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와 그 세 아들의 이야기! (창 9:18-27)
미국에 다녀온 개구리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개구리는 잠시 동안 미국에 가서 살면서 주워들은 영어 몇 마디로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개구리는 폴짝거리며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데 마침 소 한 마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는 '소야, 소야. 너는 무얼 먹고사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가 '나는 풀을 먹고산단다' 그러자 개구리는 '오우! 샐러드!' 이렇게 외치고는 의기양양하게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갑니다.
폴짝 폴짝 뛰면서 이번엔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개구리는 '호랑아 너는 무얼 먹고사니?'라고 물자 '나는 고기를 먹고산단다.' 그러자 개구리는 '오우! 스테이크!'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영어 실력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더욱 폴짝거리며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코브라 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개구리가 이번에도 '뱀아, 뱀아 너는 무얼 먹고사니?' 그러자 코브라 뱀은 '음- 나는 말이여 너처럼 혀 꼬부라진 개구리를 잡아먹고 살지!'
그러자 개구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면서, '아따, 성님! 왜 그런 다요?' 그러면서 줄행랑을 쳤으나 그 날 코브라 뱀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답니다. /할/
사람들도 자신이 잘난 척 할 때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잘난 척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예수를 자랑하면서 살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이번 주일은 2013년에 맞이하는 추석명절이 있는 주간입니다. 추석이 오면 귀성객들로 고속도로는 크게 붐비고 혼잡합니다. 귀성길이 지옥길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고향에 내려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이웃과 친구들과 형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추석은 우리 고유의 명절입니다. 이런 명절에 부모님을 잘 섬기고 형제간에 깊은 우애가 넘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경로석에 한 아가씨가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한 어르신이 서 계시다 괘씸한 생각이 들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가씨, 여기는 노약자 지정석인데' 그 말이 떨어지자 아가씨가 눈을 번쩍 뜨더니 신경질적으로 대꾸합니다. '저도 돈 내고 탔는데 왜 이러세요?' 그러자 그 어르신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여기는 돈 안 내고 타는 사람이 앉는 자리거든...'
요즘 세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 대해 존경하고 어려워하는 미덕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 노아의 실수를 덮어준 두 아들과 그 실수를 끄집어낸 함의 이야기입니다. 효자와 불효자의 이야기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숙종 대왕이 변복을 하고 민가를 살피기 위해 나갔습니다. 한 오두막집에 이르러 보니 괴이한 현상이 눈앞에 들어 왔습니다. '젊은이는 노래를 하고, 중은 춤을 추고, 노인은 울고 있는 광경이 들어온 것'입니다.
너무 이상한 숙종 대왕이 자초지종을 물으니 사연이 이것입니다. 그 날이 시어머니의 생일날인데 너무 가난하여 며느리가 머리를 짤라 그 날 주안을 마련하고 아들이 노래를 부르고 며느리가 춤을 추고 그 모습에 너무 감동이 된 시어머니가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효부, 효자를 본 숙종 대왕은 너무 마음이 기뻤습니다. 고기 열 근과 살 한섬을 내어주고, 그 젊은 아들에게 '석 달 뒤에 과거를 보러 올라 오라'고 해서 그 아들이 올라갔습니다.
그 날 과거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젊은이는 노래하고, 중은 춤추고, 노인은 울고 있는 이유'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장원급제하여 한 시대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할/
흔히 많은 사람들이 효 사상이나 경로사상이 유교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점에서 약하다고 말합니다. 혹시 제사 문제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단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꼭 지켜야 될 도리인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이 바로 효의 계명입니다. 출20: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한번 따져 보십시오. '십계명이 앞서는가? 공자가 앞서는가?' 모세가 출애굽 직후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모세가 공자보다 백년 앞선 인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효를 강조하기 훨씬 백년 전에 이미 성경에서 효를 강조한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어른 공경과 효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다면 반드시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셈과 야벳은 부모를 잘 섬기다가 복을 받았지만, 함은 불효를 저질러서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할/
▶성경은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라'고 가르칩니까?
