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장영수목사/이 일을 위하여 왔노라! (요 12:20-2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8. 08:52

장영수목사/이 일을 위하여 왔노라! (요 12:20-27)

 

오백 년 조선왕조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평가되는 세종대왕, 실로 그는 명실상부한 으뜸가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었습니다. 스물 둘에 왕위에 올라서 32년 동안 재위하다가 쉰 네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왕이 될 때 그에게는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요. 그건 첫째,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유교질서에서 그 아버지 이방원도 장자가 아니에요. 형을 죽이고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그런 장본인이에요. 그런데다가 세종 자신도 장자가 아니에요.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막내인 자기가 왕위를 물려받게 됐어요. 그러니까 시작부터 정통성에서 어그러지는 거예요. 두 번째는 아버지 태종은 이러한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왕권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종을 자기의 후대로 세우고 그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기의 처남들을 다 제거합니다. 민무구 사 형제를 다 숙청해요. 다 죽입니다. 그러니 세종으로서는 외삼촌 넷이 다 죽은 거예요. 외척을 놔두었다가는 언제든지 왕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다 제거합니다. 그리고 세종이 왕이 된 다음에도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또 한 번 난리를 일으킵니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세종의 처가 세력도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처가도 다 제거해버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그리고 세종은 그 바탕 위에 왕위를 잇게 되는 것이죠. 태종은 말합니다. ‘모든 악업은 다 내가 짊어지고 갈테니 부디 너는 태평성대를 열어라.’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워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세종에게는 이렇게 세워진 나라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나라를 세우기는 쉬워도 지켜나가기는 어렵다고 징기스칸이 말했잖아요? ‘정복하는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말에서 내려가지고 그 땅을 지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죠.

이제 이 일을 위해서 세종은 초인적인 일과를 겪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어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해 뜨면 시작하고 해 지면 일과 끝이에요. 그러나 해 뜨기 전에 일어나고 밤늦도록 정무를 돌볼 뿐만 아니라 그는 집현전을 강화해서 뛰어난 학자들을 발굴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의 모든 것을 연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종 자신이 유학자였어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는 유학자였어요. ‘경연’이라는 것이 있어요. 학자들과 왕이 공부하는 것을 경연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1885회, 조선 어느 왕보다도 가장 열심히 공부한 왕이었어요.

이미 그의 업적은 우리가 잘 압니다. 과학의 발전이 있어요. 앙부일귀-해시계, 자격루-물시계 이게 다 그 시대에 만들어졌죠. 토지 측량하고, 또 우리의 국경선도 두만강, 압록강으로 확정되는 것이 또 세종 때의 일이고 무엇보다도 우리말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한 것 역시 세종대왕 때 일이에요. 그래서 유학자들이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한 인물이에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틀을 단단히 놓은 인물이죠. 실로 그는 위대한 왕이었어요.

그러나 ‘인간’ 세종은 참으로 불행했어요. 기록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두통, 이질, 종기, 백내장, 당뇨, 각기병, 고혈압... 종합병원이었어요. 과로, 긴장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자기의 비서실장에게 그것을 토로하는 글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 이러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는 그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그의 가정, 참 불행했어요. 그의 맏딸 정소공주가 13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갑자기 죽습니다. 그는 아버지로서 애통해하면서 가슴을 찢습니다. 그리고 그가 48세 되었을 때 한 해에 두 왕자와 자기의 아내를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비록 그가 왕이었지만, 놀라운 업적을 이루고 완벽하고 철저하게 그 일에 매달렸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그는 역사의 기록으로는 참으로 위대한 왕으로 남아 있습니다마는 그 뒷면에 있는 ‘인간 세종’은 참으로 연약한, 불행으로 고통 당하는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을 보면 또 다른 왕이 등장합니다.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흔히 이것을 ‘호산나 입성’이라고 말해요. 예수님이 전략을 짜셨어요. 지금 유월절이에요. 유대인의 규례를 따라서 유월절이면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다 모여야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규례예요. 의무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터져나갈 듯이 많은 사람으로 꽉 들어찹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전국 각지에서 있었던 얘기들이 한꺼번에 다 모여지는거죠. 정보가 유통되는거죠. 그걸 내다보시고 유월절에 앞서서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셨어요. 이 소문이 그 유월절에 Top News가 된 것이죠. 모든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게 됐어요. 도대체 예수가 누구냐? 그 나사렛 예수가 누구냐?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거기에 집중이 됐어요.

그럴 때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나와서 궁금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수 백년 동안 예언을 통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다. 그래서 예수께서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고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카펫을 깔듯이 깔고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는 거예요.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 오셨구나! 우리를 드디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억압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분이 오셨구나.

