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신앙인의 성숙한 영적 품격(品格)은? (약 1:19-27)
발명가 '에디슨'의 이야기입니다. 에디슨은 자기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놓고 꽃들과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정원에 가본 에디슨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왜? 정원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사이에 꽃 도둑이 들어와 꽃을 따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손으로 닥치는 대로 꽃을 따서 줄기가 상한 것도 있었고 심지어 뿌리가 뽑힌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집안으로 들어가 종이를 찾아 이렇게 썼습니다.
'꽃 도둑님, 앞으로 꽃을 꺾으실 때는 부디 가위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메모 지를 가위와 함께 정원이 잘 보이는 곳에 매달아 놓았답니다. 그러자 다음날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 주인님, 매달아 놓으신 가위는 잘 들지 않습니다. 부디 숫돌에 잘 갈아서 놓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얼마나 여유로운 삶의 모습입니까? 속이 상했다고 가시 돋친 말을 하면 결국 그 말이 내게로 다시 돌아오는 법입니다. /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성도가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영적 품격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①야고보는 경건의 신앙 성숙의 그 첫 번째 덕목을 말, 언어에 두었습니다(19-20)
우리가 평생을 두고 들어야 할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내면에서부터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셋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말은 화(禍)와 복(福)의 근원입니다. 말을 잘 하면 복이 되기도 하지만, 말 한 마디 잘못해서 분란이 일고, 싸움이 되기도 하며,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은 생각의 실체이며,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말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눈으로는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의 내면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녀의 한 마디 말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하고, 부모의 근심이 되기도 합니다. 또 부모의 한 마디가 자녀를 용기 있게 만들거나 혹은 자녀의 기를 꺾어 놓기도 합니다. 아내의 말 한마디가 남편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하고, 남편의 한 마디 말이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또 26절에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야고보 사도의 일 성입니다.
먼저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로 계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기독교회였고, 다른 모든 교회의 모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 각 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 많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일어난 박해를 피해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각 곳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야고보 사도께서 로마제국 각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교회의 담임목사가 먼 곳에 나가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그 심정이 어떤 것일까요? 가까이에 있으면 주일마다 설교를 통해서 잘 가르치고 심방도 해서 위로하고 말씀으로 권면도 하실 수 있을 텐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정말 간절하고 정성을 담은 편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 목사님도 그런 심정으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당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야고보 사도는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 속에 성도들을 향한 야고보 사도의 모든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또한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핍박에 대한 안타까움, 위로와 격려 등 야고보의 마음이 이 한 마디에 농축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목사는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내 형제들이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고, 성도들도 목사를 '사랑하는 내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끼리도 역시 '나의 사랑하는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이며, 경건한 신앙인의 영적 품격입니다. /믿/
여러분, 주위를 한번 돌아보세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정말로 '사랑하는 내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참 행복한 공동체의 가장 큰 능력은 사랑입니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섬기고, 용납할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슥된 영적 신앙인의 경건입니다. /할/
▶19-20절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십니다.
말은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의미입니다. 말하는 것에 두 배 들으라는 것입니다. 10분 말하려면 20분 들으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합니다. 상담 학의 기본은 먼저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 때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할/
어떤 사람은 모였다하면 혼자 말을 독차지합니다. 옆 사람에게 틈을 안줍니다. 그렇게 말이 많고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부분 자가 자랑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기 때문입니다. 또 실수가 많은 사람이 됩니다.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바로 많이 들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멘!/
▶인도의 성자 '나나크데브'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사람의 참되고 진실한 가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그 성자는 즉석에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아끼는 성자였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면 그 때 말씀드리지요' 다음날 아침 그가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눈부신 보석하나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보석을 가지고 시장으로 가서 값을 물어보시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비싸게 준다고 해도 팔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냥 가게마다 들러 값을 물어보기만 하시오. 그리고 도로 가지고 오시오.'
그 사람은 제일 먼저 과일가게에 들러서 주인에게 그 보석을 보여주고 얼마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과일가게 주인이 말했습니다. '오렌지 두 알 값을 드리지요' 다음은 감자가게에 들러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감자 네 근 값을 쳐드리지요' 대장장이는 500냥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람이 보석가게에 들어갔습니다. 보석가게 주인은 처음에 천냥을 주겠다고 하더니 조금 더 자세히 살피더니 오천 냥을 불렀습니다. 조금 후 만냥을 주겠다고 하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도시에서 제일 유명한 보석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보석가게 주인은 그 보석을 보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몇 번이나 감정을 되풀이하더니 '손님, 정말 훌륭한 보석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보석은 값을 붙일 수 없을 만큼 귀한 보석입니다. 굳이 값을 매긴다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야겠지요. 파실 생각이시라면 저에게 파시지요.'
