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목사/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 (고전 1:21-31)
할렐루야~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계 계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서 퍽 비관적이고 부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너무 무력하고 무능력하며 못 나고 경쟁에 뒤쳐진 자라고 비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잘났다고 머리를 흔들어 가슴을 뻐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못나고 형편없이 버림받은 사람이고 무능력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해서 낮아진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성 프란시스(St. Francesco, 1182-1226)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나타내시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날 때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받고 생활에 변화를 경험하는데 그 비밀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선생님을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하게 사용을 하십니까?" 그러자 성 프란시스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미련한 사람을 찾았다가 성 프란시스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가 내게 머물고,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내게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통해 나의 지혜로움과 나의 능력을 나타내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력을 철저히 깨닫고 낮아진 사람들을 택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무력과 무능력으로 인해 자기에 대해 비관적이고 부정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얼 하느냐. 나는 너무나 무능하고 교육도 없고 인물도 잘나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인데 내가 뭘 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랑하고 높아지고 거만한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부름 받은 우리의 처지
우리 각 사람이 받은 처지를 성경은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내 처지를 한번 살펴보라.
내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이 택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많아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아이큐가 높아서 칭찬을 받고 하나님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택해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아요? 가만히 자기를 생각해 보아도 바보 같습니다. 저는 50년 목회를 했지만 돌이켜 보면 바보 같아요. 왜 이 바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택했을까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게 지혜 없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불러서 택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 능한 자가 많지 않습니다.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있지만 그러나 권력의 상층부에 앉아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 이 세상에 유능한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고 택한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능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깨어지고 무릎을 꿇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택한 사람을 보면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습니다. 가문이 좋고, 온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해서 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문도 없고 문벌도 없고 초가삼간 쓰러져 가는 시골농부의 자녀들이라도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택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명성과 재물을 가진 가문에서 안 태어났다고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쓰러져가는 판자촌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잘 못 받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척도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를 찾지 아니하고 육체를 따라 능력 많은 자를 찾지 아니하고 육체를 따라 문벌 좋은 자를 찾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온 교회를 벽돌로 건축하고 아름다운 치장을 해놓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 이것 내집 삼겠다.” 들어오지 않습니다. 천막을 쳐도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그 자리에 하나님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과 의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니까 내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옷을 입고 나가면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여기실 것이라. 아닙니다. 헐벗을지라도 중심이 깨어지고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우리의 처지를 살펴보고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복음 전파의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멀리하고, 가난하고 병 들고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 무척 애를 먹은 것은 잘 사는 동네에 가서 예수를 전하면 안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에 취해 있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귀뚱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게 가난하고 병들고 못나고 실직자로 빈손 든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헐벗고 힘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선교사들이 가져다주는 구호물자, 옷 보따리가 교회에 오면 잔치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날은 교회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가 되어서 성도들은 제비를 뽑아서 물건을 나누어 가고 좋아하곤 했습니다. 또한 가난하고 무식하여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교회는 사람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공부를 시켜주는 "성경구락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성경구락부가 교회에 없지만 옛날에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대게 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래서 성경구락부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51년 전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저희 교회에 나온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배우지 못하고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나 문벌이 좋은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지혜롭지 못하고 문벌 좋지 못하다고 탄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 없습니다.
저는 천막 교회 개척을 할 때 버스비가 없어서 대조동에서 서울시내 나올 때도 걸어서 나오고 돌아갈 때도 걸어서 돌아 갔습니다. 옷도 걱정할 것 없어요. 한 벌만 가지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대로 입습니다. 두벌 갈아입을 옷이 없었습니다. 내복도 한 벌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 다 자는 밤중에 빨래해서 말리지 사람이 있는 데는 빨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뚫어진 천막에 가마니를 깔고 있었는데, 그래도 내가 하나 생각할 때 무엇이든지 있으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좌우간 누가 나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빵을 주든지 쌀을 주든지 돈을 주시든지 무엇이든지 주면 그것을 떼서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 드리기를 좋아했고, 이웃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것이 저의 성격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51년의 목회생활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왜, 벗은 자라야 입힐 수가 있고 빈그릇이어야 채울 수가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꾸 벗어버리고 자꾸 빈그릇으로 만드니까 하나님이 점점 많이 채워 주시고 그릇을 크게 할수록 더 많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생활을 통해 경험하고 배워서 잘 압니다. 현재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세상 권력도 없지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심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복으로 채워 주셔서 못 배워도 그 사람을 사용해서 크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지해도 그 사람을 사용해서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그 사람을 사용해서 큰일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세상을 이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어디에 가나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이기지 못하고 말재가 되고 형편없는 사람이 된 일이 없습니다. 