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목사/선교, 십자가의 사랑으로 (고전 1:18-25)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국의 유명한 영성가 씨. 에스.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썻습니다. 이 책은 지옥에 있는 삼촌 마귀가 땅에 있는 조카 마귀에게 인간을 미혹하는 방법을 가르친 내용의 책입니다. 그 중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조카 마귀가 삼촌 마귀에게 와서 슬프게 웁니다. 그래서 삼촌 마귀가 왜 우느냐고 하니까 조카 마귀가 말합니다. “삼촌, 억울해서 울어요. 삼촌도 알다 싶이 제가 오랫동안 예수믿지 못하도록 지켰던 환자 하나가 요 며칠전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잖아요? 그래서 속상해서 울어요”. 그랬더니 삼촌 마귀가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딱 한 가지만 못하게 하면 된다. 그것은 본질적인 일이다. 그들로 하여금 찬송경연대회도 하게 하고, 성경퀴즈대회도 하게 하고, 축구시합도 하고, 바자회도 하게 하라. 교인끼리 자주 모여 커피도 마시게 하고 어떤 때는 기도도 하게 하라. 그러나 딱 한 가지는 못하게 하라. 본질적인 일은 못하게 하라. 본질적인 일은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해라.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예산이 없으니 다음에 하면 어떠냐? 훈련된 사람이 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떠냐? 지금 급한 일부터 하고 다음에 하면 어떠냐? 이렇게 말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자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들은 네 손에 있을 것이다. 알겠니?“.
여러분, 마귀의 이야기를 듣습니까? 우리가 교회생활하면서 늘 기억할 것은 본질적인 일입니다. 다른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제도 필요하고 교육, 예배, 구제,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일이 있습니다. 전도요 선교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고 연기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좀 하려고 하면 방해가 많습니다. 핑계가 많습니다. 시험도 많습니다. 그러나 불은 타야 불인 것처럼 교회는 선교해야 교회입니다. 2천년 교회역사는 선교의 역사요 성경은 곧 선교하는 책입니다. 성경을 보고 교회를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축복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역사속에서 되는 교회는 모두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선교하느냐입니다. 왜 선교하느냐입니다. 선교라고 다 선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목적을 위해 선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교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목적,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냐? 십자가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선교의 내용이 되고 십자가가 선교의 방법이 되고 십자가가 선교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십자가의 선교”라고 부릅니다. 오늘 캄보디아, 베트남 선교를 떠나는 우리 교회에게 십자가의 선교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가? 그 축복은 무엇인가? 살필 때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먼저 선교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선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렵던 시절, 미국선교사가 와서 초코렛주고 밀가루주면서 선교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학교세우고 병원세워서 선교했습니다. 심지어 건강한 사회운동, 민주화 통일운동, 새마음 새마을 운동, 도덕재무장 운동도 하나의 선교입니다. 태권도 선교, 컴퓨터 선교, 영어선교, 영화선교, 빈민선교, 의료선교도 선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태권도 가르치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영어를 가르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선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선교든지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없는 선교는 성경적 선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말해야 선교요 그 예수님을 선포해야 선교입니다.
