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자세! (약 4:6-10)
▶뻐꾸기 한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가지에 앉아있던 비둘기가 물었습니다. '왜 그리 슬피 우십니까 배가 고프신 가요?' 뻐꾸기는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습니다.
'내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답니다. 자녀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노년이 너무 씁쓸하군요.'
비둘기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제 아기를 낳으셨나요. 둥지에 알을 품고 오랫동안 앉아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요'
뻐꾸기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컴컴한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알들을 모두 다른 새 집에 넣어놓고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러자 비둘기가 '참 욕심이 많군요. 심은 것도 없이 무엇을 바라나요.' 그렇습니다. 심지도 않고 받으려고 한다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욕심쟁이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떠한 위험 가운데서도 주인을 잘 지켜 주는 명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 명마를 잘 보살피고 맛있는 먹이도 많이 구해 주었습니다.
명마는 전쟁 때 빛을 발하여 수많은 위험에서 그 주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주인은 이 명마가 귀찮아 졌습니다. 말이 먹는 먹이도 아까워졌습니다. 자연스럽게 말을 혹사하고 먹이도 잘 주지 않았습니다. 말을 병들었고 쇠약해 졌습니다.
또다시 전쟁이 났고 그 군인도 병들고 쇠약한 명마를 타고 전쟁이 나섰습니다. 그러나 명마는 예전과 달리 힘차게 달리지 못했고 결국 그 군인은 적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서의 주제가 바로 행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제가 어려서 살았던 동네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이 연못 주변에 모여 재미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동네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무슨 일인가 하여 가까이 가보았더니, 한 어린 남자아이가 마치 잠을 자듯이 반듯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으나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아무리 몸이 멀쩡해도 혼이 떠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약2: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믿음이 '산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2:17절과 20절을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증거가 있게 마련이고, 그 믿음의 증거가 그 사람의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말로는 믿음이 있다 해도 믿음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할/
특별히 약2: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할 뿐만 아니라 행하는 만큼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강조했습니다(약1:22).
그렇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마치 배의 양쪽에 있는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한쪽 노만 저으면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배의 양쪽 노를 함께 저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도 같이 가야 합니다. 믿음 없는 행위나 행함 없는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믿음만큼 행하고 행하는 만큼 믿음이 있어야 온전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할/
①큰 은혜를 사모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입니다(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써도 안되고, 평생 수고해도 안되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한번 임하기만 하면 되고, 우리가 살다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처해도, 심지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한번만 임하기만 하면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어려움도 해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믿음생활하면서, 기도생활하면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목사도 못합니다. 장로도 권사도 못합니다. 은혜가 있어야 잘 감당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직분 감당이 힘듭니다.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성가대도 구역장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아멘!/
은혜는 공기와 같습니다. 은혜는 빵과도 같습니다. 은혜는 물과도 같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좀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고, 모든 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은혜, 은혜'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믿은 것이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속에 모든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카리스'라는 말로 '은총, 아름다움, 행복, 최상의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은혜 '카리스'라는 말은 '자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구원도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모든 행복도, 축복도, 보호도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살롬! 하나님의 평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안녕하고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고후9: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모든 은혜'란 여러 가지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여러 가지로 주십니다. 또 그 은혜도 '넘치게 하시나니' 왜 우리에게 넘치게 하십니까? 왜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고 주십니다. 쉽게 표현하면 은혜가 있어야 모든 것이 넉넉하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가정에 은혜가 있으면 가정의 모든 것이 넉넉하고, 사업에 은혜가 있으면 사업의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넉넉한 것 가지고 모든 선한 일에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그래서 잘 돌아갑니다. 다 있어도 은혜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피곤이 옵니다. 시험이 듭니다. 어려움이 옵니다. 힘들게 만듭니다. 자동차를 손으로 직접 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서 받습니까? 히4:16절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 앞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보좌입니다. 하나는 영광의 보좌이고, 둘째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영광의 보좌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곳,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곳'이란 뜻이고,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내리는 곳'이란 뜻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아멘!/
▶어느 주일아침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설교가 '어스킨'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스칼렛'이라는 여자가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그 다음 주일도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은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어스킨 목사를 만나 스칼렛이 물었습니다. '지난 주일엔 제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은 왜 은혜를 받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난 주일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내 설교를 들으러 왔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은혜와 모든 축복의 출처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로 은혜를 받으려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할/
⑴큰 은혜를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교만을 벗어버려야 은혜를 받습니다(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꺾어버립니다. 이 교만은 언제든지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우리를 멀리하게 만드는 무서운 죄입니다.
