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3. 17:07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6)

 

  우리는 덴마크라는 나라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국토라야 남한의 반도 안 되는 땅이요 인구라야 4-5백 만 명이니 서울시 인구의 약 삼분의 일쯤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1600년대에는 그 유명한 바이킹족으로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바이킹족은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전쟁 배상으로 가장 비옥한 땅인 '딕'이라는 지역과 '홀스타인'이라는 지역을 하나는 독일에서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 내주고 말았습니다. 남은 땅은 모래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돌아온 병사들은 술 먹고 도박하고... 그냥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엔 지하자원도 없습니다. 자연 기후도 좋지 않습니다. 토지도 사막뿐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중 공병상사 '달라스'라고 하는 청년이 한 손에 성경 들고 한 손에 괭이 들고 군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덴마크 국민 여러분, 칼로 잃어버린 우리의 조국 괭이로 찾읍시다. 해적 질로 잃어버린 도덕, 성경을 통해 찾읍시다.'라고 외쳤습니다.
  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룬두비'목사입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덴마크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거들떠보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어려운 그 땅을 살리려고 나무심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나무 심어 안되면 저 나무도 심어보고, 저 나무 심어 안되면 또 다른 나무 심어보고, 그러다가 어느 산골에 있는 이름 없는 나무를 심어 조림하고, 조림하다보니 그 땅이 옥토로 변해, 옥토가 되니 그 땅이 초원이 되어지고, 초원 따라 낙농을 해서 소를 먹여 세계적으로 우유와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소득 높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룬두비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습니다. 술과 노름으로 인생을 허비하던 청년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한 손에 성경 들고, 한 손에 괭이 들고' 일을 하기 시작해서 그런 역사를 이루어 냈답니다. /할/
  ▶브라질의 오지에서 의료활동을 펼친 '멜란드' 선교사 부부는 네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풀리오 인디언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인디언들은 그들을 '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에는 자신들을 괴롭힌 백인들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부부는 비난을 감수하며 병들어 죽어 가는 인디언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들은 '존경하는 백인'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 후 멜란드 선교사 부부는 인디언과 동일한 옷을 입었습니다. 동일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10년 만에 인디언들의 언어를 배워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에는 인디언들이 그들을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선교사 부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 부상당한 인디언 소녀의 발을 씻어주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추장이 선교사 부부에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인디언들은 선교사 부부를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사랑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할/
  ▶얼마 전에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끄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회복'이란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스토리는 현재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8년 봄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40키로 떨어진 아리엘이라는 작은 마을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가족 '아미'네 집에 뜻밖의 선물바구니가 배달되었습니다. 
  사탕과 초콜릿이 잔뜩 들어있던 바구니를 여는 순간, 폭탄이 터졌고 아미는 끔찍한 부상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테러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로의 위협이 아닌, 같은 민족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를 열심히 전하는 유대인 전도자 가정을 향한 폭탄테러로부터 방화, 폭력, 살인, 가택연금은 물론 주일 예배를 방해하는 훼방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강한 저항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 유대인들을 '메시아닉쥬(Messianic Jew)' 즉 '믿는 자,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기를 소원하며 매우 위험한 현장에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인류의 마지막은 바로 그들 속에서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닉쥬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주님을 믿고 전하는 모든 유대인들이 해당됩니다. 베드로, 바울, 사도들, 초대교회성도들, 또 본문에 등장하는 디모데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많은 핍박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닌 동족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신실히 믿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 때문에 모든 삶의 방향과 길을 바꾸고 믿음의 길로만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후계자인 디모데를 향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주님을 믿는 자를 이렇게 부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이것보다 더 귀한 호칭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렇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칭호는 참으로 위대한 칭호입니다.
  일찍이 성경은 모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신33:1절과 시90편의 표제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그리고 성경은 사무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삼상9:6). 물론 엘리야와 엘리사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성경은 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왕상17:18/왕하4:7). /할/

 

