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禮拜)란 무엇일까요?
한자어의 예배(禮拜, 예도 례, 절 배)는 "겸손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헬라어로는 명사 '프로스퀴네테스( )'인데, 이 단어는 동사 '프로스퀴네오( )'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프로스퀴네오는 "-를 향하여" 라는 뜻을 갖은 '프로스'라는 전치사와 "키스하다"는 뜻을 갖은 '퀴네오'라는 동사가 합쳐져서 "-에게 경의를 표하다, 엎드려 절하다, 경배하다"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키스를 아무하고 하나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람둥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키스는 진정 사랑하는 사랑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키스하듯 사랑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 이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랑은 소중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마움과 감사와 존경심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돌리는 존경심과 경의, 숭배, 존중, 찬양, 찬사,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예배는 무언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드리기보다는 받는데 더 많은 관심과 열심이(!) 있습니다. '복을 받는다, 은혜를 받는다, 말씀을 받는다' 물론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임하지만, 그러나 그런 예배는 인간 중심적인 인본주의 예배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을 위한 예배이지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들러리고 인간이 주인입니다. 이게 무슨 예배이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물질, 시간, 경배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기만 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온전히 풍족하게 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은혜와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감격이 없는 것은 온전히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물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제가 총각 때 짝사랑하던 자매에게 선물을 한 적 있습니다(우리 사모 알면 밥상에 국물도(!) 없을 거니까 소문 내지 마세요!). 선물을 하려고 하니 고민이 됩니다. 어떤 선물을 해야 자매의 마음을 뿅 가게할까? 몇일 고민 고민하다가 선물 집에 가서도 고르고 또 고르고, 선물을 사놓고도 가슴이 두근두근 얼마나 마음이 설레고 즐겁던지요! 받는 것보다 선물하는 기분이 더 즐겁다는 것을 그때 느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런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드리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온전히 드려봅시다. 예배의 큰 감격에 빠져 봅시다. 가슴 벅찬 설레임이 있는 예배를 만들어 봅시다. 그러므로 또한 온전히 누리십시다.
그러면 누구에게 드리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분께 예배해야 합니까?
1. 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아버지이십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분이 예배의 대상이지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보자면 예배의 대상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21절 下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 예배 장소는 어디입니까?
예배당 안에서만 예배해야 합니까? 21절 上을 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듯이 우리의 예배도 장소의 국한, 제한이 없이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야외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말은 우리의 생활의 모든 영역,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은 예배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이 온전히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과 방법이 문제입니다.
3. 예배 시간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주일 낮,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새벽 등등으로 시간을 정해서 예배를 드리지만 성경에는 시간도 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21절에 下 때가 이르리니 -- 23절 중 -- 곧 이때라 --- 그러나 제가 전통적인 주일예배나 수요예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집회 곧 예배를 위해서 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교제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때문에 시간을 정하여 같은 장소에 같이 모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 속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 인생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를 가든지 예배해야 합니다. '묵도, 신앙고백 ... ... 축도' 이런 정형화된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4. 예배의 방법
1) 신령과 진정으로
23절과 24절에 나오는 신령과 진정을 헬라어 본문에서 보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 신령과 진정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령하게, 정성을 다하여 그런 뜻일까요? 죄송하지만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아닙니다. 원어의 정확한 뜻은 '영과 진리로' 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령 안에서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가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는 통회와 감사와 감격과 찬양이 있는 예배입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대상29: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시150: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또한 우리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진리가 충만한 예배이어야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고, 말씀입니다. 즉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예배의 중심은 말씀, 설교입니다. 예배시간의 가장 중심에, 그리고 가장 긴 시간이 설교시간입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은혜를 소개하고, 가르치고, 선포하여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성령과 진리의 말씀, 즉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가슴 설레는 만남, 벅찬 감격이 넘치는 은혜로운 교제가 있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25-26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 안에서 이렇게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예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언제나 오실까요? 혹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미 태어나셨다는 데요(!). 그 말이 정말 맞습니까? 성경이 증거하고 성령께서 증거 하시고, 역사가 증거 하는 확실한 증거는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안 오신 것처럼 아무렇게나 예배한다면 예수님께 대한 모욕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오셨으니 우리도 확실하게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과 진리가 일주에 한번 또는 정해진 예배시간만 계시고 다른 시간에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시나요? 아니면 하늘나라로 피서 가시나요? 여러분, 성령과 진리는 365일 매순간 순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매 순간, 365일, 일평생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예배입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사는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과 진리 안에 거하는 성도가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성령과 진리 안에 거하는 성도가 우상에게 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정기적인 예배뿐만 아니라 일평생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삶으로 예배하므로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권세와 은혜와 복을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3절下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조금 응용하자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사는 성도를 하나님께 [보고 또 보고] 싶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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