빈 그릇은 하나님이 채우시고 벗은 자는 입히셔서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느 곳에 가는데 마다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아니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게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 들어와서 큰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을 택하여서 지혜로운 자를 이기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미련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보태 주시면 하나님의 미련함이 세상의 지혜보다 낫습니다. 아주 미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하는 것 보면 똑똑한 일을 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미련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알든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아~ 나는 하버드대학을 못나왔다. 나는 예일대학을 못나왔다. 나는 서울대학도 못나왔다. 고려대학도 못나왔다. 나는 야간고등학교 밖에 못나왔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 이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천만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모시면 천국대학을 나온 사람인 것입니다.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이 천국대학과 맞먹을 수 있습니까? 지혜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속에 계시면 어떠한 인간의 지혜로운 사람보다 더 나아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하나님은 택하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큰일을 이루시고 사람들마다 “아~ 저것은 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축복해 주면 “이것은 내가 했다. 내가 지혜롭고 총명하기 때문에 내 능력과 내 능력으로 이 일을 했다.” 자랑할 것입니다. 세상 지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해 놓으면 사람들이 “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저 사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은 지혜없는 자라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로 25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세상에 지혜 있고 총명하던 사람 예수를 반대하고 비난하다가 죽어서 지옥에 들어앉아 불타는 곳에 괴로워 할 때 이 세상에 미련하고 보잘 것 없어도 교회 열심히 나가고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보니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살고 있다. 누가 결과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보십시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자 뿐 아니라 관리요, 권력도 있고 해서 밤낮 연락하고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그 대문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고 온몸이 헌데를 알아 개들이 같이 있으매 핥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좋은 방에서 좋은 옷을 입고 영화롭게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문밖에 있는 거지 나사로는 맨땅위에서 쪼그라져 살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었습니다. 부자는 지혜가 없고 거지 나사로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곧 세월이 지나가니까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는데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나사로는 낙원에서 행복하고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까? 나사로가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사람은 일의 끝을 보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다고 해서 끝까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잘 산다고 해서 끝까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끝이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끝이 나쁘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끝까지 붙들어서 끝을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영화로움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어떠한 괴로움과 고통이 다가와도 세상을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소독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지프 리스토(Josepae Lister) 는 인체 수술이 시작된 19세기에 수술환자의 90%가 수술을 받으면 죽었습니다. 그때는 세균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쓴 칼을 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쓰고 그 피 묻은 칼을 또 다른 사람에게 쓰고 세균을 전달시켜서 수술을 받았다면 90%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조지프 리스토라는 의사는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환자들이 수술만 받으면 죽는데 살리려고 한 수술이 왜 사람을 죽입니까?” 그러니까 마음속에 조용한 지혜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사람아 칼에 세균이 붙어 있어서 병을 옮기는 수단이 된다. 칼을 소독해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조지프는 수술하기 전에 불에다가 칼을 소독시켰습니다. 활활 붓는 불에 칼을 집어넣어서 칼을 소독시키고 난 다음 수술했는데 조지프가 수술한 사람은 80%가 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술을 할 때 반드시 수술칼을 소독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증명을 했는데 먼저 그것을 알려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산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도우심을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깨우쳐 주시므로 일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과 지혜는 틀립니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우면 지식을 얻어요. 그러나 공부는 못해도 문제의 해결을 잘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이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문제를 쉽게 쉽게 해결합니다. 지식이 있으면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고 지식적인 말을 하고 지식적인 일을 하지만 지식이 지혜보다 못합니다. 인류대학을 나온 사람보다도 학교를 공부 못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훨씬 일을 잘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공부해서 얻지만 지혜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든지 안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 안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펴볼 때 어느 나라 민족이 잘삽니까? 예수 믿는 민족이 다 잘삽니다. 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일을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민족이 잘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육을 시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는 지혜가 없으니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해서 강한 자를 멸한다고 한 것입니다. 약한 자를 택해 가지고서 강한 자를 멸한다. 강한 자가 큰일을 하는 것은 “힘이 있으니까 잘했구나. 그 사람이 했다.”고 하지만 약한 자가 큰 일을 하면 “저것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고 하나님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한 자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랑하고 교만하고 약한 자를 사용하시면 자기 자랑을 안합니다. 약한자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9절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앞에 아무 육체도 자랑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자랑하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하고서 고개를 흔들어 제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침을 탁 뱉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 택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나는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놈이니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느냐.” 천만에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올바르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골리앗과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은 구척 장신의 큰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대적해 나오는 다윗은 초립동이었습니다. 15,6살 정도밖에 안되는 소년 목동이었습니다. 소년 목동인 다윗이 대장군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갈 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그 군대들은 골리앗만 나오면 기절초풍을 하고 다 숨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가슴을 펴고 나와서 “뭐 저놈을 두려워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할례 받은 백성으로써 하나님이 같이 계신데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골리앗이 다윗을 찾으려고 살펴보니 안 보이거든 굉장한 작물이 나오는줄 알고 살펴보니 안보이니 어디 있는지 보니까 요밑에 조그만한 애가 하나 걸어나오거든.. 