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믿음의 글

체험의 신앙과 하나님의 형상 / 김진홍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2. 1. 11:00

 

체험의 신앙                    2006-10-26

                                            김진홍 두레교회 담임목사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누가복음서 12 49)

신앙의 세계는 체험의 세계이다. 물론 종교의 세계에도 이론이 있고, 교리가 있기 마련이다. 종교가 저급종교가 아니고 고등종교라면 나름대로의 신학이 있고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세계, 신앙의 세계는 자기 자신의 영혼 깊이에서 깨우치고 고백하게 되는 체험이 중심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영적 체험이랄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쉬운 말로 일컬어 받는다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성령의 받는다 때의 받는 체험의 경지는 어떤 경지일까?

어떤 분들은 이르기를 그런 영적 체험의 세계는 자기 자신만이 경험하는 신비의 세계이기에 타인에게 말로 설명할 없는 세계라고 말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만이 영혼 깊은 곳에서 만난 하늘의 비밀을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면에 자신이 체험한 영적인 세계, 말하자면 받는 경험을 타인에게 들려주는 것이 그런 경험을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일 수도 있다. 특히나 요즘 같이 모두들 땅의 일에 얽매여 한치 앞을 보지 못한 채로 각박하게들 살아가는 현실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몸소 경험한 하늘의 경지를 들려준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 수가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나의 경우 받은 체험 있다. 1974년이었으니까 이미 22년이나 지난 일이다. 1974 2 23일이었다. 그때 나는 긴급조치 1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던 때이다. 그날 몸으로 체험한 성령의 체험을 기리며 지금까지 해마다 2 23일이 되면 꼭꼭 하루 동안 금식을 하며 그날 받은 은혜를 기리곤 한다.

 

체험의 신앙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시는 불이십니다.”(히브리서 1229)

1974년의 2 23일은 너무나 추운 날씨였다. 본래 2 늦추위가 매섭기로 알려져 있지만 그날의 추위는 혹독하였다. 내가 수감되어 있던 방은 서대문구치소의 0.7 평인 좁은 방이었다. 방이 비좁아 안에서는 맨손 체조 조차 없는 넓이였다. 평생에 그날에 겪은 추위를 경험한 적이 없다. 나중엔 추위가 심하여지니 다리뼈를 가위나 송곳으로 후벼 파내는 듯이나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혼자서 뜀박질을 하다가, 기도를 하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하여 내가 있는 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에 어려워져 마지막에는 성경을 성경 속에 나오는자를 차례로 찾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나마 시간을 보내며 추위를 이겨보려는 생각에서였다.

성경에서 내가 처음으로 찾아 불자는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망명객 신세가 되어 호랩산 기슭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양떼를 돌보던 때의 기록에서였다. 양떼를 돌보던 모세는 어느 한국의 찔레나무와 비슷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꺼지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불이 훨훨 타오르기만 하고 꺼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그가 가까이로 다가 갔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애굽기 3 4, 5)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남은 삶을 이스라엘 동족을 오랜 동안의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케 되었다.

 

체험의 신앙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1974 2 23 내가 정치범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에 체험한 성령의 체험을 쓰고 있다. 그날 너무나 추워서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성경을 펴고 성경 속에 등장하는자를 차례로 찾아 나가던 나는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신의 제사장들 450 명을 상대로 어느 신이 신인지를 겨루던 때에 임하였던 불에 관한 기록을 읽었다. 하나님을 섬기던 나라 이스라엘에 아합-이세벨 왕과 왕후가 등장하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멀리하고 거짓 신인 바알을 섬기는 나라로 변질 되었다. 그들은 나라를 바알 천지로 만들어 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학살하고 하나님 신앙에 충성하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핍박하였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등장하였다. 그는 변방의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다.

엘리야는 어느 앞에 당당히 나타나 당신들이 믿는 바알신이 신인지 아니면 조상님들로부터 믿어 여호와 하나님이 신인지를 확인하는 대결을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엘리야의 요구에 응하여 바알신의 제사장 450명과 엘리야는 백성들과 왕이 참석한 자리인 갈멜산 정상에서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제물을 차린 후에 각기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의 제물을 태우는 신이 신인 것을 결판 짓는 내기를 걸었다.

먼저 바알 신의 제사장들이 종일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으나 바알 신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다음 차례로 엘리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단 위의 제물을 말끔히 불살랐다.

나는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하늘로써 불을 내리셨던 하나님께서 추위에 떠는 나에게도 불을 내려 추위를 이기게 달라고 기도 드리기 시작하였다.