⑴부모를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잠23:22절에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부모님을 중요한 분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부모님이 젊을 때는 힘이 있지만, 나이가 드시면서 힘이 빠집니다. 이처럼 부족한 면이 있어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⑵부모를 봉양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주고, 주고, 주고, 또 주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나를 길러주셨기에 이제 자식 된 나는 장성하면서 부모님을 섬기고 봉양해 드릴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자 친(親)자와 효(孝)자의의 유래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옛날 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나무를 해 가지고 장터에 팔러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초조한 마음으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멀리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는지 봅니다. 그 모습이 어버이 '친'(親)자입니다.
아들이 반찬거리와 생활용품을 사가자고 오다 멀리 나무 위에 서 계신 어머니를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빈 지게 위에 업고 집으로 모시고 갑니다. 그 모습이 효도 '효'(孝)자입니다. 아들이 노모를 업은 형상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게 인간이 사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⑶부모의 말에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부모 말을 잘 듣는 자식 치고 잘못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자식 잘 되라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레19:32절에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할/ 우리가 부모님과 어른들을 공경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보너스를 주십니다. 엡6: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①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홍수 심판으로 모든 사람이 멸절이 되고, 노아의 식구들만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인류는 노아와 그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고 홍수 심판을 이겨낸 노아는 대단한 신앙 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역시 인간은 별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당시 넓은 지구가 노아의 정원이요, 그 넓은 땅이 모두가 노아의 밭이었습니다. 노아는 포도농사부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포도주가 많아졌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적당히 마신 것이 아니라 취할 정도로 마셨습니다. 아니 도가 지나칠 정도로 마셨습니다. 그래서 대낮에 벌거벗고 장막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술 주정을 하다가 잠이 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할/
②여기서 의인이란 칭호를 받았던 노아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성경은 진실된 말씀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좋은 사건, 아름다운 일들만을 기록한 성경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와 잘못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성경인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또 본문의 노아를 보면서 인간은 이렇게 허물이 크고 실수가 크고 결코 자랑할 수가 없는 존재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사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했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써 그 무서운 인류의 심판에서도 경건하게 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장차 나타날 심판을 예비하는 경고를 받고 120년이라는 장기간도 방주 짓는 일에 순종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방주에서 나오는 날도 첫 번째 하는 우선순위가 하나님을 찾으며 단을 쌓은 아름다운 행위가 마치 수놓듯이 펼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세월이 흐린 뒤의 노아의 행위를 보십시오, 그에게서 연약한 인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할/ ▶이제 본문에서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의 모습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⑴18-19절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들로 말미암아 후손이 땅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은 9:1절과 7절에서 언약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대로 그렇게 번성되어짐을 의미합니다. /할/
⑵20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성한 노동명령을 이루는 일이기에 20절까지의 노아의 모습에서는 별다른 잘못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당시 포도나무에 많은 소출을 얻는 작물이기 때문에 심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다음 21절부터는 망신살이 뻗친 노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⑶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여기서 우리는 그 믿음의 사람 노아가 술이 취해 벌거벗고 나체쇼를 벌린 흐트러져있는 노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체통을 지키지 못한 부모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노릇을 제대로 다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은 부모답게 행동하는 데 있습니다. /믿/