22절-23절 보실까요? 고전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십자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기적을 믿는 민족입니다. 유대인이 믿는 메시아는 좀처럼 죽지 않는 전쟁용사입니다. 마치 다윗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니 어떻게 죽은 메시아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거리낀다”는 말은 길가에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돌뿌리같은 것이라고 것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싶은 데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니 안믿어 집니다. 차라리 십자가가 없었으면 믿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메시아를 어떻게 믿습니까?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알다싶이 헬라인들은 철학하는 백성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 헬라인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철학”은 “필로소피아”는 곧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논리적인 것입니다. 합리적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유없이 스스로 죽지 않습니다. 헬라인이 믿었던 제우스신도 불사의 신으로 올림푸스 산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와서 말하기를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사람으로 내려와 종이 되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말입니까? 무식한 사람도 스스로 죽지 않는 데 하나님이 스스로 죽다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헬라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헬라어로 “모리아” 곧 “웃기는 이야기, 코미디”라는 것입니다. “정신나간 짓”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나 선교의 어려움은 이 어리석은 십자가, 이해가 안되고 논리적이지 않은 십자가, 합리적인 현대인에게 터무니없이 들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이야기에 관심도 없고 또 잘 이해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쉬운 이야기를 좀더 수준높은 것으로 만들어 어렵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렵게 말하면 듣기는 그럴싸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일 어려운 말이 신학자들의 말이랍니다. 그래서 중세시대에 아무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답니다. 마침 교회가 어떤 교리를 획정하기 위해 그 신학자를 모시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후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 둘 강의실을 빠져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석자들이 “우리 이러지 말고 기도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자” 했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데 한참 있다가 누가 뛰어 나옵니다. 보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하나님, 왜 나오십니까?” 했더니 하나님이 말하더랍니다. “아까 강의할 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니 기도를 들어보니까 더 모르겠다”. 하시더랍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말로 말하는 것이 수준높은 선교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말로 설교하는 것이 좋은 설교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말로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 아닙니다. 언제나 진리는 쉽고 아무나 들어도 이해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23절 다시 보세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물질을 주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래전에 한 목사님이 빈민선교를 시작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어 살려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미국으로부터 밀가루나 강냉이나 그리고 구호물자 등을 가져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중에 항상 몸이 아파 골골하면서도 술만 먹으면 아내를 패는 못된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목사님이 지나가다 보니 술에 취해 거리에 누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사람을 들춰엎고 병원으로 데려가 자비로 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쌀과 구호물자를 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두운 밤인데 갑자기 누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문을 두드립니다. 누군가 하고 보았더니 목사님이 살려 준 남자의 부인입니다. 그 부인은 문이 열자 마자 고래 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목사님, 어쩌자구 그런 불한당같은 놈을 살려주어 나를 이렇게 패게 만듭니까? 그 놈이 아플 때는 빌빌 거리고 누어서 나를 때리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그 놈을 고쳐주어서 허구헌날 나를 이렇게 패니 살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책임이고 보상하든지 아니면 그 놈을 다시 아프게 내버려두든지 하십시오”. 그때 목사님에게 깨달았답니다. “아,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구나”.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쌀을 줄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영어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영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교는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면 몸은 살리지만 영혼은 살리지 못합니다. 영어를 배워 줄 수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 주지 않으면 그 영어가 그를 살리지 못합니다. 선교는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예수님을 말해야 선교요 예수님을 주어야 살아납니다. 일본 동경 빈민가에 한 청년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훗날 일본의 성자라고 불리운 하천풍언이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한 선교사가 그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말렸습니다. “당신이 지금 그에게 가보아야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거요.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고기와 약이요”. 그러나 선교사는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누어있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를 믿으면 그가 당신을 살립니다”. 놀랍게도 그 청년은 소생했고 그 뒤 일본 제일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그가 쓴 책이 있습니다. “폐결핵보다 무서운 예수의 사랑”. 그를 변화시킨 것은 약이나 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을 기억합니까?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앉은뱅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은이요 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당장 필요한 것을 주지 않고 영원히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나사렛 예수가 선포되는 순간, 앉은뱅이는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반대입니다. 은과 금은 많은 데 나사렛 예수가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없으니까 있는 것, 은과 금만 주려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구제한 것 사실입니다. 우리도 가난한 세상에 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빵이 예수님 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예수님없이 빵을 주면 줘도 예수님 떠나도 안줘도 예수님 떠납니다. 예수님 없이 몸을 고치면 고쳐도 예수님 떠나고 안고쳐도 예수님 떠납니다. 예수님없는 성공을 가르치면 성공해도 예수님 떠나고 실패해도 예수님 떠납니다. 영원히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다시 23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를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십자가의 방법으로 선교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선교라면 그 방법도 십자가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선교의 내용이라면 또한 선교의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세상을 자기를 못박은 곳입니다. 