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오직 선교의 사람들? 모라비안(Moravian) (단 12;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8. 19. 08:51

오직 선교의 사람들? 모라비안(Moravian) (단 12;3)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 주시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모라비안 공동체입니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오직 선교 공동체”였습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이 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선교의 사람, 선교의 교회,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등장은 선교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획기적인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18세기 유럽 교회는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과거 찬란한 기독교 문명속에 거대한 교회 건물은 관광지가 되어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때에 모라비안 교회는 어둠 속에 비치는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모라비안에 의하여 전 세계 복음화의 불이 활화산처럼 타올랐습니다.

오대양 육대주 곳곳마다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음 지진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모라비안 교회의 역사적 배경

모라비안 교회가 탄생될 때의 배경은 복잡합니다.


1. 정치적인 배경

종교 개혁이 1517년 시작되었습니다. 200년 정도 지나고 나니 식어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드디어 긴장이 전쟁으로 비화되었습니다. 30년 전쟁의 뿌리가 그것입니다.

독일의 루돌프 황제가 개신교에게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그 후 카톨릭 페르디난드 황제가 즉위한 후 개신교를 박해하였습니다.

30년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유럽 인구의 1/2이 감소하였습니다. 목사 620명이 죽었습니다. 교육, 정치, 문화가 퇴보하였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분열이었습니다.

도덕적, 경제적인 면에서는 파괴적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절대 사상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s)"의 고백이 낡은 구호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 문화, 사회 모두가 어디에서부터 치료하여야 할지 모르는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2. 경건주의 운동

캄캄할수록 별은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가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것이 경건주의(Pietism)란 이름으로 루터교에서부터 일어 났습니다.

슈페너의 "경건의 소원(Pia Desideria)"이라는 서문을 1675년에 출판하면서 경건주의라는 말이 쓰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의 핵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보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거룩한 삶입니다.


3. 모라비안 교도의 등장

모라비안의 뿌리는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30년 전쟁 이후에 카토릭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모라비아, 보헤미아로부터 독일로 피난 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장 후스를 중심으로 믿음을 지키려는 형제단(The United Brethren)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망온 곳은 진젠돌프 백작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진젠돌프는 자기 영토 내에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망대)라는 피난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진젠돌프는 그 곳에 교회를 세워주었습니다. 1727년 8월 13일 모라비안 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라비안주의(Moravianism)가 잉태되었습니다.


형제단의 생활은 그 동안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던 상태였습니다. 오랫동안 핍박으로 도망다니며 지쳐 있던 중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였습니다. 한참만에 가져보는 평안함이었습니다. 이들은 1467년부터 모진 핍박을 받았던 이들입니다.

카토릭을 반대하고 자체 목사를 세웠습니다. 카토릭과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명목으로 오랫 동안 재산 몰수, 감옥, 고문, 화형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속에서 살아 온 이들이 형제단입니다.

이 때부터 300여년 동안 형제회는 오히려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갔습니다.

견디다 못 하여 3만 6천여 가정이 보헤미아를 떠나 삭소니(Saxony), 살레지아, 브란데버그, 폴란드, 헝가리, 네델란드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보헤미아에 복음의 씨를 없애지 마옵소서.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씨를 남겨 주십시오."

이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다.

1722년 크리스찬 데이빗이란 목수가 중심이 되어 형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믿음의 가족들이 되었습니다. 데이빗이 앞장서서 한 가정교사의 소개로 진젠돌프(Zinzendorf)백작의 영지인 베를셀스도르프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망대'란 헤른후르트를 지었습니다. 그 곳에서 200년 가량 세계 선교본부센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쓰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진젠돌프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 지 진젠돌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진젠돌프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그의 마음을 불붙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 가득 채워져 있던 중에 형제단을 만났습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한가지 열정이 있다면, 그 것은 예수님이시다, 바로 오직 예수이시다.'

(I have only one passion, and that is Christ)