6절에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만히 놔두는 것이 아니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리친다'는 말은 적을 대적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적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대적하고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교만한 아들이 있었고, 겸손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교만한 아들은 압살롬이고, 겸손한 아들은 솔로몬입니다.
압살롬은 어찌나 교만했던지 자기가 아버지 다윗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들 솔로몬은 겸손하여 왕이 될 때에 '나는 부족하고, 어린아이와 같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압살롬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솔로몬을 크게 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은 총명하고, 통치력도, 지혜도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자기 지위가 높아지면서 교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해진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삼상15:35). 그리고 삼상16:1절에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도 사울을 버려 왕의 자리에서 떨어지게 했습니다. /할/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남을 멸시하고 얕잡아 보는 것이 교만입니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창조물을 무시하는 것은 무지해도 한참 무지한 태도입니다.
㈂또 신앙 안에 교만도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이 최고인줄 착각하는 사람, 산기도, 철야기도, 몇 번 갔다 와서 도사가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잠16: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⑵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겸손한 자에게 주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심령을 향해서 계속 흐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그분 앞에 자기 생애를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일 강한 자입니까? 어떤 사람이 능력자입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모세가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온유하고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통로입니다. 겸손한 자는 희생할 줄 알고 헌신할 줄 압니다. /할/
⑶우리는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왕상 13장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진 후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남북이 나뉘어진 후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그는 하는 일마다 악한 일을 생각하고 추진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겨온 나라에서 금송아지를 의도적으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곳곳에 산당을 만들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는 '앞으로 예루살렘성전에 가서 제사하지 말고 이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가만 놔 두셨겠습니까?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여로보암 왕이 벧엘에서 금송아지에게 분향하고 있었을 때 마침 하나님의 사람이 도착하여 보니 정말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금송아지에 분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 왕이 듣기에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내용 중에 한마디만 말하면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이 말을 듣고 있던 여로보암 왕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키며 소리칩니다. '저놈을 잡으라' 그런데 바로 그 즉시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로보암 왕의 손이 다시 거두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것처럼 그 금송아지 제단이 갈라지더니 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로보암 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이제 모든 것은 끝이구나.' 그래서 그는 비록 악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건데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여러분, 이때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가만 놔두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구했으며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
왜 이 말씀을 드리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은혜를 구하면 주시고, 혹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때론 여로보암 처럼 악한 길에 들어서는 큰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빨리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②하나님께 순복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입니다(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역사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심판을 받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죄를 범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롬5:19절에 '한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순복이란 순종과 복종의 복합어입니다. 순종은 조건이 따를 수 있습니다만 복종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군대용어입니다. 순종이란 듣고, 깨닫고, 따르는 것을 말하고, 복종이란 이해되지 않아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신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순복입니다. /할/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⑴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명령문입니다. /할/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복의 근원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⑵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엡6: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⑶주의 종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히13: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⑷우리 서로 피차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엡5: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은 자신의 말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복종하는 잡니다. 그러므로 '순종, 복종, 순복'은 영성의 마크입니다. /아멘!/
③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은 마귀를 대적하는 삶입니다(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사실상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현장에 실패가 오고 좌절이 오는 것은 마귀와 대적하여 이기지 못하고 폐하기 때문이요, 가까이 해야 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늘 멀리 떠나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귀와 대적하라는 말은 매우 긴급한 명령이요, 한시라도 빨리 행동으로 옮기라는 촉구입니다.
▶마귀라는 헬라어의 뜻은 '디아볼로스'로써 '모략 자, 고소 자, 중상자'라는 뜻으로 사단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하면 모략 자, 고발자, 중상자로 싸움을 걸어오며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공작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이며, 그리하면 피하리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허점을 노리고 있다가 그 기회를 틈타 재빨리 들어가 낙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이제 희망이 없다. 파멸이다'라는 불안함을 주어 주저앉게 하고, 남을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그 사람 때문에 네가 잘못되었어'라고 충동질을 주어 신앙생활을 흩트려 놓으며,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래 불평할 만도 하지, 더 불평해, 어서 더해'라고 부추겨 세우며,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괜찮아, 순종해봐야 소용없어, 너만 손해야'라고 충동질을 합니다.