 

체험의 신앙

1974 2 23 서대문 교도소에서 혹독한 추위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는 성경을 펴고 성경 속의자를 찾아 나가며 추위를 이기려 하였던 이야기는 앞에서 바다. 그렇게 시작한 나는 먼저 구약성경에서 차근차근히자를 찾아 읽은 후에 신약으로 넘어 갔다.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자는 마태복음 3 11절에서였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여 이르기를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출중하여서 나는 그의 신들메를 매기도 감당 못할 처지라고 이르고는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하였다. 말씀을 읽고서 나는 무릎을 단정히 꿇고는 손을 모으고 기도 드리기 시작하였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러 오신 예수님 저에게 불 세례 주시옵소서. 지금 추위를 감당키 어려워 정신이 혼미할 정도입니다. 제발 저에게 불 세례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말씀에 이어 다음의자인 누가복음 12 49절에 나오는자를 찾아내고서 나는 놀랐다. 나는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몸이다. 나와 같은 처지를 모태신앙(母胎信仰)이라 일컫는다.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뜻에서다. 그렇게 모태신앙으로 시작하여 신학교를 나와 성직자가 되기까지 내가 누가복음을 아마 수십 번은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누가복음을 읽었으면서도 이전에 읽었을 때에는 전연 느끼지 못하였던 말씀이 그날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께서 땅에 던지러 오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체험의 신앙 ⑤

1세기 무렵 최강대국은 로마제국이었다. 로마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지역에서 체제전복을 시도하는 정치범들에게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극형을 집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팔레스틴에서 정치범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다. 이를 십자가상의 7(十字架上七言)이라 일컫는다. 그중에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있다. 나는 누가복음 12 49절의 말씀내가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그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었을 더 원하리요.”라고 기록된 말씀을 접하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다 이루었다하신 말씀이 바로 자신이 전한 불이 이미 붙었다는 말씀이거니 하고 이해하였다.

나는 이어서 신약성경 중에 나오는자를 계속 찾아 읽어 나가다가 사도행전 2장 첫 부분에 나오는 오순절에 임하였던 성령의 불이 강력하게 임하였던 말씀에 이르렀다. 사도행전 2 1절에서 4절 사이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나는 내 몸에 임하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체험한 경험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격적인 체험이었기에 그 후로 나는 해마다 2 23일을 맞으면 반드시 하루를 금식 기도하며 1974 2 23일에 서울 서대문구치소 안에서 경험하였던 그날의 감동을 마음에 되새기며 그날 받았던 은혜를 되새김질하고 그 날 읽었던 말씀들을 다시 찾으며 하루 종일 은혜를 누리곤 한다. 나에게는 은혜 중의 은혜였고 축복 중의 축복인 날이었다.

 

체험의 신앙 ⑥          2006-11-02

사도행전 2 1절에서 4절 사이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교회가 시작케 된 부분을 읽는 동안에 나는 내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뼈속 깊이 밀려드는 추위 탓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던 나에게 온 몸에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런 갑작스런 변화에 놀란 나는 내 몸을 만져보다가는 마루 바닥을 짚어 보았다. 그랬더니 마루 바닥이 마치 온돌방처럼 따듯한 것이었다. 의아하게 여긴 나는 사방 벽을 더듬어 보았더니 벽들이 마치 스팀이 들어온 듯이 따뜻한 것이었다. 한 동안 나는 그런 현상이 내가’ ‘그러다가 자기최면에라도 걸린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당혹스럽기까지 하였다.

심리학에서 사람이 한 가지 일이나 생각에 몰두하여 그에 빠져 들게 되면 나중엔 착각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임신을 하고 싶은 여인이 늘 임신을 생각하다가 실제는 임신이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여겨 입덧을 하고 배가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를 일컬어 가임신(假姙娠)이라 한다. 나는 내 몸의 그런 현상이 가임신과 같이 자기 최면에 빠져든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상태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어로써 함께 하여 주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기는 내 마음 속에 밀려드는 기쁨이 넘치게 되면서부터였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듯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말로만 듣던 은혜의 강물이 내 뱃속에 흐르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감격에 넘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나로 모아기도 드리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사람도 사람대접하여 주시어 내 기도를 들어 응답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기쁨, 이 감격을 지니고 내 평생토록 감사드리며 살겠습니다.”

나는 나의 믿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로써 그 방에 오심을 느끼고는 네 방 모퉁이를 돌면서 절하며 감사를 드렸다. 그렇게 훈훈한 시간이 그 날 오후 3,4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것이었다.

 

체험의 신앙 ⑦             2006-11-03

1974 2 23일 낮 동안에 그렇게성령의 불이 내게 임하는 체험을 하였던 나는 그날 밤에 다시 한번 더 은혜를 받게 되었다. 취침 나팔소리를 듣고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동상 탓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발에 그날따라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일어나 불빛에 발을 비춰보았다.