  ①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생애에 보낸 편지이기에 마치 유언과도 같은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전도자의 길을 달려갈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바울은 그의 신분을 아주 귀하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신분상승입니까?
  지금 어떤 사람들이 힘쓰고 있습니까? 박근혜 사람들이 힘쓰는 시대입니다. 올박 서청원씨가 정계에 돌아왔다고 한나라당을 흥분상태입니다. 박근혜 사람만 되어도 이 정도인데, 하나님의 사람은 여러분, 상상초월입니다. /믿/ 
  ▶여러분, 브랜드 중의 브랜드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무엇이 그것을 구입하는 기준이 될까요?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가격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보는 것이 품질입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제품을 살 때는 가격과 품질을 뛰어 넘어서 상품의 브랜드를 보고 구입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 브랜드의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 전문가인 '케빈 로버츠'라는 사람은 '브랜드 중의 브랜드가 있는데, 이를 러브마크(love mark)'라고 부릅니다. 그는 소비자의 충성도가 크면 클수록 브랜드에서 러브마크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러브마크로 넘어간 소비자들은 그들의 꿈과 이상이 그 제품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제품을 사서 사용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료가 그렇습니다. 어떤 음료도 자기가 좋아하는 브랜드 외에는 안 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기계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브랜드를 넘어서는 러브마크는 우리 삶 속에 널려있습니다. 천 원을 아끼기 위해 1시간 동안 시장을 걸어가던 아주머니도 자신이 갖고 싶었던 명품을 사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브랜드의 품격이 곧 나 자신의 품격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제품과 좋은 서비스를 추구합니다. 소비자는 늘 제품에 대해 기대합니다. 기업은 어떻게든 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브랜드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는 것을 '러브마크'라고 합니다. 제품의 기능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존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품의 디자인과 감촉 그리고 갖고 싶은 사랑의 감성이 더해집니다. 이런 제품들 속에는 신비감뿐만 아니라 친밀감, 감각적 뛰어남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여기에 가치관과 문화까지 내포하는 제품이 바로 러브마크를 지닌 제품들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브랜드를 갖고 있습니까? 기업들은 제품의 가치를 높이려고 애를 씁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대학도 그렇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 최고의 브랜드를 넘어서 러브마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국가도 해당합니다. 대한민국도 다른 나라로부터 존경받는 나라, 오고 싶은 나라가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대통령이 유럽을 지금 순방하고 계시는데 나라의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서 외교역량을 펼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유럽을 순방중인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할/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어떤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제품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인격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새롭게 변화되고 성숙되는 피조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브랜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언어로 볼 때 일종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참 행복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종의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브랜드를 뛰어넘는 러브마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디모데에게는 몇 가지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신앙으로 지도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몇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쳐주기 원했습니다. 기를 살려주기를 원했습니다. /할/