그리고 섭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봐, 네가 그렇게 애써도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 하나님도, 목사도 너를 몰라라 해'라고 속삭이며 하나님을 멀리하게 부추기고 그럴싸하게 꾀이며, 거짓도 사실인양 믿게 하여 아주 망가뜨리고,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탐심도, 슬픔도, 의심도, 증오도 모두 마찬가지로 접근해서 속삭인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마귀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사람의 약점도 잘 알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의 권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하면 무서워 도망가기 때문입니다. /믿/할/
눅10:17절에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막16: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또 약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할/
▶한때 '드랴큐라'라는 영화가 시리즈로 나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드랴큐라는 밤이면 나타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는데 오직 십자가만을 두려워하다가 십자가에 의해 죽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십자가의 위대한 승리는 찬양하지 아니하고 피를 빨아먹는 드랴큐라만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펄존목사님은 마귀의 존재를 설명하면서 '남을 해롭게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혀에 마귀가 있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의 귀에도 마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입도, 그 말을 듣고 맞장구 치는 귀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의 혀는 마귀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성령으로 자갈을 물려야 하며, 귀는 마귀가 하는 말을 분별하여 차단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우리의 손과 발은 마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며 남을 못되게 하는 악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쓰여져야만 합니다. /믿/아멘!/
여러분, 마귀는 도깨비처럼 뿔을 달고 검은 외투를 입고 나타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이 빨리 분별할 수 없는 불합리한 방법과 수단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교묘히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마귀는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돌을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접근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말씀의 권세로 물리쳤습니다. /할/
▶'더글라스 파슨즈'가 발표한 마귀의 팔 복을 소개합니다.
첫째, 너무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가장 믿을만한 일꾼이 될 것임이요,
둘째, 목사의 흠이나 과오를 찾아 트집을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셋째, 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사정사정해야만 교회에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의 말썽꾸러기가 될 것임이요,
넷째,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다섯째, 걸핏하면 뒤에서 삐죽거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교회를 곧 그만 둘 것임이라
여섯째, 하나님의 일이나 헌금에 인색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일을 가장 잘 돕는 자들임이요,
일곱째,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요,
여덟째, 성경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꾀임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라
여러분, 마귀의 팔 복에 속아넘어가 마귀의 밥이 되어 죽는 인생이 되지 말고, 우리 주님이 산상에서 말씀해 주신 팔 복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원칙은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우리의 인생 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은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왜? 거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도 그렇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가깝게 있을 때 행복합니다.
사람도, 물건도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어야 할 것들이 멀리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은 허전하고 공허합니다.
오늘 날 현대인의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까이 있어야 할 것을 가까이 두지 못하고, 또 멀리 있어야 할 것을 가까이 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그것이 짐이 되어 불행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떨어져 있어야 할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 보니까 원수니 악수니 하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멀리 두어야 할 죄악을 가까이 하다 보니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망가집니까? 멀리할 것은 멀리하는 결단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가까이 교재 하느냐에 따라 인격과 삶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검은 것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 충신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백로가 물들까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에게 배우느냐? 누구를 따르느냐? 누구와 가깝게 지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도 신앙도 삶도 달라지게 됩니다. /믿/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자가 능력을 받습니다. 힘있는 자가 함께 할 때, 힘이 생기고, 빛이 있는 자가 가까이 계실 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과 멀어질 때는 어두움이 오고, 근심이 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멀리할 때, 하나님은 심판하셨습니다.
노아의 물의 심판, 소돔의 불의 심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당한 심판, 유다가 바벨론에게 당한 모든 심판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멀어질 때 모든 시험이 오고 죄악이 옵니다.
여러 찬송가의 가사들도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은혜가 되고, 하나님과 멀어질 때, 죄에 빠지고 멸망에 빠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멀리 함으로 그 가정에 어려움이 왔고, 시험이 왔습니다. 아들 두 형제가 전쟁터에서 한날, 한 시에 죽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의 며느리는 아이를 해산하다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이 '이가봇'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떠나갈 때, 그것은 슬픔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가치가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73: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고, 잠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수지맞는 쪽이 우리입니다. /할/
▶우리가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시66: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예배 중심의 삶입니다. 성전 중심, 신앙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왜 찾으십니까? 가까이 하시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축복입니다.
신앙과 예배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예배를 빠진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무시하다가 버림받은 것입니다. 신앙과 예배는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신령한 언어이며, 대화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사람이지만,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담을 쌓고 벙어리로 사는 사람입니다. /믿/
▶하나님께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할/
⑤성결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입니다(8).