오늘 노아의 사건을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홍수전의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개판 칠 때는 자기를 그렇게 잘 지켰는데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그만 개판 치게 되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홍수 전에 사람들을 가리켜 '강포'했다고 했는데 다 술하고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술 취하면 강포에 빠지게 됩니다. 노아가 술 취하여 개판을 쳤습니다. 그가 홍수 전에 사람들이 많을 때는 오히려 깨어서 기도하며 근신하여 자신을 잘 지켰는데, 그 어려운 난관을 다 극복하자 이제 안일한 마음에 빠져 버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주신 풍부함을 바르게 누리지 못했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해야겠는데 그만 추한 자리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을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셨구나' 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에는 깨달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 역경도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어려움을 내게 필요해서 주셨구나!' 진리를 깨달음으로 점점 감사해야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믿/ 이런 신앙이 계속되어지면 하나님은 물 붓듯이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부어주실 때 더 겸손히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사람들은 축복을 받을 때부터 더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도 개척교회 시절에는 열심히 하신 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짓고 교회가 부흥되어지면 안일에 빠지기 쉽답니다. 지금 노아가 신앙의 안일에 빠졌습니다. /할/
⑷어떤 신학자는 노아가 술 먹은 이유를 몇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정말 고통스러운 그 홍수로 인하여 오는 그 긴장된 분위기에서 해방되니까 긴장감이 풀리면서 신앙의 나사가 풀려 겁없이 술을 먹게 되었다고 지적한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큰일에는 잘 감수합니다. 그러나 그 큰 일이 지나고 나면 작은 일에는 태만해집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무너뜨리고는 아이 성에서 실패한 것도 일종에 자만심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성을 함락시켰는데 저것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너무 승리감에 도취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홍수로 인하여 다 멸망 받았지만 우리 집안만은 구원받았다는 승리감에 취하다가 그만 마귀의 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노아의 마음속에 어딘지 한쪽 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홍수로 인류가 멸망당하는 것을 그가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이런 멸망의 때가 오지 않을까 불안을 달래느라고 술을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도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 술을 먹는다든지 또한 기쁜 마음에 도취되어서 술을 마신다든지 불안할 때 술을 마시는 것처럼 똑같은 감정을 가진 노아 역시 오늘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분 속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할/
⑸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창6:8-9절의 말씀을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또한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또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며 의롭게 살고 완전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침이 마르게 칭찬 받았던 노아도 술 먹고 개판 치고 실수하여 잘못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나약한 이 모습을 받았기에 하나님은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에 충만함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완전한 것 같지만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의롭게 사는 것 같지만 실수가 항상 따른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떨어지는 그 날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0:12절에서 경고해서 말하기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넘어질 날도 언젠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고 조심하라는 하나님의 염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돈이 좀 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오늘 내가 건강하다고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오늘 내가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 우리의 있던 돈이 없어지고 그토록 왕성했던 건강이 쇠약해질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
▶성경은 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잠20:1절에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술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잠23:20절에서는 '술 먹은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또 '술 먹는 사람은 가난해진다'고도 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지옥을 보고 싶거든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술에 빠진 사람, 술주정뱅이는 재앙과 슬픔, 그리고 근심을 스스로 끌어당깁니다. 술 취하면 만사가 태평합니다. 안일주의에 빠지게 되면 일하기도 싫어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자연히 삶의 궁핍이 찾아오고 가정에 불화가 생깁니다.
롬13:13절에서 바울은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술 취하면 방탕해 집니다. 방탕하다는 말은 자기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세상에 타락한 습성에 따라 몸과 마음을 내어 던지는 것으로서 원래 축제의 행렬을 의미합니다. 축제와 끝은 의례히 술 취함과 남녀와 방종과 탈선으로 이어집니다.
▶탈무드라는 유대인의 지침서에서는 오늘 노아가 술에 취해 떨어진 장면을 이렇게 추리해 놓았습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고 하는데 사단이 찾아와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대꾸했습니다.
사단이 다시 '포도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라고 묻자,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아주 달고 또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소, 그리고 이것을 발효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먹고 즐겁게 된다는 소리를 사단이 듣고 '애라 재나 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좋은 나무를 심는다면 나도 돕겠소' 노아는 돕겠다는 사단의 말에 고맙게 생각하고 같이 나무를 심었습니다. 사단은 즉시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와서 죽이고 그 피를 밭에 뿌려서 걸음을 했답니다.