그런데 말이에요, 뜻밖에도 예수님이 말을 타고 들어오시지 아니하시고 비실비실한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암시가 있어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어요. 세종대왕은 자기의 능력과 주어진 기회를 통해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킨 왕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걸 한 번 더 뒤집어서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합니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예수를 왕으로 맞이하고 만세를 불렀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한 민중은 선동되어가지고 예수를 못 박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 한 주 동안 일어나는 일은 너무나 드라마틱합니다. 지금 호산나 입성을 하니까 바리새인들도 그만 포기를 합니다. ‘이젠 다 틀렸다. 보아라, 온 세상이 다 예수를 왕으로 따르지 않느냐.’ 심지어는 유월절에 우연히 왔던 헬라 사람들, 즉 그리스 사람들 이방인들도 그 소식을 듣고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제자들에게 부탁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

자, 예수님에게 이 소식이 들어갔어요. 예수님이 말합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자, 예수님이 계획 했던 대로 다 이루어졌어요. 유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그 분을 왕으로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그 소식이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거예요. 때가 된 거예요.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영광을 얻느냐? 그가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왕을 선포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묵묵히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이죠. 주는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그대로 있고 썩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그 목숨을 버려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너희가 정말 나를 왕으로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여기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영적 존재인 우리에게 죄로부터의 자유, 허무로부터의 영생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이제 주님이 갈등하세요. 이렇게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주님 역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기에 오늘 갈등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지금 내 마음이 심히 괴롭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될까? 이제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뭐라고 하나님 앞에 말해야 될까? 뭐라고 기도하고 구해야 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왔다. 그러니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분, 60년대 그 유명한 여배우, 엄앵란 씨가 최근에 인터뷰에서 자기의 옛날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얼마나 이름을 날렸습니까? 그 때 앙드레김하고 교제를 했다고 그래요. 흰 옷을 입고 흰 장화를 신고 타악 나타나는 앙드레 김하고 각별한 호감을 가지고 정을 나누면서 교제를 하는데 어느 날 앙드레김이 쓰윽 청혼을 하더래요. 그래 자기가 깊이 생각하다가 거절을 했대요. 왜 거절을 했냐고 물어보니까 ‘내 그 사람 그 흰옷을 평생 빨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하더라구요.’ 갈등이죠. 사실은 매사가 다 선택의 문제이지요. 선택하려면 갈등이 오는 것이죠.

그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의 <The Study of History> (역사의 연구)라고 하는 방대한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스물여덟 개 문명을 단위로 연구합니다. ‘문명은 발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특별히 문명이 성장할 때에 그 문명을 앞서서 이끄는 창조적 소수자 (Creative Minority)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고 따라가는 비창조적 대중이 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대중은 그 창조적 소수자를 모방하게 되지요. 헬라어로 minesis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방하게 되는데 어떻게 모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정적으로 미개한 사회로 머무느냐, 아니면 성장하는 문명사회로 가느냐 구분이 된다는 거예요. ‘연장자 또는 죽은 자를 높이고 그를 따르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고, 그러나 창조적 인격을 모방하는 사회는 성장하는 문명사회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한 거죠. 새로운 규범과 도덕을 훈련해서 습관화합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어디에 있느냐? 창조적인 인격을 모방함으로써 정신적인 일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도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교회 나왔을 때 뭘 보십니까? 교회에는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고 모임이 있고 섬김이 있고 많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만을 본다면 ‘생명’은 잃어버려요. 우리는 그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 그분의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죠.

그런데 역사의 경험을 보면 이 ‘창조적 천재’에게는 딜레마가 있어요. 왜 그러냐? 대부분 그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온전히 이해되지 못하거든요. 대중들이 저를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만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 따르는 대중들의 관심은 저 사람을 따라가면 이제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따라가면 내가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겠구나. 자기의 욕망에 붙들려 따르기 때문에 ‘창조적 천재’의 결말은 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죠. 또 ‘창조적 천재’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질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뒤따라가는 평범한 대중이 그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따라갈 수 있을 것이냐? 이게 또한 심각한 과제라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것을 넘어서셨어요. 예수님도 또 하나의 ‘창조적 천재’로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십자가에 홀로 외로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역사하심으로 교회가 등장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신비가 있어요. 그러면 이제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너무나 허물 많고 평범한 우리가 어떻게 이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면서 살 수 있습니까? 단순히 우리의 의지와 열심으로 아닙니다. 살아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뭡니까?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내려놓고 기도하는 것이죠.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어요. 몽골 선교사로 가신 이용규 선교사가 쓴 책입니다. 이 분은 한 40대쯤 되시는 분인데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나온 분이에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반대를 하셨어요. ‘굳이 동양사학을 하는데 있어 미국까지 갈 필요 없다. 여기서 공부해라.’ 그런데 자기는 미국이라는 더 넓은 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러자 교수님이 말합니다. ‘정 가고 싶다면 꼭 그곳에 가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을 공부해라.’ 그래서 택한 것이 중동사예요.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가서 그가 느낀 것은 한국에서는 내노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순간 가장 영어도 서툴렀고 가장 기본적인 바탕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너무너무 그 학업을 따라가기 힘든 거예요. 너무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그가 학교에 가면서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했대요. ‘내가 차라리 저 차에 부딪힌다면, 그래서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드러눕는다면 합법적으로 쉴 수 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할까요? 그리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말한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고생해서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높은 자리에 앉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오늘의 이 고생을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이냐?’ 그가 졸업하면서도 별로 졸업 자체에 대해서는 기쁨이 없더래요. 그 여러 교수들이 다 가운을 입고 앉아 있지만 하나도 부럽지 않더래요. 자기가 졸업할 때 하버드 대학 원장이 졸업식 축사를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도 여러분과 같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이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남모르는 두려움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할 때 누가 제 어깨를 탁 잡으면서 “자네, 자네는 행정 착오로 잘못 들어온 거야. 당장 집에 가.” 그럴까봐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졸업식 날 졸업식장에 참석하고 단상에 올라가기 전에 또 행정과 직원이 와가지고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당신이 졸업하는 것은 착오입니다. 집에 가세요.” 그 말을 할까봐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년 몇 명씩 자살하잖아요?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서. 그가 깨닫습니다. 내가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은 티끌만한 것이었구나. 그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서울대 학생도 그렇고, 서울대 교수도 그렇고, 하버드대 학생들도 그렇고 심지어 하버드대 교수들도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때에만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졸업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뭐냐.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나를 지키시고 역사하셨다.’ 그는 이렇게 고백해요.