'손을 깨끗이 하라' 이 말은 위생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성결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손은 행위를 말합니다. 행위가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행위가 깨끗하기 전에 필수는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여기 '두 마음을 품는 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다가도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느 남편이 놀음에 빠졌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하고는 살아도 놀음하는 남편하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놀음 습관이 사라지도록 금식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남편도 놀음을 안 결심하여도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장한 결단을 하고 왼 손 가락 다섯 개를 다 잘라 버렸습니다. 다시는 놀음을 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다짐이었습니다. 이제는 놀음과 완전히 이별한 줄로 알았습니다. 본인도 그렇게 알았고 아내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없어졌습니다. 아내는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자 여기 저기 찾아보았습니다. 혹시나 하여 놀음하던 자리로 가 보았습니다. 남편이 그 자리에 둘러앉아 놀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왼 손에 붕대를 감은 채 화투를 끼고 '장 땡 이야!'하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누구에게나 죄의 소원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소원을 다스릴 줄 알아야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결단이고 결심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전제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죄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여기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한 말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마음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은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은 요동하는 물결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양다리 작전이 아닙니다. 세상살이도 양다리작전은 피곤합니다. 꼬리가 길면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결된 삶의 원동력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큰 은혜를 받으려면 몸도, 행실도, 그 영혼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은 예배자의 삶의 기본자세입니다(출30:19-21). 손을 씻는다는 것은 죄를 깨끗이 씻고 마음을 청결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할/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사에서는 1,100개의 지갑을 만들고 아주 독특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손이 어떤가? 깨끗한가? 정직한가?'를 보기 위해 지갑 속에는 미화 50불 상당의 돈을 넣고 지갑 주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도 넣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대도시 길거리에 떨어뜨렸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큰 실험을 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지갑이 얼마나 주인에게로 되돌아오는가를 실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큰 도시 공중전화박스, 슈퍼마켓, 주차장, 레스토랑, 사무실, 복도, 교회 등이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지갑의 56%는 돌아오고, 44%는 안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50%가 넘어서 다행입니다.
나라별로 잃어버린 지갑이 되돌아온 순위를 보면, '노르웨이 100%, 싱가포르 90%, 한국 일본 호주가 같이 70%, 미국 67%, 영국 65%, 프랑스 60%, 네덜란드 50%, 독일 45%, 러시아 43%, 필리핀 40%, 이탈리아 35%, 중국 30%, 멕시코 21%' 순이었다고 합니다. /할/
⑥바른 회개자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9).
이 말씀도 난해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이제까지는 세상 즐거움에 살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았던 인생들아 그것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바꿉니까?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여기 '우는 마음'은 '깨진 마음, 상처 진 마음'입니다.
세상 즐거움 때문에 히히덕거리고 자신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분주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신을 향하여 '이 인생아! 세속에 빠져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세상의 썩어진 것들이 진짜 기쁨이 아니며 그것은 마치 소금물처럼 먹어도, 먹어도 갈증이 나는 것인데 왜 어리석게 그러냐?'라는 음성입니다. /할/
한 마디로 세속에 취해 있는 죄인 된 모습에 대해 슬퍼해야 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고 우는 심령을 우리에게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이 주간에도 여러분의 즐거움을 위하여 무슨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까? 그 즐거움은 지나가는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언젠가 더 큰 아픔으로 바뀔 즐거움입니다.
참다운 즐거움이 아닌 것을 위하여 살았던 내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원수 되었던 삶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고 애통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⑦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은 자신이 낮추는 삶입니다(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한 마디로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냐? 교만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만이 원죄의 뿌리다.'고 했습니다. 교만이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또한 교만은 무식한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한지,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몰라서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추라. 낮추어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멘!/
▶겸손이 뭡니까? 세 가지가 겸손입니다
⑴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내가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구나' 이 사실 하나만 똑바로 알아도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⑵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나를 높이는 것은 쉽지만 나를 낮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남을 낮추는 것은 쉽지만 높여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윤리입니다.
여기 낮추는 것이란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는 것이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잠29: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우리의 삶이 형통합니다. /아멘!/
⑶겸손은 자기를 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 나타내고 주님의 영광만 나타내는 게 겸손입니다. /아멘!/
▶불란서 파리 '루부르' 박물관에 있는 다빈치 작품 '모나리자'는 방탄유리로 부스를 만들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품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단순한 그림이랍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검은 너울과 그녀가 앉아 있는 나무의자 외에는 다른 장식이 없다고 합니다.
모나리자의 얼굴은 조형미인도 아니고 손가락엔 흔한 보석반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그 아름다움을 미술가들은 '순수미인'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만일 모나리자가 화려한 장신구에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했다면 왕비는 될 수 있지만 순수미인의 상징인 모나리자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들의 가식적인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순수한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늘 바라고 갈망하는 하나님의 은혜 역시 순수하고 평범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동기도 순수합니다. 조건을 내걸고 결과를 따지기 위해 은혜를 주신 일이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십시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높여주시는 큰 은혜 속에 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3년 9월 29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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