그 사람은 보석을 들고 그 성자에게 돌아가서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사실을 말하자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성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사람의 진정한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지요? 사람의 존재도 같습니다. 사람마다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 다르게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오렌지 두 알 값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감자 네 근 값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500냥 정도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돈으로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가치란 각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의 입은 하나지만 귀는 둘입니다. 둘로 자세히 듣고 하나로 자세히 말해야 합니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님이 수업을 하다가 앞으로 목회 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교인 가운데 아내가 세상을 떠나 슬픔을 당하고 있는 형제가 있습니다. 우연히 상가에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학생들은 저마다 생각나는 대로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붙들고 위로하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천국에 갔으니까 이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를 하겠습니다.' 등등 모두 한 마디씩 했습니다.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수님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니? 그냥 꼭 끼어 안고 울어주면 가장 큰 위로다.' /할/ 그렇습니다. 말없는 말도 큰 말입니다. /아멘!/
⑴'듣기는 속히 하라' 여기서 듣는 것도 빨리 듣는 사람이 있고 늦게 듣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이것저것 다 듣지 말고 잘 가려서 들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들을 것은 반드시 들어야 하고, 안 들어야 할 것은 안 들어야 합니다. 들을 것은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구약의 사무엘이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즉시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어느 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일에 바빠서, 세상일에 빠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⑵'말하기는 더디 하라'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말을 피해야 합니다.
빌2: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사람, 내가 잘난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덕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엡5장은 우리가 하는 나쁜 말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말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말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 절망하게 만드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연못에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연못 속에 살고 있던 개구리들이 나와서 항의를 합니다. '제발 돌을 던지지 마십시오.' 그러자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그냥 장난으로 돌을 던지는 것 뿐이야.' 그러자 개구리가 대답합니다. '당신들이야 장난으로 던지지만 우리는 목숨이 왔다갔다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들, 남을 비난하는 말, 비웃는 말, 흉보는 말들이 한 사람을 절망가운데 몰아갈 수 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멘!/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사실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니면 나는 거짓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덕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덕이 되면 말하고, 덕이 되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의 말만 합시다. '캔 브랜챠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에서 칭찬 한마디가 거대한 범고래도 춤추게 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 책의 주인공 '웨스 킹슬리'라는 사람은 본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플로리다로 출장을 갔다가 '씨 월드 해양 관'에서 돌고래 쇼를 구경하게 됩니다. 3톤이 넘는 범고래가 화려한 쇼를 펼치며 춤추는 광경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사육사에게 다가가 그 비결을 알아보게 되는 데 그것은 바로 사육사가 고래에게 관심을 가지고 칭찬할 때 거대한 고래일지라도 춤을 추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칭찬 한마디가 사람의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향해 말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마십시오. 칭찬의 십계명이 있습니다. ⑴칭찬할 일이 생겼을 때 즉시 칭찬하라. ⑵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⑶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⑷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하라. ⑸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칭찬하라. ⑹거짓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칭찬하라. ⑺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칭찬할 일이 보인다. ⑻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더욱 격려하라. ⑼잘못된 일이 생기면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라. ⑽가끔씩 자기 자신을 칭찬하라. /할/
▶생명의 말만하십시오. 세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입술의 언어입니다. 이 말은 해도 소용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남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듣기 싫어, 집어 치워, 병신 육갑하네'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남편의 56%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아내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웃기고 있네, 당신네 집안은 다 그래'랍니다. 아내들의 48%가 응답했습니다. 이런 말은 입술의 말입니다.
둘째는 가슴의 언어입니다. 가슴의 언어란 '이해와 공감의 말'입니다. 서로 이해해 주고 공감을 나누는 언어입니다. 전도도 가슴의 언어로 해야 합니다. 기분을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고 칭찬한 후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할/
셋째는 영혼의 언어입니다. 영혼에 충격을 주고, 잠든 영혼을 잠에서 깨우는 언어입니다. 생명의 언어는 덕을 세우는 말입니다. 생명의 언어는 긍정적인 말, 감사의 말, 칭찬의 말입니다. 민14: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물이 없을 때 죽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양식이 없을 때 죽겠다고 아우성쳤습니다. 만나가 맛이 없어 정력이 떨어져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 귀에 들린 대로 심판하셨습니다.
엡4: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할/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 문제만큼 어려운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참 훌륭하신 목사님이 크게 목회를 하고 계신데 얼굴도 잘생기고 말씀도 참 잘하십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아픈 상처가 있었답니다.
