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주초 문제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김향주교수
1. 기독교인의 양심 문제
2. 기독교인의 양심을 무율법주의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3. 기독교인의 양심을 율법주의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4. 기독교인의 양심을 신율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1973년 필자가 신학에 한참 재미를 붙여 가고 있을 때였다.
개혁주의 신학에 갈수록 호감을 더해 가고 있을 때 당시 대한신학교의 학생과를 담당하시며 학생을 잘 인도하고 계시던 K목사님과의 우연한 대화 속에서 "나는 소주를 한 두 병 마시고서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 후로 필자는 심한 고뇌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탓도 있었거니와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탓, 인간의 언어를 모든 신앙의 기준을 삼았던 잘못도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조금 범위를 넓혀 생각하자면 술․담배만이 아니고 영화를 보러 가는 문제, 비단 음식과 옷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문제, 자동차도 좋은 것만을 타야 한다는 문제등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기독교인의 삶과 양심 문제에 결부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기독교인의 삶과 율법, 양심 문제에 있어서 무 율법에 양심을 기초로 하느냐?
율법에 양심을 기초로 하느냐? 아니면 율법과 무 율법에서 어떤 양심으로 기준을 두고 생활해야 하느냐?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주초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먹고 마시는 삶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영위해 나가는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기독교인의 양심 문제
바울은 기독교인의 양심 문제를 로마서 14:1-15:13에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주로 먹고 마시는 문제를 기독교인의 양심에 의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파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양심에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을 중심한 양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이는 양심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이 자유로운 양심은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이 "하라"는 것이나 "하지 말라"는 것이 명백하지 아니할 때 인간의 자유로운 양심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이는 아디아포라(αδιαθωρα)의 문제이다.
바울 당시 이 문제는 고기 먹는 문제, 절기, 음력, 구약 의식의 율례들에 대한 종교적 문제인데 로마서 14장 3절을 보면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먹을 수 없다"는 것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앙의 양심에 의해서 자유롭게 행할 것이지 결정적 율법주의화 하거나 무율법적으로 방조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어떤 규정을 정하여 비판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말한 양심의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양심과 하나님을 위한 양심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즉 비평하지 말아야 할 양심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처지가 어떤 양심의 형편에 처하든지 자신에 합당하지 않다고 해서 비평하면 서로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내용이다.
특별히 로마서 14:15은 "형제를 식물로 망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로마서 14장 14절의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하신 말씀은 자율주의 내지는 무율법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는 선악의 문제가 인간의 생각이나 결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아디아포라(αδιαθωρα)의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신앙 양심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신본주의에 의해 결정된 사항을 말한다.
즉 율법주의적 결정이냐? 자율주의적 결정이냐?
무율법주의적 결정이냐? 의 문제에 들어갈 때 신본주의 기초가 되는 신율주의(神律主義)적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다아포라의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에 무관심 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의 기준에 의한 양심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이다.
2. 기독교인의 양심을 무율법주의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무율법주의적 기독교인의 양심은 상황 윤리 내지는 자유 방임주의로 갈 수 있는 문을 여는 계기가 된다.
양심의 기준이 없고 통일되고 일치성 있는 양심의 기준이 되는 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는 양심이 무율법주의에서 파생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주초문제에 있어서 무율법주의적 양심은 얼마든지 술 담배를 해도 성경율법이 명시적으로 규범을 정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사실 성경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도 술, 담배 문제는 전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고 주장하게 된다.
쉽게 통용되는 말로 성경에 먹지 말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없고 취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강조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이다.
3. 기독교인의 양심을 율법주의와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무율법주의나 율법주의나 둘다 자율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무율법주의는 율법의 기준 없이 기독교인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생각의 결정에 다 기초를 두고 있고 율법주의는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생각에 의존하여 율법적 기준을 정하여 율법화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율법주의는 사실상 율법에서 벗어난 또다른 율법화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손씻는 의식을 행하는 습관은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버리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을 행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다.
또한 비록 성경에 명시된 율법을 실행함에 있어서도 만약 안식일의 문제가 나온다면 마태복음 12장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책망하였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안식일에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던 일을 사무엘상 21:1-6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을 책망 하셨다.
이런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율법을 신앙 생활에 적용함에 있어서도 율법이 율법되게 적용하여야 하며 은혜의 몽학선생이 되도록 적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술 담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율주의적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한다.
이는 먹을 수 있고 안 먹을 수 있는 기준이 기독교인의 양심에 의존하지만 그 양심은 인본주의적 결의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적 양심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순종하는 자발적인 복종에 의거한 양심의 자유이어야 한다.
4. 기독교인의 양심을 신율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1) 계명 문제와 양심문제
계명문제는 적용에 있어서 변치 아니하는 기준을 요한다.
만약 출애굽기 20장 1절 이하 10계명을 자유 자재로 변경시킬 수 있다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절대 명령에 손상이 가게 된다.