무장도 안하고 반바지에 손에다가 물멧돌 들고서 지팡이 하나 들고 나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야 이놈아, 네가 나를 개 인줄 알고 지팡이 들고 나오느냐? 내가 오늘 너를 죽여 공중의 새와 땅에 있는 짐승의 고기로 만들어 주겠다.” 다윗이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약한 다윗 플러스 강한 하나님 하니까 말할 수 없이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물멧돌 한방에 골리앗이 거꾸러져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약하다고 해서 얕보지 마십시오.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약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약한 사람 속에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천지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를 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을 사용하기를 원하는데 바울은 너무 강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최고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최고 학부인 가브리엘 문화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 교인 중에 바리새 교인이었습니다. 열렬한 청년이었습니다. 너무나 잘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쓰고 싶었지만 그대로는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서 거꾸러 뜨리게 하시고 장님을 만드시고 나중에 보면 장님을 고쳐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난 다음에 바울에게 무엇을 하시느냐.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보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의 가시가 되어서 자기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평생 선교여행을 하면서 몹시 괴로워하고 고통했습니다. 하나님께 이것이 없어져 달라고 세 번 기도해도 응답 안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10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께 의지하지요. 강하면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혈기왕성하고 만사가 형통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약하고 병들게 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해요. 그냥 있을 수가 없으니까 “아이구 하나님 날 살려 주십시오. 날 도와 주십시오.” 기도 안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쓰러지지 않고 설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행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병들어서 드러눕지 않고 걸어 다니게 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가르칠 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기절하지 않게 정신을 올바르게 차리게 해 주시옵소서.”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줄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속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잘한다.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죽어야 하나님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치셔서 늘 약하게 만들어서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담대해야 되느냐.
3. 믿는 자의 신분
우리 신분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장 30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 힘으로 믿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 안에 있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의도순복음교회 4부예배 나와 계시니 내가 예수를 믿고 싶어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예수 보셨습니까? 예수님이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악수라도 한번 했습니까? 예수님 향기라도 한번 맡았습니까?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한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속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창세전에 우리를 택했습니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여러분이 어머니 뱃속에 생겨나기 전에 아득한 옛날에 그때 벌써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택하셨다. 하나님이 조용기를 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이름을 말하고 택했다고 말하십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택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누가 넘어뜨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누가 넘어뜨리고 빼앗아 갈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아주 감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왜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택하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기쁘신 뜻대로 예정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입어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형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24시간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은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 포켓에 넣어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사이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남자들은 포켓에 넣고 여자들은 핸드백에 넣어서 늘 필요하므로 가지고 다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듯이 여러분을 가지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켓에 넣어가지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의 큰 기선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전쟁 중에 중대한 임무를 띠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가 가는 뱃길에 독일의 군함들이 처처에 지키고 있었습니다. 큰 위험이 따랐습니다. 영국 기선은 출발하기 전에 위에서 오는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상부에서는 "무조건 앞으로만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는 무전으로 연락하고 지시를 받지 절대로 선장 마음대로 앞으로 가든지 뒤로 가든지 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국 기선은 미국을 향해 대서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는데 며칠 뒤에 적군의 함대가 가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무전을 쳤습니다. "적군이 가까이 있음 어떻게 할까요?" 그러니 대답이 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하고 항해를 계속하라." 항해사들은 얼굴에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러나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불안하지만 계속해서 미국으로 미국으로 향해 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미국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선장이 갑판 위로 올라와서 땀을 닦고 후유~ 큰 숨을 내쉬니까 자기 옆에 뭐가 시커먼게 쑥하고 올라옵니다. 깜짝 놀라 보니까 영국의 잠수함이 늘 곁에 따라 왔어요. 기선이 오는데 잠수함에 곁에 붙어서 바짝 물속에서 따라왔기 때문에 상부에서는 염려하지 말고 나가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그 잠수함을 못 보았습니다. 늘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며 왔지만 태평양, 대서양 내내 잠수함은 그 기선 옆에 물속에서 따라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안보이지만 여러분 뒤에 숨어서 늘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 내가 겨우 이 시련과 환난을 이겼다.”하며 땀을 닦으면 하나님 웃으십니다. “내가 따라오면서 도와주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이겼겠느냐.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요,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같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포켓 안에 예수님의 손 안에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을 얕잡아 볼 수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 없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지혜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지혜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나의 지혜인 것입니다. 나는 지혜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할 때 예수님은 나의 지혜가 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2절로 3절에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예수님 안에는 온 우주의 지혜와 지식이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다 지혜로운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지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지혜의 예수님이 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나에게 지혜가 되셨다.
