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barnabak/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3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 20. 10:26

barnabak/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31)

 

한 2주 전 분당중앙교회 최00 목사의 여신도와의 성추행, 고액의 사례비, 독단적인 거액의 펀드투자 등의 행태가 알려지면서 교계에 큰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특히 이 교회는 평소 선교나 구제에서 모범적인 교회였기에 충격의 여파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지난 연말부터 불거진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들 특히 유명 목회자들의 추태와 추문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몇 몇 목회자들이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다음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허리를 동이고 있다’고 말하면서 ‘거짓에서 비롯된 악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해야 한다.’ 고 그 처방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진단하면서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부인하면 예수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면 예수님을 시인하는 은혜가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목회자는 ‘선배들의 고난 때문에 한국교회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 영광을 다 까먹고 오히려 수치스러운 교회가 돼가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 같은 일들은 최근 한국 교회에 고난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복은 많이 받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난이 없으니 영광도 없는 것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진단을 하면서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 있어야 한다. 말씀 때문에 보는 손해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 때문에 받는 영광이 있는 것’이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상 인터넷 로고스 선교회-신성덕 칼럼에서 발췌)

 

저는 이러한 말 가운데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는 한 목회자의 진단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는 십자가를 믿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이고 교회마다 십자가로 가득 채워져 있고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삶은 기독교인의 가장 고귀한 삶으로 인정되어 왔고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말씀으로 선포되어져 왔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십자가의 도가, 십자가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십자가 십자가를 외치지만 실질적으로는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삶을 좋아하지 않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한국교회는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고 교회의 위상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1865년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대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언한 말이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중생 없는 구원, 그리스도 없는 성서, 회개 없는 용서를 논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에서 그리스도가 빠지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어떤 종교가 되겠습니까?

거듭남이 없고 회개가 없는 구원과 용서가 강조되는 기독교는 어떤 종교가 되겠습니까?

내용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고, 경건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될 것이고, 책임은 없어지고 명예만 남지 않겠습니까?

그로부터 140여년이 지난 오늘 이러한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과 교회는 십자가를 싫어하고 있고, 십자가 없는 기독교, 십자가 없는 신앙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 속에 십자가가 있는데도 십자가를 쏙 빼놓고 부활의 신앙만을 이야기하고 있고, 십자가가 빠진 기독교는 결국 타락의 길로 빠져가고 있고 세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중심 속에 십자가를 세워야 하고 성도들의 삶속에 다시 십자가가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기독교에서 정당한 말씀으로 기독교인들의 중심적인 삶으로 인정받을 때 한국교회는 다시 회복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능력이 있는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을 바꿔서 얘기하면,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이고,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이처럼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도 하는 구원의 기준이 됩니다.

구원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할 때에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기독교에서 이 진리보다 이 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23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는 말씀이 있는데, 십자가의 도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셨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간단하게 설명을 했습니다만 사실 이 말씀 속에는 기독교의 핵심사상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들어있고, 믿음이 들어있고, 예수님과 십자가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의 신앙을 대표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했던 말씀도 바로 이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앙을 대표하는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대표적인 두 사상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입니다.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고, 23절에서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어떤 표적도 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십자가의 도를 외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했던 말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자신들의 기대를 담고 있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시면 나라를 회복시키시고 예전의 다윗왕국과 같은 강력한 나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표적을 바랬는데 예수님은 그 기대를 저버리고 그만 십자가에서 그것도 로마인들의 손에 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표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유대주의적인 생각으로 십자가의 도를 멀리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표적만을 구합니다.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해 주셔야 그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시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면서 사업도 잘되고 직장생활에서 승진하고 자녀들이 잘되는 축복을 주셔야 그것이 좋은 하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내가 손해보고 내가 져주는 십자가의 삶은 신앙생활에서 멀리 비켜가 있고 그런 신앙생활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신앙형태였습니다.

 

두 번째는 헬라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헬라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니까 십자가의 예수는 절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오히려 미련한 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느냐?

그것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개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지혜로 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서 죽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야 그것이 지혜 있는 것이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 헬라인들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 속에서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헬라인들이 추구했던 지혜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지혜 없는 모습이었고 바보 같고 미련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이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죽느냐? 왜 손해를 보고 왜 희생해야 하고 왜 바보같이 당해야 하느냐? 그것은 절대 지혜로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주장이 맞는 것 같고 그럴듯하고 보일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 될 수 있고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하는 표적, 헬라인들이 생각했던 지혜가 정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고 세상의 행복을 주는 것 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하고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것에 빠져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의 지혜와 능력과 철학과 사상이 올바른 것일까요?

그렇게 살면 구원을 받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한 가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공자선생님의 제자가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공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현 세상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다음의 세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솔직한 대답입니다.

세상사는 도리와 지혜를 수없이 가르쳤던 인류의 스승이었지만 그도 죽음의 문제는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지혜와 철학과 사상과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음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명한 해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바로 십자가의 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의 표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보 같고 능력 없고 무능한 사람들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믿으면서 십자가를 가까이 해야 하고 십자가의 도를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먼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 인간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예수님 한 분만을 보내셨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도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도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또한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세상의 지혜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내가 살고 네가 죽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네가 죽어야 하고 너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지혜요 그것을 잘하는 것이 세상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까?

남을 이기고 남을 죽이고 남을 넘어섰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고 내가 평안합니까?

고린도 교회는 안타깝게도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여러분파로 나뉘어져서 서로 싸우고 분쟁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내가 잘 났고 네가 못 났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서로 상대방을 넘어트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교회가 행복할 수 없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십자가의 도는 내가 죽을 테니 네가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으로 로마가 살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 변에서 죽음으로 한국이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도 사실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실천되는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도 내가 죽으면 됩니다.

내가 죽기만 하면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고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내가 이기려고 하니까 행복하지 못하고 문제가 계속 커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가정에서 실천될 때, 사회에서 실천될 때, 국가에서 실천될 때 내가 살고 우리가 살고 전체가 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도를 믿을 때 우리가 받게 되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30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고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됨으로 우리는 진정한 지혜 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침을 받게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됩니다.

죄와 사망과 모든 문제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를 속량하셨음을 믿는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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