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변증법적 사고와 변증법적 삶의 대립.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2. 28. 09:03

 

변증법적 사고와 변증법적 삶의 대립. 철학이야기

2012/11/2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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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세운다고 항상 목표한 곳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보통 대부분의 경우는 엉뚱한 곳에 도착해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로 아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세상이 돌아가는 과정이 계획을 세우고 엉뚱한 곳에 도착하고 또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변증법적이라고 해도 우리 자신의 마인드까지 변증법적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직선으로 나아가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변증법적으로 살 수 있다. 처음부터 변증법적으로 살려고 하면 역으로 일직선으로 갈 수 있기는 커녕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삶은 입체적이다. 길을 시작한 곳에서 보는 것과 도착한 곳에서 (물론 그곳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곳이다)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 도착한 곳에서 또다른 길을 시작하고.

 

변증법이 정반합이라면 처음 길을 시작하고 계획을 세우는 걸 정,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저항에 부딛히는 것이 반, 그리고 나서 처음 예상과는 다른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것이 합이다. 거기서 다시 정, 계획을 세우고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시작된다.

 

길을 가다 보면 대상도 바뀌고 무엇보다 자아가 바뀐다. 대상은 자신이 처음에 기대했던 그 대상이 아니고 나자신조차 처음에 그걸 기대했던 내가 아니다. 그걸 미리 안다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라고 한다면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변증법적 삶이다.

 

변증법적 사고는 변증법적 삶의 최대의 적이다. 생각해보라. 계획이 틀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사람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 혹은 지나치게 유동적인 계획을 세우고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삶을 사는 데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일직선으로 최선을 다해서 전력질주를 해야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착한 곳에서까지 처음 시작할 때의 목표를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 도착한 곳에서는 다시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대상도 자신도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목표는 세워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 도착한 후에는 다시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입체적이고 변증법적인 삶이다.

 

변증법적인 삶을 가로막는 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어차피 틀어질 계획 따윈 세우지 않겠다는 변증법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세웠던 계획을 그 대상과 자기자신이 바뀌었는데도 계속 고수하는 것이다. 전자는 너무 유연해서 문제고 후자는 너무 견고해서 문제다.

 

중요한 것은 처음 목표한 그곳에 도착했다 해도 그곳은 이미 엉뚱한 곳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 자체가 자신이 예상했던 대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자신도 처음 그걸 목표하고 시작했던 자신과 다르다. 그렇게 대상과 자신이 변하기 때문에 새로운 목표가 생겨나고 새로운 계획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증법적 삶을 살아낼 만큼 일직선으로 최선을 다해 견고하게 전력질주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도착한 곳에서 유연하게 목표를 바꿀 줄 아는 것이다.

 

변증법적 삶은 다르게 말하면 욕망에 충실한 삶이다. 항상 욕망에 기만당하면서도 (왜냐하면 욕망을 충족시키면 그 대상과 자신이 바뀌기 때문에 다시 다른 욕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또 욕망하는 것. 그것이 변증법적 삶의 조건이다.

 

그런 삶은 파란만장한 삶이 된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일직선으로 전력질주를 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도착한 곳에서 목표를 수정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한사람은 너무 유연한 것이고 다른 한사람은 너무 견고한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는 견고해야 한다. 일단 한번 일직선으로 전력질주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봐야 한다. 비록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계획을 세우고 시작하는 단계에서 유연해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어디로도 못 간다.

 

반면 도착한 곳에서는 유연해야 한다. 그곳이 엉뚱한 곳이라고 해서 원래 목표를 계속 유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대로 도착했어도 대상과 자신이 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도착지는 엉뚱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땐 유연하게 새로운 목표를 구상해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의 목표를 계속 고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처음의 자신이 아닌 지금의 자신에게 맞는 목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시작할 때는 견고하게. 도착했을 때는 유연하게. 그렇게 살면 변증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변증법적 사고는 변증법적 삶과는 완전 다른 무엇이다. 변증법적 사고는 일단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과가 이렇게 될 거니까 거기에 맞춰서 잔머리를 굴리는 거다. 근데 변증법적 사고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그 결과는 일직선으로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에 나온 거라는 사실이다. 미리부터 결과를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서 잔머리를 굴리면 결코 그 결과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 욕망한 대상에 도달해본 사람만이 변증법적 삶을 살 수 있다.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변증법적 삶은 중간에 꺾이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간부터 유연해지는 삶은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도달해야 한다. 그곳이 엉뚱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일직선으로 전력질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변증법적 사고로 미리 결과를 알고 있다고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면 어디로도 도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적 사고는 변증법적 삶의 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삶은 변증법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일직선으로 전력질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처음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고 그 욕망의 대상을 갖기 위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일직선으로 전력질주해야 '결과적으로' 변증법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