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오직 예수의 사람들 -탁발 수도회 (히 11;23-2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8. 31. 08:08

오직 예수의 사람들 -탁발 수도회 (히 11;23-29)

 

예수님은 한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으려고 몸부림친 이들은 역사상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가장 예수님을 닮으려고 몸부림쳤던 공동체가 있습니다. 탁발수도회입니다.

수도원 전성기에 생긴 공동체가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Mendicant Orders)입니다.

수도원이 번성하였습니다. 거룩하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들이 모인 곳이 수도원이라 부자들은 이를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뒷받침하였습니다. 펑펑 쏟아 부어주었습니다. 건물을 호화롭게 지어 주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더구나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불치병 전염병에 걸리면 가족이지만 건강한 가족을 돌보는 의미에서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습니다. 쫓겨난 사람을 반기는 곳은 세상에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 속으로 쫓겨갔습니다. 눈에 뜨이는 십자가를 보며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수도원은 이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고침 받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가족으로 돌아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은 생명을 살려준 수도원에 감사표시로 상상을 초월하는 물질을 드렸습니다.

이래저래 수도원은 부유하여졌습니다.

배부르다 보니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게 은과 금은 있거니와 내게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젊은이들의 꿈은 두 가지였습니다. 법관이나 수도사였습니다. 둘 중에 하나가 세상 적인 출세의 길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법관이 되려다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더 죄를 짓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한 사람이 더 죄를 짓습니다. 아브라함과 롯도 가난할 때에는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니까 같이 살 수 없어서 헤어졌습니다.

수도원은 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하여졌습니다. 신부와 수녀 사이에 낳아서 몰래 죽인 아이 뼈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수도원 옆에는 고아원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수도사들이 낳은 불륜의 자녀들을 기르는 곳이었습니다. 수녀 복은 임신 복이었습니다. 넉넉하게 입은 것이 임신을 감추려는 의도였습니다. 많은 수녀들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 나타난 공동체가 탁발 수도회입니다.


수도원을 개혁하고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살자고 외친 무리들이 모인 모임이 탁발수도회입니다. 이들은 수도원을 없애자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맨 발로 다니며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머리를 깎았습니다.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처럼 머리를 깎았습니다. 머리를 깎았다는 말은 의미가 깊습니다.

1.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겠다는 결심의 표시입니다.

2. 집중입니다.

쓸 데 없는 데 신경을 쓰지 않고 한 곳에만 집중하겠다고 하는 각오입니다.

3. 포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포기하고 오직 영원한 것만 붙잡겠다고 의지입니다.


성경에서 탁발수도회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 모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종살이로 고역을 치룰 때였습니다. 모세 하나만 궁중에서 호화 호식하였습니다. 최고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궁중을 뛰쳐나왔습니다.

탁발수도회 당시 수도사가 되었다면 최고로 출세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곳을 뛰쳐나와 길거리에서 살면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발버둥친 탁발 수도회가 바로 모세 모습입니다.

탁발수도회의 삶과 모세의 삶은 같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히 11;23-29)


모세와 탁발 수도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 거절하고

모세는 궁중을 거절하였습니다. 작은 거절이 아니라 큰 거절이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거절하였습니다. 일부 거절이 아니라 전부 거절이었습니다.

탁발수도회는 모세처럼 거절하였습니다.

탁발수도회의 시작은 프란시스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였습니다. 작은 부자가 아니라 큰 부자였습니다. 고급 옷감을 파는 상인이었습니다. 상류층을 상대로 비싼 옷감을 팔며 부를 쌓았습니다.

프란시스가 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성 다미엔 성전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성전이 헐어졌다. 성전을 수축하라. 성전을 고치라.”

그는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습니다. 부자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아버지는 석고처럼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상점을 프란시스에게 맡기고 해외로 비싼 옷감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프란시스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돈을 빼 내어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해외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프란시스에게 돈을 물어내라고 하였습니다. 물어 줄 돈이 없었습니다. 수전노 아버지는 화가나서 아들을 대주교에게 고소하였습니다. 아들이 피고가 되고 아버지가 원고가 되어 대주교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주교가 재판하면서 판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훔쳤으면 절도죄로 3년 징역이로되, 아버지의 것을 아들이 훔쳤으니 변상하는 것으로 끝낸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얘야! 대주교님 판결대로 변상해라.”