그러나 양심문제는 적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율적으로 적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0:27-28에 보면 우상제물 먹는 문제는 양심 문제로 먹을 수 있을 때는 양심이 허락하면 묻지 말고 먹을 수 있으나 누가 제물이라고 말하게 되면 말한 자와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29절에 "양심은 너의 것이 아니오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인하여 판단을 받으리요"라는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양심이 결국 자율에 의한 것이 아니오 신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먹을 수 있는 입장이나 안 먹을 수 있는 입장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경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2) 지속적 교훈과 비 지속적 교훈
디모데후서 2장 5절, 로마서 3장 10절, 로마서 2장 1절, 갈라디아서 1장 8절 같은 경우 신론, 인간론, 구원론 등에 관한 성경 말씀은 변함 없는 지속적 교훈에 속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12:19-25에 첫 아들이 죽으면 그 아내가 다음 아들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일시적인 교훈으로 끝나고 만다.
그 이유는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는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약속이 예수님으로 완성됐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기 38장의 다말이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아들을 낳은 사건으로 다말은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됐는데 다말은 자신의 몸에서 메시아의 탄생을 언약으로 받을 것을 신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메시아의 탄생으로 그 교훈은 소용이 없어졌다.
3) 폐기된 진리와 존속된 진리
히브리서 7장 18절에 의거 구약의 제사장직은 폐기됐다.
그것은 베드로전서 2:4-5에 의거 이미 제사장직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성됐기 때문이다.
나아가 구약의 레위기 11장의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은 폐기된 진리로 밖에 볼 수 없다.
그것은 골로새서 2장 16절의 먹고 마시는 일과 안식일과 월삭과 절기는 폄론하지 못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구약적으로 지켜야 하는가?
또 먹고 마시는 문제를 구약적으로 지켜야 하는가? 또 절기도 구약적으로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폐기된 진리이므로 그 의미를 상고하여 양심의 결정에 의해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지 구약적으로 의식을 행하는 일은 이미 폐기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빌립보서 2장7절, 로마서 12장 1절, 히브리서 13장 15절, 빌립보서 4장 18절 등의 교리에 관한 문제는 존속된 진리로 규정해야 한다.
4) 주초문제에 있어서 양심문제
잠언 23장 31절과 23장 18절에 의해 술은 전혀 먹기는커녕 가까이 할 수 없도록 교훈하고 있다.
또한 전도서 9장 7절에 보면 "기쁨으로 포도주를 마실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더욱이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하고 계신다. 이는 분명 아디아포라의 문제에 해당된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어떤 때는 먹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규정을 통해 양심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로 사용하여 신앙생활에 먹고 마시는 문제를 적용하라는 것이다.
먹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먹어야 하고 먹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아니하면 반드시 먹지 말아야 한다.
양심이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방종의 양심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바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하라는 양심이다.
사실 주초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유익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첫째, 건강에 너무나 해가되고 둘째, 인격의 형성에 있어서 실수와 정신 집중에 해가 되고 있다.
미국에는 술을 중독성 음식으로 규정하여 주기적으로 술을 먹는 사람을 환자로 취급하여 술로 인해 범죄하거나 실수를 범할 때 병원에 가서 일정기간 동안 감금되어 치료를 받도록 되어 있다.
또한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보건부 장관으 보고를 통해 담배를 중독성 마약으로 규정하여 발표한 후 미국의 담배세금이 4배로 오르고 모든 공공장소에서 금연하도록 법적 조치를 취하여 담배 애호가들이 발을 놓을 곳이 없이 돼 가고 있다.
담배 문제를 논할 때 성경에 문자적을 담배를 먹지 말라는 구절이 없으니 피워도 된다는 억지 주장하는 자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미 언급한대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양심의 자유가 신율에 의거한다는 성경의 내용을 전혀 고려치 아니하는 무지에서 나오는 소치이다.
첨가하여 생각할 것은 술 담배 문제만은 아니다.
커피, 그 외 자극성 있는 음식 그리고 너무나 음식을 다양하게 즐기기를 애쓰는 경우, 옷을 너무 비싸게 화려하게 치장하는 경우, 나아가 목회자들이 행사 때마다 고급 호텔을 찾는 경우, 가장 호화로운 차를 타는 경우가 모두 양심의 자유에 있어서 신율적이 돼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의 먹고 마시고 사는 일로 인하여 타인의 거침이 된다면 회개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신앙 생활을 수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는 우리 성도가 오직 주님의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감히 나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물건 하나라도 나를 우선으로 할 때는 주의의 신자나 불신자나 나로 인하여 실족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삼가 먹고 마시는 문제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성도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피를 뿌린 그 순교의 발자취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처럼 평안하게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먹을 수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 진다면 당연히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전으로 알고 항상 영적 긴장을 풀지 말고 가슴을 조이며 영혼의 옷깃을 시간마다 분초마다 여미며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단장하는 신부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고대할 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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