포도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자 노아가 술을 만들어 마셨는데 '처음에는 양처럼 약해지더니 좀 더 마시니 사자처럼 강해지고 좀 더 마시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좀 더 마시니 원숭이처럼 폴짝 폴짝 뛰면서 다니다가 숨이 차서 옷을 다 벗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술이 들어가면 비밀이 나간다.'고 했습니다. 갈5:21절에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세상 부귀영화 다 준대도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 중에 가장 큰 비극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술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원흉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까닭 없이 다른 사람과 시비를 걸어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분쟁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술로 인하여 이성이 마비되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횡설수설하며, 감정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 난폭해집니다. 이유 없는 살인, 파괴 등의 광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술은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며, 의지박약 자로 만들며, 인격 파산자로 만듭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가는 것입니까? 롬14: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할/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는 작은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전3:16절에서 우리 몸을 가리켜서 '성령을 모신 전'이라고 했고,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롬12: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멘!/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할 몸입니다. 우리의 몸을 언제나 깨끗하게 보존해야 할 책임을 우리 모두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술과 담배를 금하고 있습니다. /할/
③술 취한 아버지를 접한 세 아들의 태도를 보세요!
먼저 그 모습을 둘째 아들인 함이 목격하게 된 겁니다. 물론 그 자체로는 아무 잘못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22절에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자세히 보면서 희롱하고 즐겼습니다. '에구머니!' 하고 그냥 나오든지 아니면, 아니면 이불 같은 것으로 가려드리든지 해야 될 텐데 밖에 나가서 동네방네 떠들었습니다. 두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다행히 두 아들들은 지혜롭게 일을 처리합니다. 23절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 하였더라'
그들은 옷을 어깨에 멘 채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드렸습니다. 얼마나 사려 깊은 행동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노아가 실수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 인해 평소 세 아들들의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겁니다. 함은 거들먹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도 시원치 않고, 아버지는 공경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그런 태도가 이런 기회에 여실히 드러난 겁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도 깊고, 아버지를 공경하는 사람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형과 동생, 셈과 야벳은 그 말을 듣고 겉옷을 가지고 와서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저는 뒷걸음질했다는 그 행위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친 것은, 이미 아는 것은 덮어 주고,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 속에조차 두지 않으려는 귀한 행동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효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효도가 음식으로 되는 것입니까? 부모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는데 효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벧전4: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허물과 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점만 보일 때는 사랑할 때이고, 단점이 보일 때는 미워할 때입니다. /할/
⑴여기서 우리는 함의 실수를 알아봐야 합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공개하고 덮어 주지 않은 죄입니다. 잠17: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고, 또한 마6:14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함의 첫 번째 죄는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와 자식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됐거나 실수했을 때, 또는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감싸주려고 합니다. 용서해 주고 이해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식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모가 사소한 잘못을 해도 공방을 합니다.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남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를 욕하고 비방하고 헐뜯고 남에게 공개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 그런 잘못이 없는가를 반성하고 나도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교회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성령의 공동체'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모인 죄인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는 아름다음과 거룩함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죄인들이 모인 죄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속에는 인간적인 실수와 허물과 잘못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뭐 예수 믿는 자들이 저래, 왜 집사 권사가 저래? 뭐 목사가 저 모양이야?' 여러분 의인도 실수하는데, 우리 연약한 인간들은 얼마나 더 많은 죄와 실수와 모순과 억지 속에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 주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아멘!/ 사실 교회는 거룩한 모습도 있고, 죄스러운 모습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거듭남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할/
㈁함의 실수는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머리를 아버지로 세우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롬13:1-2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아버지의 권위도, 남편의 권위도, 주의 종의 권위도 대통령의 권위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믿/