선교의 메시지가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라면 선교의 방법도 예수님처럼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 십자가가 아닙니다. 엡2:14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다같이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자기 육체를 폐해야 십자가입니다. 자기는 살고 남을 죽여서는 절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 방법도 어리석은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 지혜로운 방법으로는 남을 살릴 수 없습니다. 몇 년전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의 지도자 야신을 죽였습니다. 이 사람은 팔레스틴에서 가장 극렬할 테러조직인 “하마스”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수상이 이 사람이 죽자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야신의 죽음은 이 땅에 커다란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같은 날 “하마스”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목숨바친 야신을 따라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평화입니까? 이스라엘은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를 죽인 것을 평화라고 말하고 팔레스틴은 자기 지도자를 죽인 이스라엘을 타도하는 것이 평화하고 말합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몇 년전에 발칸 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코소보에 사는 200만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유고 연방이 학살했다고 해서 나토가 공격했습니다. 유고는 유고대로 슬라브 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알바니아 쫓아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나토는 나토대로 선량한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고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평화입니까? 미국은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에 대하여 경제제재를 가하고 북한의 열악한 인권문제를 파헤치는 것이 평화라고 말합니다. 북한은 생존경쟁을 위해서 대포동 2호라도 쏘는 것이 평화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평화입니까?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남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의 평화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죄없는 자신을 죄인을 위해 죽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는 복음의 메시지이지면서 동시에 우리가 사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산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살아야 우리도 남을 살립니다. 선교는 내용도 방법도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애틀리 선교사 이야기를 저는 좋아합니다. 지금부터 약 100년전에 애틀리 선교사는 아프리카 밀림 지역에 선교하러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토인들이 무슨 일로 그에게 항의하러 왔다가 뜻이 이루지 못하자 나무창으로 그를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를 찔러 죽였습니다. 니중에 보니까 선교사의 호주머니에 45구경 권총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6발의 총알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려고만 했다면 총으로 토인들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있었으나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토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후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살린 십자가의 선교의 결과 태어났습니다.
이번에 오신 스티브 세인트선교사님의 영화 “창끝”에도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스트브의 아버지를 포함한 5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의 밀림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아우카족에게 둘러 쌓였습니다. 갑자기 그들이 달려와 창으로 선교사들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 선교사가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만일 그 총을 아우카족에게 겨눴다면 원주민은 죽고 자신들은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일 수 있는 원주민들은 죽이지 않고 자신들이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부아 비아 우능부아”. “당신들은 내 친구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선교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 방식대로 말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이번 주가 6.25주간입니다만, 6.25가 올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준경전도사님. 그는 1891년 전라남도 신안앞바다에서 태어났습니다. 때가 되어 시집을 갔으나 남편은 사랑은 커녕 아내를 구박하고 급기야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만삭이었습니다. 태산같은 배를 하고 안방에 누어 있는 젊은 소실을 위해 문준경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 방에 불을 지펴주었습니다. 추우면 유산된다고 자기 방에 불은 안넣고 소실의 방에 불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자 자기가 직접 받았습니다. 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성봉 목사님께 은혜받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문준경은 어차피 남편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하늘의 은혜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매일 전도하러 뛰어 다녔습니다. 자나깨나 전도하여 중도란 섬에만 10개의 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에 10개를 더 세워 모두 20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6.25가 났습니다. 공산당이 쳐들어와 예수믿는 사람들을 다 체포했습니다. 모두 48명을 붙잡아 바닷가로 끌고 갔습니다. 하나씩 무자비하게 죽이는 데 문준경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전도했다고 “늙은 씨암탉”이라고 불렀습니다. 늙은 씨암탉은 몽둥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며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와중에도 문 전도사는 평소에 딸처럼 사랑했던 백정희 전도사와 교인들은 해치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공산당은 한 명이 결국 총을 쏴 문준경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죽을 때 그의 입에서 “주여,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렸던 여종, 문준경 때문에 후에 신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전도와 헌신으로 섬 사람의 99%가 예수믿고 그 뿌리에서 김준곤, 정태기, 이만신같은 위대한 주의 종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신안 앞바다는 성지가 되고 문준경은 십자가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선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하되 그것도 십자가의 방식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거의 대부분, 십자가로 선교했습니다. 1886년, 토마스목사,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외치다가 27세의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1885년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 한국에서 결혼하자마자 신혼여행을 반납하고 함경도로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아펜젤라는 44세때 목포에서 배타고 가다 물에 빠지는 한 소녀를 구하다 죽었습니다. 죤 해론,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5년만에 만 33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실을 만든 윌리암 제임스 홀, 평양에서 35살의 나이로 죽어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로 산 사람들, 그들이 선교입니다.