  ㉠그렇다면 디모데의 약점은 무엇이었을까요?
  ⑴나이가 젊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딤전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무슨 말인가? 바울은 '네가 젊은 청년이기에 사람들이 너를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영적 지도자다. 나이 때문에 무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격려입니다.
  ⑵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그는 젊은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병약하게 보였습니다. 아마 골골거리면서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딤전5:23절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병약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디모데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정말 바울의 뒤를 따라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그에게 어려움과 우울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⑶그의 온유한 성품이 오히려 약점이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성품이 온유하고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디모데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러한 그의 성품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할/
  ⑷사회적인 상황과 교회의 내적인 문제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 안의 거칠고 살벌했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3-10절까지를 보면 세 가지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변론과 분쟁을 야기 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돈을 좋아하고 예수 믿는 것조차도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상이 디모데에게 있어 약점이었고,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고, 우울증까지 일으켰습니다. 그런 상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디모데를 향해 사도 바울은 그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자신감을 넘치게 하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약점이 디모데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상황을 다를지 모르나 우리들에게도 이런 약점들이 있어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두 가지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100%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육체에 약점이 있던지, 성품에 약점이 있던지, 환경에 약점이 있던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라는 러브마크가 내 삶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할/
  지금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임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야! 너에게는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자존 감이 필요하다. 남을 생각하지 말라. 남이 어떤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가? 남이 나를 보고 어떻게 비난하는가? 내가 있는 환경은 어떠한가? 그런 것들은 모두 뒤로하고 오직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네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인지 스스로 파악하라!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네가 왜 위축되느냐? 왜 열등감 속에 허덕이느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다시 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라! 네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복 받은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라!'고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브랜드와 러브마크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명품이 아니라 진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여기에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⑴'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축복입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멘!/
  ⑵'너는 가장 존귀한 사람'이라는 축복입니다. 시16: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가치가 대단히 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의 생명과 맞바꾼 생명입니다. 용도가 대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씀임 받는 도구입니다. /할/
  송옥영씨는 그의 글 '세뇌된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동물과 다른 다섯 가지 이유를 지적했습니다. ▶죽음이 다릅니다. 동물은 얼마든지 죽여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면 큰 죄입니다. 살인은 가장 큰 죄입니다. ▶가치가 다릅니다. 동물은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고 팔 수 없습니다. 인신 매매 범은 큰 죄인입니다. ▶실험이 다릅니다. 동물을 실험할 수 있어도, 사람은 실험할 수 없습니다.
  ▶약육강식이 다릅니다. 동물 세계에서는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의 먹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윤리와 도덕이 다릅니다. 동물세계에는 윤리나 도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윤리와 도덕을 벗어나면 이미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할/ 그렇습니다. 사람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더욱 더 귀한 존재입니다. /할/
  ⑶성도가 왜 존귀합니까? '너는 하나님이 보호할 사람아' 이런 축복입니다. 시32:7절에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⑷'너는 이 다음에 하나님이 데려 갈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할/
  '나는 하나님이 데려갈 사람입니다' /할/ '어디로 갈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지옥으로 갈 것인가? 천국으로 갈 것인가?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기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멘!/

 

  ②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여기 '피하라'는 말은 '디오케'라는 원어입니다. 그 뜻은 '내몰다, 괴롭히다, 박해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든 것들을 과감히 내몰고 박해하듯 괴롭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할/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것들'은 앞 절에서 언급한 것을 말합니다. 3절 이하에서 바울은 당시 몇 가지 피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선 다른 교훈을 말하는 이단자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투기와 분쟁과 비방을 악한 생각을 하고,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0절에서도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필요 없는 변론을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단에 관한 경고를 많이 했습니다.
  이단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단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일을 아시지요? 둘씩 짝을 지어 가지고 다니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 교회 문패가 붙어 있는 집만 찾아다니면서 접근합니다. 그리고 변론을 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성경 구절만 골라서 따로 외우고 다니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이론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토론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도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성경 공부를 한다면 이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말씀 앞에 내 자신의 삶을 비춰 보고 고민하는 그런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 사람됨이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가슴이 깨어지는 고백과 눈물의 통회가 있는 그런 성경 공부가 바른 말씀 공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다른 데로 향하게 하는 그런 성경 공부, 하나님이 기대 하시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변론을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유혹의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마귀가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는 그 덫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이 자기에게 죄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떤 상황이 나를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피해야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내 삶이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2:22절에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할/


