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기라
[출처]http://yddch.or.kr/board (기독교대한감리회 용두동교회)
설교자 : 조재진목사 설교일 : 2010년 1월 17일
성경 본문 : 로마서12:14-21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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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직장에서 일을 잘 못해서 해고당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를 잘하지 못해서 해고당하는 경우가 거의 두 배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대인관계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덕스러운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때 불신자들과 덕스러운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불신자들과 쉽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가치관이 많이 다르고 생활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야 목사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목사로 대접을 해주고, 우리 집에서는 기분 나쁘면 ‘학번 순으로 집합’이라고 하면 됩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믿지 않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해 보기도 하고, 양보해야 하고, 불의한 일을 당하면서도 싸울 수도 없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반항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 어떻게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불신자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살 때 특별히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삶의 원리가 있다고 먼저 가르쳐줍니다. 그 첫째 원리가 바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급적 적을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원수가 되거나 안 좋은 관계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화목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좋게 지내려고 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것은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우리들은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 원리는 21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악해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이 악하게 대한다고 똑같이 악해지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불신자들이 설혹 악하게 대한다 할지라도 선으로써 그 악을 이기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악하다고 해서 똑같이 악하게 나온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해야 하고, 그리고 상대방이 아무리 악하게 대한다 할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이 두 가지 큰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원리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은, 믿는 자들이 이 땅을 살아야 할 실제적인 행동지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행동지침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
우리가 지켜야 할 행동지침 그 첫째는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박해란 원래 신앙의 문제로 인해 받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아무 이유 없이 믿는 우리를 괴롭히고 암암리에 손해를 입히는 온갖 외부적인 압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의 본성에 거슬리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악을 당할 때 더 큰 악으로 복수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복수심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뺨을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대방의 턱을 날려버려야 속이 시원합니다. 오죽하면 ‘되로 받고 말로 준다’라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보통 우리 민족에 대해 말할 때,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많이 당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나 우리 민족이 즐겨 부르는 노래에는 이런 한이 담긴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부르는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보십시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아리랑의 노래의 내용이 문제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그 다음에 나오는 가사가 무엇입니까?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님이 나를 버리고 가는데 ‘갈테면 가봐라, 그러나 가긴 가되 가다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서 넘어져 버려라’ 라는 말입니다. 일종의 저주가 담겨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는데 어디 잘되나 두고 보자’라는 심리가 깔려있습니다. 이런 한과 복수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접근입니다. 어떻게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용서하고 오히려 축복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감정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살을 뜯어내는 것 같은 아픔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은 마땅히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3:9에서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박해하는 자에게 욕을 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욕과 저주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이웃을 용서하고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야 합니다.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파송하실 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10: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할 때 무조건 축복하라는 당부입니다. 그 집이 망할 집이건 아니건 그것을 따지지 말고 성도가 해야 할 첫 번째 사명은 가자마자 축복부터 빌어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받을 것이지만 합당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의 전도 성공의 비결은 가는 곳마다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를 만나건, 어른을 만나건 그는 축복했고, 술주정뱅이를 만나도 축복했고, 깡패를 만나도 축복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축복하는 대로 그들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축복을 했더니 자라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깡패를 축복했더니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축복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축복하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못살게 굴어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믿는 자들의 삶입니다.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라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두 번째 행동지침은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동고동락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런 삶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가서 안아주고, 손이라도 붙잡아 줍니다. 또 이웃이 즐거운 일을 당하면 가서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나 슬픈 일을 당해 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 슬픔을 나누면서 같이 울어주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이 즐거워할 때 같이 즐거워해야 하는데, 이게 잘 안됩니다. 이웃이 아파하고 울 때에 같이 슬퍼하고 울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됩니다. 물론 평소에 좋아하는 이웃이 슬픈 일을 당했으면 같이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가 좋지 않던 이웃이 어떤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되면 그게 잘 안됩니다. 오히려 속에서 ‘고소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것은 그래도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비해 정말 어려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웃이 기쁜 일을 만났을 때 진정으로 축하해 주며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속 사도시대에 ‘황금의 입’으로 불리어졌던 크리소스톰은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마디 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는 쉽다.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상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이웃이 당한 슬픔보다 이웃이 당한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 속담에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면 얼마나 가까운 사이입니까? 그러면 당연히 기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가 아픕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형제가 같이 예배 드리다가 일어났습니다.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형 가인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형 가인의 마음에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동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들에서 동생을 죽여버렸습니다.