그에게 이러한 열정을 갖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경건주의 창시자였던 슈페너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10세때 프랑케가 설립한 페다기움에서 공부하였던 중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선교사들의 해외선교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기도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1722년 결혼하였습니다. 신혼여행을 즐겁게 하고 돌아와보니 모라비안교도들이 크리스챤 데이빗과 함께 자기 영내에 와 있었습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생활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의 경건 생활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도 헤른후르트로 옮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흩어진 모라비안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뭉쳤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보낼 준비를 위하여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부모와 떠나 엄격한 신앙훈련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에게서 떠나 자립하도록 혹독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놓지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던 중에 첫 번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진젠돌프는 1731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덴마크의 크리스챤 4세의 대관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때 서인도에서 온 흑인(Anthony Ulrich)이 선교사를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때 또 그린랜드에서 온 에스키모인을 만났는 데 그들도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습니다. 진젠돌프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두 곳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지원자를 요청하였습니다. 토기장이 한 분이 서인도 흑인을 복음화시켜려고 헌신하였습니다. 목수 한 분도 선교사로 자원하였습니다. 모라비안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는 내적 경건에 몰두하였었는 데 이제부터는 외적 선교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헌신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진젠돌프는 자기부터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모든 재능과 시간과 전체를 주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공직을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루터교인이었습니다. 루터교회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터교회의 예배에 함께 하였습니다. 루터교회는 진젠도르프가 이끄는 형제단을 교회 내의 특수한 단체로 인정하고 허락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 "자기를 위하여 생을 준 분을 위하여 살고, 다른 사람을 예수에게 인도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윗덴벨그에서 공부하던시절 기독인의 단체라는 것을 조직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세계를 변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다시 "겨자씨의 제도"(Order fo the Mustard Seed)라는 단체로 개명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드레스덴 법원에서 상담역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매 주일 오후 공중집회를 가졌습니다. 모인 기독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도록 하라.”

그는 벧셀돌프에서 매일저녁 묵상을 하였습니다.

주일 날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을 포함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네 형제의 동맹(Alliance of the Four Brothers)'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목사였고, 한 사람은 젊은 친구였습니다. 그룹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서신으로, 책을 분배함으로, 개인접촉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 받은 바의 축복을 나누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은혜적인 활동을 보이게끔 함이 그의 운동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회원들은 모두 방문을 통하여 우의를 서로 나누는 데 힘썼습니다.

모라비안의 단체는 그들을 이끄는 두 가지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원들이 하나로 묶음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투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의 지도이념은 모든 단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선교사업을 실천하였습니다.

1732년 암스텔담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그 후 24년간 유럽, 미국을 통하여 선교사업을 지휘하였습니다. 만년에 그는 발틱 국가에 가서 한 달 동안 설교하였습니다.

1738년에는 베를린 창고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41년에는 제네바에서 전도하였습니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게 각계 각층에 미쳤습니다.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이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는 성직자와 교인간의 장벽의 담을 헐어버렸습니다. 평신도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제도적인 교회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향을 강화하였습니다.


모라비안 교도의 삶의 원칙

모라비안교도들의 생활은 형제단과 진젠돌프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양자 관계속에서 모라비안 정신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의 삶과 생활은 모라비안의 생활신조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원칙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은 이웃과 관계를 말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까지 친절하고 사랑을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구원받도록 도와 주자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

한 마디로 이웃을 섬기자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

헤른후트에서 일어난 놀라운 오순절적 성령 체험이 영국에서도 일어나기를 진젠도르프와 그의 동료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텔츠만(Johann Toltschmann)과 다른 두 사람이 진젤돌프의 서한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편지는 헤른후트의 경험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옥스포드대학 "기독교 지식 촉진회"(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와 죠지Ⅰ세의 궁정목사에게와 리프(Schoumberg Lippe)라는 왕후를 시중드는 백작의 직책을 가진 여성도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백작의 반응은 적극적이었습니다.

궁정목사는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편지는 왕실에게도, 옥스퍼드 대학에도 전달되지 못하였습니다. 진젠도르프의 첫번째 시도는 그 처럼 결과가 만족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735년 봅 틸칙(Toltschig)이 인도하는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미국 죠지아로 가던 중 영국 런던에 들렀습니다. 그들은 미국으로 가는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도 동승을 하였습니다.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연한 만남인 것 같지만 그를 통하여 역사 하여 주십니다. 웨슬레는 그 후 모라비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개월이란 긴 항해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였습니다.


모라비안은 웨슬레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한 웨슬레는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 설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선교에 대한 헌신 업적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까지 세계 14개국에 3,00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뜨거운 선교 열정으로 19세기에는 15개의 선교기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개척한 6 대륙의 사역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서인도 제도 선교

서인도 제도의 개척은 레오나드 도버라는 토기장이와 데이비 니치만이라는 목수의 자원에 의하여 173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인도는 사탕수수와 코코아 농장 경작지였습니다. 매년 10만명의 노예를 수입해 와야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이들이 선교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이 크리스챤이 되면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종들은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노예와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희생적인 사랑은 흑인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선교를 시작하자 말자 17만 노예중에 2천명이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1879년 41개 지부, 78명 선교사, 36,698명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1876년에는 흑인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2. 남아메리카 수리남 선교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헌신은 남아메리카에서도 빛났습니다. 인디언 855명, 59명의 부쉬 니그로, 그리고 731명의 노예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이런 말이 돌았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야만인들도 구원받게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점점 사역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3. 그린랜드 선교

