투 선수는 권투에서 이기고 어머니에게 전화로 말했습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뇌물도 먹습니다. 챙기는 것이 아니 먹어 치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소출이 많고 곡식이 풍부하였습니다. 미처 쌓아 둘 곳이 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중얼거림을 듣고 계시던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는 소유를 위한 존재입니다. 소유하는 존재입니다. 소유를 목적으로 존재를 파괴시키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아간이 그렇습니다.
여리고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습니다. 다음 전투는 아이성이었습니다.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정탐결과가 여호수아에게 보고되었습니다.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찾게 하소서.”
너무나 작은 성이라고 여겼습니다. 사자는 쥐를 한 마리 잡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인 데 전쟁을 너무나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3천명만 올라갔습니다.
전쟁에 패하였습니다.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사적으로 물건을 감추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사랑스럽게 물었습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아간이 고백하였습니다.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여차여차히 행하였나이다. 내가 노력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그 장막밑을 파니 그대로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간과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골짜기로 갔습니다. 그리고 돌로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올려 놓았습니다.
아간은 나라가 망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금은 외투를 가지면 그만입니다. 소유하려는 존재입니다. 소유가 목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상 가난하고 못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나 아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소유를 위한 존재를 호되게 야단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우리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성안에서 살았습니다. 해가 지면 성문을 꼭 닫고 아무도 그 문으로는 출입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문을 하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겨우 한 사람 정도 들락 날락할 정도의 작은 문입니다. 이 문을 바늘귀라고 불렀습니다. 혹시 성문이 닫히기 전에 못 들어 온 사람은 이 문으로 들어 와야 합니다. 적들이 침범하여도 이 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차례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타가 이 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지고 오던 짐을 다 내려놓고 간신히 몸만 들어오고 물건은 나중에 들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소유를 위한 존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차원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없으면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상전이라고 여깁니다. 돈이 많아야 사람들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재 목적이 오직 돈입니다.
이런 사람은 돈 조금을 위하여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약간의 돈만 주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정의가 기준이 아니라 돈이 기준입니다.
정책이 좋은 후보를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돈많이 주는 후보를 밀어 줍니다.
소유를 위한 존재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차원적인 사람입니다.
제2차원적인 사람 - 존재하는 소유
그러나 존재하려는 소유는 반대입니다. 소유는 존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소유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소유하려는 존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나가서 될 수 있는 대로 고기를 많이 소유하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오직 고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고기를 두 배 그득 잡았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한 배 그득 잡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목표보다 두 배 소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존재를 위한 소유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존재 가치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전하여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 존재 목적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존재를 위하여 소유는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습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소유는 필요할 뿐입니다.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존재가 목적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동패낙송(東稗洛誦) 고전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순흥(順興)이라는 만석꾼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주 가난한 농사꾼 순흥이 만석꾼 부자가 된 이야기입니다.
그는 선언합니다.
“무엇이나 때가 있다. 지금은 일할 때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일합니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논을 삽니다. 또 일하고 또 논을 삽니다. 드디어 일년에 쌀을 9천석 수입이 되었습니다. 1만 8천 가마 쌀 수입이 되었습니다. 일년에 거의 40억을 벌어드렸습니다. 그래도 그는 말합니다.
“내 목표는 만석이다. 아직 목표달성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구두쇠로서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재산을 늘립니다. 누가 욕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빈정거려도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만석입니다. 드디어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순흥은 달라졌습니다.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재를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상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는 데 과거 시험을 치루러 한양 서울에 가야하는 데 여비가 없는 선비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 한 필을 사주고 여비를 대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치루려는 선비들이 항상 문에 줄을 섰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재산을 풀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무엇이나 때가 있다. 벌 때가 있고 줄 때가 있다. 모을 때가 있고 풀 때가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하여 초지일관 일할 때가 있고, 달성된 목표를 풀 때가 있다.” 순흥은 소유를 위한 존재에서 존재를 위한 소유로 바뀌었습니다.
존재를 위하여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2차원적인 사람입니다. 베드로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직한 사람입니다.