에베소서 1장 8절에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또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 있어요? 태어났으니까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가 돈 만원 줄테니까.. 한 사람도 없네. 돈 억만금을 준다 해도 죄를 한 번도 안 짓고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우리 일생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다 청산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이래나 저래나 예수 덕분에 죄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에 1조원의 빚을 졌다면 일생에 1조원의 빚을 못 갚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와서 1조원의 빚을 갚아 주었으므로 이제 나는 빚이 없습니다. 빚은 내가졌지만 갚기는 예수님이 갚았으니까 예수님이 갚아 주었으니까 내가 갚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아 버린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지을 죄를 예수님이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행위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으므로 의인처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의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란 죄를 한번도 안지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것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돼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구나 우리가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온 전력을 기울여 주의 피를 의지합니다. 주의 피를 의지합니다. 주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하면 주의 보혈이 여러분을 붙잡고 나가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혈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섭니까? 보혈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 주님의 보혈 주님의 보혈 보혈의 잔 마시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거룩한 제사같이
흐르고 있네 흐르고 있네 귀하신 주 보혈 기쁨으로써 노래부르며 영원히 마시겠네 ♬
보혈을 영원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혈을 마시는 않는 사람은 보혈을 마시는 사람하고 얼마나 틀립니까? 보혈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죄의 빚을 벗어 버린 사람으로 하나님께 마음대로 나갈 수가 있지만 보혈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죄덩어리이므로 자기 죄를 책임지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보혈을 흘려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이 없어요. 우리는 다 더럽지 않습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들어올 때 목욕 안하고 온 몸에 때 냄새가 나고 기름 냄새가 나면 더럽지 않습니까? 더러운 것이 깨끗이 씻으면 깨끗한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 여러분 생각이 더럽고 말이 더럽고 행동이 더럽고 삶이 더럽습니다.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더러운 것을 단번에 다 씻어 버렸기 때문에 예수 이름만 부르면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보혈과 하나님 성령의 씻음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는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더럽지 않고 추하지 않고 깨끗하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는 은총이 얼마나 큽니까? 마지막으로 주님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이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그 보고 “당신 훌륭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물이 잘난 사람이다. 옷도 잘 입고 맵시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보고서 위대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인물이었다. 크나큰 좋은 일을 하셨다. 그 칭찬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이 죽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영원히 살 수 있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기억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 30절로 31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럼 구원받은 사람이요.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찾아서 산과 들로 다닐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와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혜 아닙니까? 우리는 만세전에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아서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하나님 만들어 주셨고 예수님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우리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 팔자가 느러진 것입니다.
<결론>
제가 뉴욕에서 집회할 때 유명한 신문사 기자가 와서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세계적인 주의 종이니까 한가지 묻겠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와~ 거창스러운 질문을 하는데 기가 막히더라구요. 당장 그 말이 신문기사에 쫙 나갈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지혜가 없으니까 주님께 물었습니다. 속으로.. “주님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래서 주님이 지혜를 주세요. “인생이 뭐라고요? 밥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기자가 배를 안고 웃더라구요. 밥 먹고 사는거라. 안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인생이란 뭡니까 여러분? 밥 먹고 사는거지.. 어떤 사람은 잘 먹고 어떤 사람은 잘 못먹고.. 그것 다르지. 밥 먹고 살다가 결국은 죽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통해서 보십시오. 위대한 훌륭한 사람 다 밥 먹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허허허. 오직 다른 것은 예수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밥 먹고 살다가 죽었어도 끝장이 좋고 예수 안 믿은 사람은 밥 먹고 살다가 죽어서 끝장이 좋지 않고 그 둘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인생이 가는 길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천당길, 지옥길 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예비 인생인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영원히 사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모셨으므로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인생을 자랑하나 이 세상도 인생도 다 추풍낙엽입니다. 세월이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8월달이 벌써 다 갔어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가서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젊음도 늙음도 없이 다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로써 영원히 영화롭게 살 것이니 걱정할 것 무엇입니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예수님께 맡기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소망차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입니다. “아이 나 같이 천한 사람...” 주님은 나 같은 천한 죄인을 살리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살면 돼요. 세상에서 못나고 천하고 멸시받고 못 산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잠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고 구원받고 지혜로운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감추었으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보배가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큰 축복이요, 거대한 보배라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를 만세전에 택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하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로움과 지혜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게 만들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일을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감사하고 찬미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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