프란시스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모든 것이 벽돌로 변했습니다. 변상할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주교 앞에서 계속 변상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성 프란시스는 법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조금 법정 문이 다시 열리고 성 프란시스가 들어왔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옷을 다 벗어 들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옷을 아버지에게 던지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전부입니다. 삐에 뜨로 삐삐에 뜨로 삐(당신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군요. 하나님이 나의 참 아버지군요.) 내가 받을 유산도 모두 다 가지세요. 나는 당신과 인연을 끊겠습니다.”

당황한 대주교가 재빨리 그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이 때부터 프란시스는 거리로 나와 탁발 수도인이 되었습니다. 거리의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거지 노릇을 하면서 성 다미엔 성전, 성 바울 성전, 성 베드로 성전 등을 건축하는 데 동참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소유를 벗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성전을 수축하라는 말이 눈에 보이는 성전을 고치라는 말인 줄 알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마음의 성전, 사람들의 성전을 고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탁발 수도회를 만들어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프란시스는 가난과 결혼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2. 바라보고

모세는 현재를 포기하고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하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궁중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애굽에서 살면서 애급을 보지 않고 가나안을 바라보았습니다. 프란시스도 성직자의 화려한 생활을 보지 않고 서민들의 아픔을 바라보았습니다.


프란시스의 제자들은 허리띠를 매고 있습니다. 세 매듭이 있습니다. 청빈, 순결, 순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프란시스 성당에는 그가 생존하여 있을 때 맸던 옷과 허리띠가 유리병에 담겨 있습니다. 청빈(淸貧)과 순결(純潔), 순명(順命)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닿고자 하는 생명의 밧줄입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서민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성경을 앗시시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기도문”을 서민들이 읽을 수 있게 썼습니다.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명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기 하시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시스가 서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후 탁발 수도회도 온통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살기 좋은 수도원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모세와 같았습니다. 모세도 궁중에서 사는 상류층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종살이하는 종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3. 참고

모세는 궁중을 거절하고 나와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마크로투미아라고 원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을 마크로투미아라고 말합니다. 불편하여도, 피곤하여도, 배고파도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더구나 자존심상하는 멸시를 당하여도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이것이 탁발수도회에 흐르는 DNA였습니다.

프란시스는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짐승들에게도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능력도 아니고 비결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마음으로 동물들을 보았습니다. 창조물 안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동물들도 이웃이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동물들을 보았습니다. 동물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프란시스 제자들에게 물어 봅니다

“프란시스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말합니다.

“프란시스는 가난한 마음을 통하여 에덴동산 때 아담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숱한 수도 끝에 가장 원초적인, 원죄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나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상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대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참고 온유함은 동물과도 하나되게 만들었습니다. 탁발 수도회 모두는 온전히 예수님을 닮아 온유하였습니다. 모세가 지면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하여진 것과 같았습니다.


4. 정하고

모세는 시내산에 6번 오르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613가지 율법을 받았습니다. 400년 동안 종살이만 하며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13가지 하나님의 율법을 정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법은 국회에서 정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법은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모세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탁발수도회는 무소유로 살기로 정하였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면서 말했습니다.

“무소유 허리띠는 하늘에 닿는 밧줄이다.”


탁발수도회에 들어가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청빈(淸貧)하기로 정하는 서원(誓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노동과 헌금으로 들어오는 물질로만 생활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당시 성직자들은 부유하였습니다.

수도사들은 물 좋고 공기 좋고 산 좋은 곳에서 호화스럽게 살았습니다. 현실도피주의자같이 살았습니다. 이에 반발한 것이 탁발 수도사들입니다. 탁발수도사들은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을 듣고 설교하였습니다. 전도와 구제사업을 하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맛보며 살았습니다. 동거동락하였습니다. 그래서 탁발수도회를 걸식(乞食)수도회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탁발 수도회의 최고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45세에 죽었습니다. 앗시시 언덕에 사형장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그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수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후에 그 곳에 성 프란시스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가장 악한 자리가 가장 거룩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사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 때였습니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 났습니다. 그는 기절하였습니다. 그의 몸에 오상(五傷)이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상처가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빨래하던 여인이 속옷을 보고 알았습니다. 죽기까지 이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통증을 느끼며 죽기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탁발 수도회 법칙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거창하지도, 난해하지도, 험난하지도 않다. 위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 닮기로 정하기

이들은 예수님을 닮기로 정하고 예수님을 닮는 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검소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초막 같은 집을 짓고 불편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 데 머리 둘 곳에 없이 사셨습니다. 이를 본 받아야 합니다.