제3차원적인 사람 - 소유와 존재의 사람
지금까지 일차원적인 사람은 소유하는 존재이고, 제2차원적인 사람은 존재하는 소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제3차원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어느 것입니까?
물질 중심주의가 소유를 위한 존재입니다. 사람중심 주의가 존재를 위한 소유입니다. 그러나 가장 합리적인 대답이 있습니다. 그 대답은 정답입니다. 소유냐 존재냐가 아니라 소유도 존재도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입니다.
소유와 존재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새의 양날개같습니다.
기차의 두 레일같습니다.
한 쪽 날개만 있는 새는 나를 수 없습니다.
한 쪽 레일만 있는 기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소유냐? 존재냐가 아니라 소유도 존재도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잡아 생활하는 사람이 제3차원적인 사람입니다.
성막 쎄미나를 마치고 이천 온천에 잠간 둘렀습니다.
마침 공부하신 목사님이 와 계셨습니다. 그런데 배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쭉 찢어져 있었습니다. 수술자국이 너무 길었습니다.
“목사님! 무슨 수술을 하셨습니까?”
이렇게 묻자 지난 1월 18일 위암 수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이나 얼굴에는 건강이 넘쳤습니다. 불과 3달밖에 지나지 않았는 데 건강하였습니다. 사연을 물었습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진찰을 하여보니 위암이 이미 많이 진행중이라 어렵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이제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어떤 보험회사에 있는 이가 와서 암 보험에 소급하여 날자를 잡아 가입하면 700만원까지 나오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귀가 솔깃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700만원 때문에 남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목사입니다. 돈이 많이 들어와도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고 진실되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그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지혜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속직하게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진실된 말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중앙 병원에서 수술 날을 받아 놓고 주일을 맞았습니다. 입원중에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진동이 옴을 느꼈습니다. 치료에 확신을 받았습니다. 수술하려고 배를 열고보니 종기보다 작았습니다. 간단한 수술이 되었습니다. 의사들도 진찰할 때와 결과가 다르니까 신비를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문병차 주고 간 돈이 2,000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치료시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올바른 존재에게는 올바르게 소유가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탈무드에서 두 가지를 핵심을 찌르며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 소유과 존재를 조화시킨 멋진 표현입니다. 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입니다. 존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인격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소유하려고 천국을 포기하여서는 안 됩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 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돈 때문에 천국을 가지 못 하였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고 천국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돈은 중요한 것이고, 천국은 필요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소유도 중요하고 존재도 중요합니다.
2. 가난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니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명예로운 것도 아닙니다. 빈 지갑이 명예가 될 수 없습니다. 소유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안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없는 것을 안 가지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입니다.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돈의 위력을 알지만, 부자는 지혜의 위력을 모르기에 현명한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아야 하지만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아야 합니다.
소유도 중요하고 존재도 중요합니다.
소유와 존재를 잘 조화시킨 사람을 소개합니다. 3찰원 적인 사람입니다.
경주 최부자 이야기입니다. 경주에서는 유명한 가문입니다. 12대를 내려오면서 300년 동안 만석꾼 가문입니다. 일시 부자는 있어도 계속 흐르는 부자는 보기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 가문에서는 철학과 경륜이 흐르고 있습니다. 소위 육연(六然)이 이 가문에 흐르고 있습니다.
1. 자처초연(自處初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2.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 온화한다.
3.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없을 때는 맑게 지낸다.
4.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지낸다.
5.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대하게 행동한다.
6.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이 가문 후손의 증언이 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매일 아침이면 일어나지 말자 조부님 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한번씩 붓글씨로 육연을 썼습니다. 물론 조부가 보는 앞에서 썼습니다.
매일 수십년을 쓰다 보니 몸에 익었습니다. 몸에 박히게 되어 17세기부터 경주 최고 부자를 30년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이 집에 가훈(家訓)이 있습니다.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 없도록 하라.”
기독교적인 인간관은 소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하는 소유도 아닙니다.
존재와 소유 양자를 잘 조화시키는 삶입니다. 소유냐? 존재냐? 이 질문에 성경적으로 대답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둘 다입니다. 모두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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