십자가로 살면 선교적 삶입니다.
보통 선교하면 외국에 나가서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외국에 나가야 선교하는 것 아닙니다. 외국에 안 나가도 선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선교하는 사람이 있고 선교사적인 삶을 삶으로 선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십자가를 선포하면 선교사입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십자가 방식대로 살면 선교사적 삶입니다. 선교사적 삶은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선교사적 삶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됩니다.
한 초등학교 교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감은 교장으로 승진할 때만 되면 늘 이런 저런 핑계로 남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의 후배가 먼저 교장이 되었습니다. 하도 양보하니까 교육청에서 알고 반강제로 교장발령을 냈습니다. 제가 일했던 시골교회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이 장로님은 교육계의 선교사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로 사는 예수님 닮은 선교적 삶을 사셨습니다. 어느 교회 성가대에서 한 집사님이 구석에만 앉습니다. 대장이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왜 구석만 좋아합니까? 거기는 강단도 잘 보이지 않지 않아요?”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아무도 안 앉으려는 곳에 제가 앉으면 되죠”. 그 집사님은 십자가로 사는 성가대의 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의 찬양을 들으십니다.
이번에 캄보디아, 베트남 선교가는 데 한 청년이 자기는 가기도 않으면서 몇 십만원 회비를 냈습니다. 청년부 목사님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이번에 선교 안가지 않아요?” 청년이 말했습니다. “제가 못가도 혹 돈이 없어 못가는 사람에게 주고 싶어요. 꼭 찾아 주세요. 대신 무명으로 해 주세요”. 그는 선교하러 가지 않지만 십자가의 희생으로 선교하는 진짜 선교사입니다. 십자가로 사는 사람이 진짜 선교사입니다. 오늘 예배에 올라오는 데 한 성도가 저에게 작은 봉투를 쥐어 주었습니다. 작은 마트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았답니다.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짜 선교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선교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든 선교적 삶을 살든. 둘 중의 하나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살면 나가든 안나가든 선교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가 힘이 있지만 힘을 쓰지 않고 교회에서 겸손히 주차봉사할 수 있다면 그는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많은 CEO가 그 많은 돈을 아껴 매월 가난한 사람, 가난한 학생을 위해 구제하고 장학금을 내놓는다면 그는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권사님이, 집사님이 회갑, 7순, 8순에 많은 돈 들여 잔치하지 않고 그 돈을 모아 개척교회를 지원했다면 그는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외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말하고 그 예수님 방식대로 살면 선교입니다. 요즘 나온 찬양에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소망 내 안에 주만 사시는 것”. 그것이 선교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번 선교떠나시는 분들, 선교하시고, 그 마음으로 여기 남아 사는 분, 산다면 우리 모두는 다 선교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 모두의 능력이요 세상의 소망입니다.
고전1:18-25 2010.6.20(일)
선교, 십자가의 사랑으로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고전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십자가의 방법으로 선교해야 합니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십자가로 살면 선교적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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