사모님이 대학에 다닐 때에 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인이었는데 어느 날 말다툼을 했답니다. 그런데 하도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뺨을 한 대 때렸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모님은 그 날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일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60세가 넘도록 혼자 살아왔습니다.
우리 이런 기억이 있지요. 그때 한번만 참으면 될 것을, 그때 한번만 그냥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을 참지 못해 화를 자초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 주워담느라고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까?
우리가 화를 안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게 되면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마음속으로 화는 낼 수 있으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악한 말을 하지 말고 손을 들어 뭘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밤에 잠들기 전에는 분을 풀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내 이 뭉쳐진 마음을 풀어주소서.' 기도하고 자라는 것입니다.
성내는 사람의 결과가 무엇인가? 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내고 혈기부리면 성령이 떠나가십니다. 기도가 막히고, 기쁨이 살아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잠시 잠깐 동안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성내면서 돌을 들어 하나님의 종 모세를 치려고까지 했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했는데,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성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축복의 땅을 밟았습니다.
여러분! 시험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축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성내지 맙시다. 어떤 일에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②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내어버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한 심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지금 이 말씀을 나를 위해서 주시는구나' 늘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복 있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말씀을 늘 가까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이 소생하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순결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 속에 들어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이 화랑에 전시가 되었습니다. 때를 맞춰서 친구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는 친구들을 먼저 그림들 앞으로 인도하지 않고, 지하실로 그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음료수를 간단히 대접하고 난 뒤에 갑자기 불을 꺼버렸습니다. 지하실에 불을 꺼버렸으니까 얼마나 캄캄했겠습니까? 놀란 친구들을 향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10분 동안만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세' 그는 10분 뒤에 다시 불을 켰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인가?' 그 때 화가는 '왜 그런 줄 아나? 자네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보느라고 눈이 너무 타락했어. 그냥 그대로는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네. 그러니 캄캄한 곳에서 우선 눈을 깨끗하게 씻고 난 뒤에야 내 그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걸세'
마음과 눈이 깨끗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림들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 속에 더러운 욕망들, 세상 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 속에 있는 인간적인 더러운 욕심들을 깨끗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생각과 선입견 그리고 고정관념 등을 다 떨쳐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 제대로 심겨질 수가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말씀이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내가 기꺼이 받겠습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때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것이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성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
▶나아만 장군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람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신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살이 썩어 들어갑니다. 불행한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에서 기르고 있는 여종 하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조국 이스라엘에 가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데, 그에게만 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종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왔습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엘리사가 뛰어나와서 자기를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을 내비치질 않았습니다. 그저 사환을 보내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전갈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자기는 큰 대국의 위대한 장군이니까 이곳까지 자기가 찾아왔으면 빨리 나와서 기도라도 해 주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아만 장군은 그의 자존심 때문에 종들에게 그냥 돌아가자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만약 나아만 장군이 성을 내면서 그냥 돌아가 버렸다면 그는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종들이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그의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성내고 마음의 문을 닫아놓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우리는 그저 온유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을 때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믿/아멘!/
③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함입니다. 경건의 영적 성숙의 품격은 행함에 있습니다(22-25).
⑴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는 여기서 동사형을 쓰지 않고 명사형을 썼습니다. '말씀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더 강조 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싸워라'고 하지 않고, '싸우는 군사가 되라'고 하면 더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르쳐라'고 하는 말보다는 '교사가 되라'고 하면 삶 전체를 가르치는 일에 종사해야 됩니다.
또 '집을 지어라'는 것보다 '건축가가 되라'고 하면 그 일에 더 철두철미하게 전념해야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행하라'고 하는 것보다도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산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약2: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죽은 시체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어야 역사 합니다. 믿음이 죽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6,25 동란 때였습니다. 그 때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동란 중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잡혔습니다. 일정 가운데는 부산에 있는 유엔군 참전 용사들의 묘소를 참배하는 계획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미8군 당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전시입니다. 말이 묘지이지, 거기에 무슨 잔디가 있었겠습니까? 황량한 벌판일 뿐이었습니다. 그저 시체가 생기면 땅 속에 파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니 황량한 모습의 묘지를 어떻게 대통령 당선자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늦겨울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잔디를 구하겠습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습니다만, 당시 현대상사의 고 정주영사장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8군 당국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묘지에 풀이 나게 할 테니까 돈을 주겠느냐?' 그들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좋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 방법을 한 번 들어보자'
그러자 정주영 사장이 '방법을 말해주는 것은 좋은데 그 방법만 듣고서 돈을 주지 않으면 나만 손해볼 것 아니냐? 그러니 먼저 계약을 체결하자' 미8군 당국자들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좋다. 돈은 실비의 3배를 주겠다. 좌우지간에 그 날 묘지가 새파랗게 되도록 바꾸어만 달라!' 그 길로 정주영 사장은 그 주위에 있는 보리밭을 모두 사들였습니다. 때마침 눈 속에는 보리 싹이 새파랗게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부들을 시켜서 그 보리를 다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때를 입히듯이 그것으로 묘지를 다 입혔습니다.