평신도 선교사 크리스챤 데이빗을 지도자로 해서 세 명의 개척자가 에스키모인들에게로 갔습니다. 1881년까지 1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순교로 1545명의 에스키모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4. 아프리카 선교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는 1736년에 모라비안 죠지 슈미트 선교사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지식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불요불굴의 용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헤른후트로부터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7일만에 네델란드를 거쳐 선교지인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갔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보내셨으므로 어떤 악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목숨을 건 사역속에 1882년 동부와 서부 지역에만 25개 학교와 250명 학자, 14개 지부, 11,704명의 세례교인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5. 호주 선교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호주 원주민들에게도 다가갔습니다. 아프리가 흑인들 보다 미개하다고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선교사는 라마훅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발가벗고 사는 이들에게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곡식을 경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병 병원도 만들어 호주인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복음화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하시려고 할 때에 가장 먼저 주시는 것이 기도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지 않고 기도를 쓰십니다. 하나님은 진젠돌프로 하여금 100년 기도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진젠돌프 백작은 헤르후트 마을에서 가까운 곳인 베르톨즈도르프(Bertholsdorf)에 있는 루터 교회로 모두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찬 예배를 드렸습니다.

1727년 8월 13일이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성전을 가득 메웠습니다. 진젠돌프가 강단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할 때에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예배에서 기적과 표적으로 파문졌습니다. 분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 문을 나설 때 참석하였던 모든 이들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목과 갈등 그리고 투쟁과 혼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 서로를 향한 사랑 그리고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설교의 열정이 사람마다 불타오르며 성전을 나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예배에 임재하시고 개입하신 것을 누구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재한 경험 후 지도자들은 이제부터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지금 받은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진젠돌프 마음에 성막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불을 주시면서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레 6;9 제단의 불이 그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레 6;12 제단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레 6;13 불은 끊임없이 제단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그래서 진잰돌프를 중심으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도 빈 시간없이 기도 당번을 짜서 계속 하기로 하였습니다. 기도가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이 100년 기도의 시작입니다.

당시 유럽은 평균 5000명 성도가 한 명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안은 12명이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하였습니다. 웨슬리가 모라비안 이 모임에 왔다가 이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을 받아 감리교가 탄생되었습니다. 모라비안들이 성령을 불을 받고 100년 기도를 시작하고 11년만에 감리교가 탄생되었습니다.

모라비안이었던 웨슬리에 의하여 영국이 완전히 복음화되었습니다.

이 불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붙어 나갔습니다. 미국 헌법을 만든 이들 대부분이 모라비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세계 선교의 역사는 100년 기도실에서 퍼져 나갔습니다.


평가

모라비안 선교를 통하여 배울 것들이 있습니다.


(1) 모라비안의 선교 열정은 본국에 있는 신자와 선교사의 비율이 12:1일 정도로 대단하였습니다. 선교하는 공동체로 생활이 이루어졌습니다. 더구나 당시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5000:1이라는 비율밖에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1987년 한국의 통계는 13,600명당 1명이 선교사입니다. 헤른 후르트 지역에 인구가 600명밖에 안 되었는데도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10년만에 호주를 제외한 전 대륙을 개척하였습니다.


(2) 평신도 선교사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한 놀라운 사역이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간 선교사는 토기장이였고, 그린랜드 개척자는 묘지 관리인이였습니다. 거의 모두가 평신도 출신 선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정규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들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성이 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3) 자립 선교를 통하여 선교현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함께 삶을 살았던 자립선교였습니다.

이들은 다 한가지씩 자기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의료사업이나 교육선교사업 또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각 교회별로 선교기금을 모아 은행에 예금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자로 선교지원을 하였습니다. 선교사 파송에 많은 돈이 들지 않았기에 그들이 필요한 곳에 적절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모라비안 교도들은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 깊이 뿌리를 두었습니다. 성경 중심과 성령의 실제 사역을 경험하고 적용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형성된 영혼 구원의 열정을 실천적으로 살았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오랜 박해 생활에서 해방된 감격이 선교로 접목되면서 활화산같이 타올랐습니다.

진젠돌프와 합하여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더 하였습니다. 그러나 1760년 진젠돌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슈팡엔버그(Spangenburg) 감독이 그를 계승하였습니다. 그의 생존 때까지도 세계선교가 활발해졌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는 예전과 같이 핍박이 없어졌기에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습니다. 지도층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민주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는 아쉬움을 보였습니다. '기독교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 말을 기억나게 합니다.

현재 8000여 미전도된 종족이 있습니다.

다시 모라비안 운동이 요구되는 시기에 와 있습니다. 곧 주님이 오십니다. 전도와 선교의 골든 타임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빛나게 하셨습니다. 진젠돌프와 모라비안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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