박사과정은 서류로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2학년 마치면 정말 이 사람이 논문을 쓸 자격이 있느냐? 논문자격시험을 패스해야 되는데 그거 두 번 떨어지면 그냥 짐 싸가지고 가야 되는 거예요. 간절히 매달려 기도합니다. 독일어 시험을 봐야 되는데 두 시간 동안에 독일어 지문을 영어로 번역을 해야 되는데 아무리 해도 이게 되지 않는 거예요. 큰일 났어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날 도와주셔야 됩니다. 이게 두 번 시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 한번 떨어지면 다음에 제가 다시 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이것을 패스하게 해주시면 정말 나를 여기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내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시험지를 받았는데 깜짝 놀란 거예요. 지문이 두 개가 나왔는데 첫 번째 지문을 보니까 놀랍게도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로마서 1장 강해가 나온 거예요. 아, 로마서 1장이라면 자기가 한국에 있을 때 대학생부, 청년부에서 말씀을 공부하느라고 이리저리 뒤져봤던 내용인데 아, 그게 나온 거예요. 마지막 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였어요. 번역을 끝내면서 ‘아, 하나님 , 나는 살았습니다.’ 첫 번째 지문을 30분 만에 해결하고 나머지 1시간 30분가지고 두 번째 지문을 가지고 씨름을 해서 다 써낸 거죠. 합격을 한 거죠.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알아보았더니 원래 시험을 내는 분은 현대사 교수였는데 이분이 안식년을 떠나는 바람에 종교개혁사를 전공한 교수가 이걸 맡게 된 거예요. 이분이 갑자기 일을 맡아가지고 뭘 낼까 하다가 자기가 수업 준비하던 그 부분을 그냥 얼른 낸 것이죠. 하나님이 순간마다, 순간마다 도우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유학을 한 것도 하나님이 나를 연마시키시는 광야학교였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나의 미래, 나의 경제, 나의 안전, 나의 경험, 나의 지식, 나의 판단, 나의 명예, 나의 사역까지도 하나님 앞에 하나하나 다 내려놓게 하시더라는 거죠.

어떤 분은 또 그러실지 몰라요. ‘난 뭐 유학가지도 않았는데 뭘 내려놓아?’ 여러분, 가장 확실한 것 하나 알려드릴까요? 가장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 여러분, 십일조를 아직 안 하시는 분이라면 십일조를 한번 해 보십시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내 재물에 대한 관리권을 내려놓는 거예요. 믿음의 도전이에요. 믿음의 훈련이에요.

그분은 지금은 몽골의 선교사로 갔습니다. 아니, 하버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왜 몽골에 갑니까?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중국사를 전공하고, 중동사를 전공하고 그리고 그 세계를 지배했던 과거의 몽골을 연구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천국의 nomad' 라고 말합니다. nomad란 유목민이라는 뜻이에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으로 살겠노라.

그가 몽골에 가서 발견한 게 뭐냐? 양과 염소가 있는데요, 양을 잡거든요. 양은 칼이 목에 들어와서 피가 다 내장 안으로 흐르는 동안에도 ‘깩‘ 소리하나 안 낸답니다. 고요히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고 죽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장정 두 사람이 그 다리를 꽁꽁 묶어야 된답니다.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가지고 염소 잡을 때는 온 동네가 다 안대요. 저거 염소 죽는구나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우리는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 겸손하게 순종하고 믿음으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위기가 왔을 때 죽을 때 발버둥치고 몸부림을 칠 것인가?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로 내가 이 일 때문에 왔노라.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사람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사는 신앙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오늘 이렇게 예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으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불순종을 내려놓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오늘까지 안전하게 지켜주신 분도 하나님, 우리의 내일을 준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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