그 권위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권위를 존중합니다. 권위는 능력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힘이 쌘 트럭이 과속으로 질주하다가 교통순경에게 적발이 되어 딱지를 띄었습니다. 여기서 트럭은 능력이요 순경은 권위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지만 권위는 하나님의 자신을 대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를 너무 나도 잘 지켰습니다. 사울 왕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으로 알고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피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들이 복을 받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버이의 부끄러움을 덮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윗사람은 나의 존재의 연장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부끄럽게 하면 나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남을 부끄럽게 함으로 결코 내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함은 더욱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노아는 성경이 인정할 정도로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의인이었으면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그의 가족만 구원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포도주를 먹고 하체를 가리지 못한 것은 한 번의 실수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전체를 보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 노아가 매일 백수건달처럼 술 먹고 행패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행위는 잠깐 한번 저지른 연약한 인간의 있을 수 있는 실수입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덮어주지 못한 것은 절대적으로 함의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박한 정죄 자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버지 노아가 얼마나 희생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함이 홍수에서 구원받은 것은 자신 때문에 아니었고 성경은 그의 아버지 노아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그에게 두 번 생명을 준 인생 최대의 은인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는 아버지에게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실만 보고 모든 것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함의 후예나 하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런데 내가 원하는 그것 한 두개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있을 수 없는 불충입니다. 그것은 함의 행동이고, 참으로 저주받을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갓난아이를 키울 때 부모들이 얼마나 그들을 위해 애씁니까? 똥오줌 다 받아내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펼칩니다. 그러나 조그만 불평거리로 부모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④세 아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대의 의인 노아의 입에서 당장 함에게 저주가 선포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노아는 너무 심한 사람이었다'라고 아무도 말을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런 모습은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샘과 야벳은 돌아서서 옷으로 아버지를 덮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 파헤치려고 하지말고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르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을 내지만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이 드러났을 때 덮어주는 자세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약점을 보고 뒤로 돌아설 줄 아는 자가 필요합니다. 얼굴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옷을 벗어서 그를 덮어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함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본 대로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다 말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다 드러내고 따지고 살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것을 그대로 판단하셨다면 이곳에 앉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24절은 노아가 술이 깨어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절에서는 자기 자식을 저주합니다. 한마디로 노아는 술을 먹고 개판 치고, 자식에게 저주까지 해 버린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는 지금 선지자 겸 제사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해 버린 자들을 이렇게 저주해버렸습니다.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제일 먼저 자녀들의 생명의 원천(源泉)이라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물론 생명의 본질적인 공급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부모를 통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레20:9, 24: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녀에 대한 축복 권을 아버지에게 맡기셨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별미를 만들기도 했고 아버지의 축복을 자신이 받기 위해 자기가 형 에서인 것처럼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기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아버지께 데리고 가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애굽의 국무총리였습니다. 왕은 왕의 자리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고 전권을 요셉에게 위임해 준 상태에 있는 그런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아버지의 축복을 절대적으로 사모했습니다. 요셉이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기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면 이렇게 저주를 받습니다. 한마디로 보이는 부모님, 보이는 주의 종을 바로 섬기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어떻게 섬길 것입니까? 후에 함족은 가나안의 칠족이 되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만 섬겼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후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을 주면서 그들을 다 멸하라고 했습니다. 그 함족들은 또 다시 아랍계, 아프리카, 흑인계로 흩어져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검둥이들의 설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랍계통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타부시합니다. 왜 그런지 이시지요? 자기 조상들을 저주했다고 지금도 원수같이 지냅니다.
⑴25절은 함의 저주입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가나안은 누구를 말합니까? 함의 아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함을 저주하면서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졌을까요? 저주의 영향력이 후대에까지 미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이것이 함에게는 더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를 둔 우리 모두는 이것을 비교적 쉽게 이해합니다. 내가 당하는 괴로움보다 자녀가 당하는 괴로움이 열 배, 백 배 이상으로 부모에게는 큰 아픔을 가져옵니다. 특히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자녀가 벌을 받는다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저주일 것입니다.
그만큼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 함의 실수가 큰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마음을 아십니까? 부모는 절대로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부모는 절대로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 주시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⑵26-27절에서는 자기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에게 노아가 복을 줍니다.