  ㉡쫓으라고 하십니다. 즉 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11). 
  먼저 피할 것을 말한 뒤에 이젠 취할 것, 따를 것을 말합니다. 따를 것이 무엇입니까?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너무도 친숙하고, 많이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묶는다면 그것은 바로 '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르고 참된 삶의 행동, 성령이 기뻐하시는 소중한 열매, 주님의 뒤를 따르며 갖추어야 할 제자도의 모습입니다. 믿는 자는 날마다 악을 피하고, 선을 취하고, 그것을 따르라고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 선포하고 계십니다. /할/
  신앙인의 삶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피할 것만 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피한 뒤에는 취해야 하고, 행동하고 따라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악을 버리고 이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바르고 참된 삶, 인생에 소중한 가치가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은 바로 여기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시1편에서 이것을 잘 알려줍니다. 시1:1-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할/
  1절은 '악을 멀리하고 죄를 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말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도 말아야 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도 앉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자의 삶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2절에서 이제 적극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경건을 쌓아가야 합니다. 악을 피하고 이젠 선을 추구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멘!/
  ▶이 여섯 가지 '의와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를 짝을 지어 설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⑴의와 경건입니다. 의는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받는 가장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강조된 덕목이 경건인데, 이 경건은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삶의 자세,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닮아 가는 인격적인 특성입니다. /할/
  ⑵믿음과 사랑입니다. 의가 없이 경건히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주님을 향한 관계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덕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믿음과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⑶인내와 온유입니다. 이 두 덕목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일어나는 사건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인내하고 있습니까? 인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유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 온유함을 나타낸다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얌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칠고 힘이 센 야생마가 잘 길들여졌을 때 '온유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굉장한 힘을 자제하고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내와 온유는 환경에 대하여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의와 경건을, 자신과 이웃에게는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는 인내와 온유를 좇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12).
  ▶루마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탄압할 때의 일입니다. '플로레스쿠' 목사를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요구를 듣지 않자 플로레스쿠 목사의 아들을 잡아 왔습니다. 아들은 14살이었는데 믿음이 강한 소년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매질을 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저들의 요구를 들어야겠다. 네가 고통 당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아버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배교자 아버지를 갖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제 걱정은 마세요. 끝까지 견디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예수님을 위해 기쁨으로 죽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들을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모질게 때렸습니다. 피가 감방을 적셨습니다. 14세의 '알렉산더'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소년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웠습니다. /할/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⑴선한 싸움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삶은 한마디로 싸움의 삶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부터 그는 평생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싸우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무엇과 싸웠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었습니다. 엡6장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영적 싸움이고, 믿음의 싸움이고,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그는 승리하고 영광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할/
  ⑵싸움의 대상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매일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싸우고, 싸움을 보며 살지만, 실제로 그들은 우리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의 대상은 사탄이요, 악의 영들이요, 세상이요, 죄입니다. 
  ⑶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에게 지면 다 지지만, 자기에게 이기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바로 '조절'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라는 것이 바로 조절을 의미합니다. 조절하지 못하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여지없이 패하고 맙니다. 자기를 잘 조절(관리)하는 자가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모든 스포츠의 기본은 조절에 있습니다. 체중조절, 특히 호흡조절이 중요합니다. 운동의 꽃이라고 하는 마라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장거리나 단거리나 마라톤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호흡조절입니다. 무조건 힘만 믿고 달리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체력을 강하게 훈련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호흡조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완주하지 못하고, 좋은 기록을 낼 수 없습니다. 마라톤만이 아닙니다. 수영, 양궁, 역도, 사격, 골프 등 모두 호흡조절이 필수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자기를 조절할 때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자기조절을 실패할 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삼손이 그랬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그들이 실패한 현장에는 조절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조절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나를 조절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⑷우리 모두 선한 싸움을 싸워서 이기는 자들이 됩시다. 구약에 사울 왕은 골리앗에게 패배를 했고 골리앗은 다윗에게 패배를 했습니다. 이 관계를 보면 사울 왕이 골리앗에게 패한 것은 싸우지도 않고 패한 것입니다. 아예 싸울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벌벌 떨다가 패했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에게 패한 것은 같이 싸워서 골리앗이 패했습니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요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수입니다. 두 사람 다 패했지만 사울 왕보다는 골리앗의 패배가 명예롭습니다. 사울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패배이지만 골리앗은 싸우다 패했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싸워야 이깁니다. 어떤 분이 세상을 이렇게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더럽다, 이 세상은 악하다, 이 세상은 어둡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동의합니다. 더럽습니다. 깨끗해지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악합니다. 선하게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어둡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방향을 잃습니다. 함정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싸워야 됩니다. /아멘!/
  ⑸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우리는 선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 악으로 싸우면 안됩니다.
  롬12: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싸워야 합니다. 규칙을 지켜야 하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만 선으로 이겨야 보복이 없습니다.
  ㈁실력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려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를 이기게 하는 도구는 실력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해서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전공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실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실력을 쌓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 실력을 쌓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세는 낮추고 실력은 높여야 합니다. /아멘!/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실제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도구는 물매입니다. 다윗의 물매 실력은 곰과 사자를 때려잡는 실력입니다. 물매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라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컴퓨터에 대가라 할 만큼 실력 있는 전문인이 되었는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 이력서를 여러 번 냈는데도 다 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심한 정신적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패배를 당하면서 하나 깨달은 것은 진정한 실력은 소유된 실력이 아니라 '사용되는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형의 인간과 사용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무엇이 실력입니까? 쓰여지는 것이 실력입니다. 사용되어야 실력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 '나는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실력이 아닙니다.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사용권의 개념에서 실력행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벌어서 가진 자로서의 실력자가 아니고 돈을 멋지게 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는 지금까지 860억 불의 기부금을 냈습니다. 계산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돈을 가졌지만 어마어마한 기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부를 한 그의 동기가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을 벌어서 쓸 줄 아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상대가 아니라 이 사람이 돈을 쓰는데 아무도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력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쓰여져야 실력입니다. 활용이 되어야 실력입니다. 실력이 없다고 움츠리지 마십시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님을 위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실력자입니다. /아멘!/
  그리고 실력은 키워져야 되고 가꾸어야 됩니다. 미숙하면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 말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장 철없는 인생의 미숙한 격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몇 번 이겼다고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하는 그런 미숙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폴레옹을 쳐다볼 때 그 사람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폴레옹은 그런 소리를 했지만 그의 인생은 패배자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미숙한 인생을 쓰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과 사도 바울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지식과 인격과 믿음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충분할 만큼 영그러져 있고 완벽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성숙함이 있었습니다. /할/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됩니다.
  시3:1-6절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다윗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사울에게 한번, 아들 압살놈에게 한번 그렇게 당했습니다. 시3편은 아들에게 반역을 당해서 왕궁을 쫓겨나는 위기를 당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기도입니다. 그 기도 속에 구구절절이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암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한참 고비에 처해 있을 때 의욕을 잃었습니다. '이제 안 되는구나' 낙심하고 있을 때 그 부인이 어느 날 남편을 격려하기 위해서 지혜를 짜냈습니다. 상복을 입고 남편 앞에 나타났습니다. 마틴 루터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봐요, 웬 상복이오'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어느 아버지가 죽었단 말이오' '하나님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니 당신의 얼굴을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왜 당신의 하나님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그렇게 힘을 잃고 있는 거예요?'하고 용기를 북돋아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고 시작합시다.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싸우면 아무리 실력이 있고 선으로 싸워도 마무리가 안 됩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합니다. /아멘!/