그 해 1 17일에유신헌법 철폐하라는 구호를 걸고 시위하다가 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갔던 나는 그날로부터 힘든 취조과정이 시작 되었다. 가장 힘든 것이 밤에 잠을 재우지 않고 진행되는 취조과정이었다. 서대문 소재의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매일 밤 9시경이 되면 정보부로 불려가 밤샘 조사를 받곤하였다

밤 새 한 숨 자지를 못한 채로 조사를 받다가 새벽녘에 다시 구치소로 돌아 올 때면 졸음이 쏟아져 졸면서 걷는 것이었다. 그 해는 눈이 많이 왔다. 고무신을 신은 발로 졸면서 눈길을 걷노라면 신발 속에 눈이 들어가 양말이 젖게 되었다. 그렇게 방에 들어가면 양말을 벗고 발을 말린 채로 잠자리에 들어야 동상이 예방 되는 것인데 워낙 잠이 쏟아지니 방에 들어가는 즉시로 쓰러져 잠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상이 심하여졌다. 동상은 추울 때는 덜하지만 이부자리에 들어가 발이 녹게 되면 가렵기 시작한다. 그래서 밤마다 발바닥과 발가락을 긁다가 잠이 들곤하여 발바닥과 발가락들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밤에는 왠일인지 발이 가렵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일어나 불빛에 발을 비쳐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발 전체에서 동상의 흔적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말짱한 발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지켜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이렇게나 자상하시구나 하는 감격에 몸 둘 바를 모르고 감격에 휩싸였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2004-04-0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에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6)

하나님이 개를 지으실 때는 개처럼 지으시고 소를 지으실 때는 소처럼 지으셨으나 사람을 지으실 때는 사람처럼 지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는 하나님처럼 지으셨다. ‘하나님처럼 지었다’ 할 때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남의 형상(Imago Dei, Image of God)이란 어떤 내용일까? 신학에서는 네 가지를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으로 이해한다. 첫째는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넷째는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들 네 가지 형상을 온몸으로 체득(體得)하여 그렇게 살아갈 때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들 네 가지를 삶 속에서 실천하여 나갈 때가 바로 영적인 삶이요 가장 인간다운 삶이다. 가장 인간다운 삶이기에 행복한 삶이 된다. 우리들 모두가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분발하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창세기 1 26)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시고 만물을 지으실 때에 소는 소처럼 지으셨고 개는 개처럼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사람처럼 지으시지 않으셨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지으셨다. 위에 적은 성경의 번째 책인 창세기 번째 장에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사람처럼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지으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일컬어하나님의 형상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해 준다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4 가지로 설명한다. 이들 4 가지를 지닌 사람들은 하나님 쪽에 가까운 영적인 사람들이고 지니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 쪽으로 가까운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첫째는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
셋째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
넷째는 공동체적인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하나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형상

- 영적인 하나님

1970년대 후반 나는 서울 청계천 철거민들과 함께 내려갔다. 활빈귀농개척단(活貧歸農開拓團)이란 이름의 조직으로 철거당하는 빈민들을 인솔하여 경기도 화성군 소재의 남양만 간척지로 내려갔다. 갯벌에 보금자리를 짓고 교회당을 세우고 소금땅을 농토로 개간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다. 새마을 공장을 세우고 양돈단지, 젓소단지 등을 세워 사는 농촌을 일구겠노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를 수 년 만에 경영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결론을 쓰겠다. 예배시간에 밀어 닥친 빚쟁이들이 교인 숫자보다 많아졌다. 내가 설교할라치면 줄줄이 뒷켠에 빚쟁이들이김목사 말은 잘하는데 빚은 갚아야지...” 하고 소리를 지르는 정도였다. 견디다 못한 나는 바닷가로 나가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번씩이나 되풀이 하였다. 신발을 벗을 때는 바닷물로 들어가 난장판을 끝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실행하려면아니야. 이런 식으로 끝낼 없지하는 마음이 들어 신발을 신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번이나 되풀이 끝에 교회당 켠에 있는 기도실로 들어갔다. 이왕지사 죽으려면 기도하다 죽는 것이 모양세가 좋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기도실에서 문을 안으로 닫아건 채로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은 채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께서 나를 맡아 주시든지 아니면 자리에서 그냥 죽겠습니다.”하고 떼쓰다시피 기도 드렸다.

그러기를 닷세 만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로 마음속의 염려와 눌림은 사라지고 자유함과 평화가 마음 깊이 깃들게 되었다.

 

[출처]김진홍목사의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