셈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했습니까?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셈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야벳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27절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야벳족은 번영의 축복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셈족의 영적 축복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역사 가운데 이 예언들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함족은 흑인종으로 한때 이집트, 바벨론 등을 세우고 세도를 부렸으나 결국은 셈족(황인종), 야벳족(백인종)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정복이 그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노예로 팔려 다녔습니다. 최근까지도 아프리카 지역이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삽니다. 물론 백인들이 식민 통치를 하고 노예로 판 것은 엄연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흑인종도 복음 안에서 회복되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뤄진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 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그 대표적인 셈의 후손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큰복입니다. 그로 인해 온 인류를 위한 영적 축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야벳은 어떤 복을 받았는가? 영토를 전 세계로 확장하고 번성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축복도 받았습니다.
유럽과 미국 등의 역사가 그 예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놀랍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의 부모에 대한 태도가 이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나의 미래, 나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내 위에 세워주신 부모님이나 어른들에 대한 태도가 나의 미래, 나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심지어 후손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 경외와 부모 공경은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부모 공경 어른 공경히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중요성을 꼭 깨닫고 실천해서 하나님 앞에 칭찬 받고 아름다운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아멘!/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 노아의 부정적인 감정이 자식의 앞날에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낸 것이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후손은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용서해야 했습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미운 자식을 저주하지 말고 사랑으로 축복을 했더라면 오늘 날 아프리카 흑인들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 한 분이 한 가정 주부에게 물었습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가?' 그러자 여자가 '집에서 썩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어른이 호통을 쳤다는 것입니다. 가정 주부의 임무는 가정을 지키는 것입니다. 집에 붙어 있는 것을 집에서 썩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으니 그 가정은 오죽하겠습니까? 가정에서 언어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감정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뱉어내면 가정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믿/
▶감옥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제 전과 16범이 되었습니다. 결혼도 못 했습니다. 4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바로 살아 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착실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평생 처음 맛보는 행복을 맛보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로 부부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화가 난 두 부부는 감정적인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적인 말들이 오고 가다가 여자가 말했습니다.
'전과 16범이라 할 수 없지!' 이 말을 들은 남자는 견딜 수 없는 감정 폭발을 일어나 갑자기 앞에 있던 리모콘으로 여자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자리에 쓰러져 뇌진탕으로 죽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잘못된 감정이 가정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아픈 곳을 건드리면 폭발하게 합니다. 전철이나 버스를 딸 때에 몸에 종기가 있으면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 하게 감싸게 됩니다. 아픈 곳을 건드리면 정말 아프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아픈 곳을 건드리면 감정이 폭발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가정에서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노아의 부정적인 감정이 자식의 인생을 망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가감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노아의 예언대로 함족은 셈과 야벳의 종이 되었습니다. 셈과 야벳이 함족을 종으로 부려왔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살고 있었던 민족이 가나안 민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점령했습니다. 모두 죽이거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함족은 종살이의 운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고 지배하여 왔습니다. 단 한번도 아프리카가 유럽을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무리 아프리카가 강한 힘을 기른다고 할 지라도 유럽을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경의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할/
⑶여기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실현 중에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벳의 하나님같이 보였습니다. 영국, 독일, 덴마크, 스페인, 미국이 선교를 지배하고 온 세계를 선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쓰여진 칼빈 주석은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지금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될 일일지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구라파의 교회들은 저녁 3시쯤 되어 모두 병들고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 그렇게 웅장하게 지었던 교회들은 모두 관광지가 되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텅 비고 있습니다. 휴가철이면 목사까지 휴가 가고 아예 주일 예배도 드리지 않는 교회들이 수두룩합니다. 독일에서는 교회 밑층에 나이트 클럽을 세주어 주일 밤에도 위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밑에서는 술 먹고 춤추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고 합니다.
지금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부흥되고 있습니다.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4개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다. /할/ 지금 미국의 선교사는 줄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이 세계 선교를 선도할게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온 세계가 복음 화되면 될수록 셈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야벳은 창대하지만 셈족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예언하고 계십니다. 우리 민족이 셈족입니다. 우리 모두 셈족의 자부심을 갖고 끝까지 충성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013년 9월 15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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