누가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면 같이 기뻐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뭐 박사가 별거냐? 요즘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백수들이 수두룩하다더라’ 라고 가시 돋친 말을 합니다. 그러지 말고 ‘정말 수고했구나! 하나님께 쓰임 받을 거예요!’라고 축복해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누가 예쁘게 화장하고 오면 ‘너 참 예쁘다 그 정도면 미스 코리아에 나가도 되겠다’ 라고 말해주면 좋잖아요? 그런데 어떤 여자 분들은 남이 예쁘게 화장하고 오는 것을 못 봅니다. ‘돈을 많이 들였네, 화장품을 쳐 발랐네’라고 폄하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본성적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뭐라고 명령하십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전도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체로 시기와 질투가 강한 자들입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보고, 남이 슬퍼할 때 그 아픔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절대로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 전도도 잘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때, 복음증거의 장애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이웃이 되라
세 번째 성도들이 이 땅을 살면서 꼭 지켜야 할 삶의 자세는 겸손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잘난 체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웃 사람을 보고 ‘나는 너하고는 달라 적어도 나는 너보다는 낫다’라는 식으로 행동을 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는 으스대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남보다 더 낫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자랑하려다 보니까 과장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실제로 ‘네가 정말 겸손한 이웃이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상대방이 교만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지만 좀 거만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보면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진짜 겸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해서 주의하라고 가르치시면서,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는 것, 그리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 눈에 잘 보이려고 옷 술을 길게 하고 경문의 땀을 넓게 한 옷을 입고 다닌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를 나타내고 높은 데 마음을 두어서는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세가 아니라고 주님은 가르쳤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주장만 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지혜 있는 체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고, 상대방의 인정과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교만하거나 잘난 체 하지 말고 낮은 데 처하며 이웃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마지막 네 번째는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12:19-2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본능에는 강한 보복심리가 있습니다.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절대로 복수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원수가 생길 수 있지만 그러나 성도들은 그 원수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네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다가 잘못하면 더 큰 화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공정하게 원수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화가 나고 감정이 상하면, 나에게 해를 가한 원수에게 더 큰 것으로 갚으면 갚았지, 덜 갚지는 않습니다. 공정하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억울한 일 모두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은 형제들을 만났을 때,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그는 하나님을 향한 철두철미한 신앙으로 복수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차례가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 왕을 ‘내 원수’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 왕에게 복수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게 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꾸 복수하려고 기를 씁니까? 하나님을 향한 철두철미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낱낱이 아시며 내 모든 삶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수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 복수하려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바로 십자가 사건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된 인간들에게 복수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는지 아시지요?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스데반은 예수님과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하던 현장에는 주동자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데반의 순교 때문에 변화되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위대한 전도자 바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었다’ 그렇게 강퍅했던 바울이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그의 마음은 흔들리면서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어려울 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마실 것을 갖다 주면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것과 같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뜨거운 화로를 머리에 얹은 사람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뜨거워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겠지요? 머리에 숯불을 얹는다는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제가 공감하는 것은, 원수인 줄 알면서도 가서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그 사람은 머리로부터 온 몸이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과 용서로 대한다면, 원수의 마음이라도 녹일 수 있고, 그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 설교가 제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제 자신도 그렇게 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망설이면서 ‘하나님 이 본문을 꼭 설교해야 할까요?, 아니면 건너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저에게 두 가지 마음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에 미움을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하거나 건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결국 둘 다 망하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맡아주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욕과 저주가, 그리고 악이 가득한 세상을 살리는 길이 겸손하게 이웃에게 마음을 주고, 그들을 축복하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수하고 미워하는 방법으로는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한 영혼도 살릴 수 없습니다. 정말 전도하려면, 겸손하게 이웃에게 마음을 주고, 축복하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불신자들과 덕스러운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세상과 담쌓고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세상 한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과 반대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번 따라 해 보실까요? “반대정신” 그렇습니다. 내 본성과 반대되게,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게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반대정신” 이것은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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