예정한 날 아이젠하워 장군과 그 일행은 유엔군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습니다. 묘지마다 새파란 보리 싹이 덮여 있었으니까 보기에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에 그 묘지는 다시금 누런 색깔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리에 뿌리가 없으니까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결국은 그 영혼이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병들어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맙시다. /할/
⑵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저 듣기만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대로 나아가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앞에 거울이 있습니다. 얼굴을 쳐다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빗을 가지고 머리를 바르게 빗어야 할 것입니다. 얼굴이 더럽습니다. 그러면 가서 물로 깨끗하게 세수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거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얼굴이 더러워져 있는데 그냥 다른 일을 하려고 깜빡 잊었다면 거울을 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늘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고쳐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깨끗이 씻어버려야 할 더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으면 나아가서 실천해야 합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보세요! 씨뿌리는 자가 좋은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크게 네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씨를 뿌려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단계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싹이 터야 합니다. 깨닫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내가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인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깨닫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깨달았으면 작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내가 이제는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러한 결심이 서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단계입니다. 깨달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아멘!/
⑶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잊어버리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자유하게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 곧 사람이 만든 법은 우리를 구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에서 해결해 줍니다. 근심, 걱정, 염려, 고통,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모든 짐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아멘!/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이 임합니다. 눅5장에 나오는 기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는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밤새도록 노력했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쩔 수 없이 빈배를 바닷가에 갖다 대고 그물을 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물은 밤에 내려야지 아침에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깊은 데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깊이에 내려야 합니다. 경험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는 동료들을 손짓해서 불렀습니다. 고기를 잡은 것을 배에 채우니까 두 배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할/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하게 채워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아침에 그물을 던져라'고 하시면 아침에 그물을 내리십시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시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십시다. 상식에 맞니 맞지 않느니, 경험적으로 틀린 말이니 옳은 말이니,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이 영권입니다. /할/
④참된 경건자가 되라!(26-27)
여러분, '참된 경건은 무엇인가?'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시골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늘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자기의 믿음이 제일 좋은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가 넌지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만약 자네에게 소가 열 마리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소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다네'
친구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말이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또 쉽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한 마리뿐만 아니고 열 마리라도 다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말도 없는걸 어떻게 하겠나'
친구는 마지막으로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돼지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그 농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역정을 냈습니다. '자네! 간밤에 우리집 돼지가 새끼를 열 마리 낳은 것 어떻게 알았어?'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돼지 가운데 한 마리를 하나님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앞으로 소나 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큰소리 치는 사람은 언제나 시원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사실 언제나 말이 없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날에 한 유명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서 깊은 사막 속에 들어가 수도하는 일에 전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이 생기면 그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기도 하고 또 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수도사님, 우리가 수도사님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렇게 먼길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뜻밖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으면서도 실천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듣기만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이미 들은 것을 가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이미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새로운 말, 신기한 말, 무엇인가 재미있고 유익한 말을 자꾸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2: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고,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⑴여기서도 야고보사도는 경건의 첫 번 째 척도를 '언어생활'에 두고 있습니다(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모름지기 경건의 첫걸음은 말조심하는데 있습니다. 혀에 재갈을 먹여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말고 말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⑵경건의 두 번째 척도를 '물질생활'에 두고 있습니다(27).
환난을 당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는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무슨 사회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었겠습니까? 일자리가 충분했던 것도 아닙니다. 또 그 사람들은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주는 입장에서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 보상하시리라는 마음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경건입니다. 불순한 동기가 없으니까 정결하고 깨끗한 경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할/
⑶경건의 세 번째 척도를 '사회생활'에 두고 있습니다.
27절 마지막 부분에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할/
교회에서는 모두 경건한 척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경건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유혹합니다. 타락한 성으로 유혹합니다. 명예로 유혹합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거룩하게 살아야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속에 물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짭니다. 그러나 바다 속에 살아가는 물고기들은 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받은 참 행복한 성도들은 세상이 어두우면 더욱더 빛을 발하고, 세상이 부패했으면 더욱더 짠맛을 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3년 12월 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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