  ㉣'영생을 취하라'(12)
  여기서 '영생을 취하라'는 단어는 아주 강한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고하게 붙잡고 누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영생을 즐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생을 값없이 받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 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내 소망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증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고 그것을 감격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할/
  여러분은 단순히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생을 누리며 즐기고 있습니까?
  19절을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말로는 '내 소망은 저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영생을 누리고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 우리 모두 구원에 감격을 누리며 즐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이 명령을 지키라'고 했습니다(14).
  왜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주님 오실 때까지입니다. 여기 '나타난다'는 말은 새벽에 동녘이 밝아 오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여명이 밝아 올 때, 하나님 나라의 동이 터 올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입니까? 정욕입니까? 자존심입니까? 권력입니까? 우리는 지금 돈의 노예입니까? 정욕의 노예입니까? 자존심의 노예입니까? 권력의 노예입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서 포로로 살게 된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에게 사로잡힌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시대에 절대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올바른 해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오늘과 같이 우리의 주변이 어두워질 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정치가입니까? 경제 전략가입니까? 훌륭한 정치를 해서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는 정치가 한 사람이 정말 아쉽습니다. 이 나라가 이처럼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당리당략을 위해서 싸움만 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능한 경제 전략가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등불이 어두워질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왕상17장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머물고 난 후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다루는데 그 중에 하나가 혼자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들이 죽게 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여인은 자기의 문제를 엘리야에게 호소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이 사실을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과 그의 경건함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 여인이 엘리야 앞에 엎드려 고백한 말이 24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도 이런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우리 모두 들고 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3년 11월 3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