2.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의식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삶이 예수님을 닮는 삶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 까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검소하게 입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삶입니다.

3. 절대 사랑, 절대 청빈의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삶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도 나의 자매입니다.”

“우리는 가난을 옷으로 삼고 고난을 양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4. 둘씩 짝지어 나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5. 버림받은 사람들 현장에 가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小)형제단” “앗시시의 참회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1216년에는 “겸손한 형제들”이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동정하고 품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탁발 수도사들에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마땅히 섬겨야 할 주인이었습니다. 특별히 문둥병자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문둥병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산적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이슬람교도들에게도 그리고 이단자들에게도 미쳤습니다. 사나운 이리에게도,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미쳤습니다.

굽비오라는 마을에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밤마다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였습니다. 프랜시스는 늑대를 찾아갔습니다. 늑대에게 다가가서 부드러운 눈으로 조용히 늑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늑대 형제여!”

너무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늑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프랜시스의 눈길과 늑대의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프랜시스는 몸을 굽혔습니다. 그리고 늑대의 목을 껴안았습니다. 그러자 늑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프랜시스는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닮는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6. 삶의 원칙이 분명하였습니다.

첫째는 탁발입니다. 두 번째는 전도입니다. 세 번째는 청빈이었습니다.

7.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비가 아니라 의무라고 여겼습니다.

8.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9. 매일 구걸로 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10. 소유보다 존재를 더욱 귀히 여겼습니다. 버리면 더 커지고, 내려놓으면 더 올라가게 됨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들은 재산도, 평안함도, 향락도, 상속권도 모두 버렸습니다. 이들은 한 평생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글자 그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이들은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살았습니다. 이들은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을 닮기로 정하였습니다.


5. 건넜다.

탁발 수도회는 의식주 문제를 건넜습니다. 루터도 어거스틴 탁발 수도회에 들어가서 수도하면서 종교 개혁의 힘을 받았습니다.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생활력이 강한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건너게 하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건넜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탁발 수도사들의 약점

그러나 강한 사람이 저지르기 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들과 맞지 않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극단적으로 거절하였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들의 권면을 듣지 아니하면 불태워 죽였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란 유대인과 동성연애자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은 아이를 갖지 못 하는 성욕은 죄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동성연애자들에게 권면하여 듣지 않으면 불태워 죽이는 잔인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개종을 권하여 듣지 않으면 붙잡아 죽였습니다. 참으로 엄격한 규율을 정하였고 배타적인 신앙을 철저히 가졌던 이들이었습니다.


탁발 수도회의 번영과 쇠퇴

탁발수도회를 창설한 두 명이 있습니다. 1216년 도미니코 탁발 수도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쿠스(1170-1221)와 1210년 프란시스 탁발 수도회를 창설한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1182-1226)입니다.

프란시스는 아탈리아의 앗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날에는 방탕하였습니다. 당시 서민층과 귀족층 사이에 충돌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는 서민층 편이었습니다. 그 후 페루기아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생명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는 전쟁 포로 생활을 하면서 부귀와 명예와 모든 인간 삶의 가치들이 다 무용지물임을 알았습니다. 인간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무소유 삶을 터득하였습니다.

1208년 프란시스는 마태복음 10:7-14절을 읽다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5-14)


프란시스는 사도적 청빈과 전도 생활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생기는 대로 먹기로 하였습니다. 회개와 천국의 도래(到來)를 외치기로 하였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가난한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모든 형제들에게 손으로 수고하여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삯을 받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수입중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전도와 봉사와 금욕 생활에 힘을 썼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닮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이 옷들을 모두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를 맨 땅 위에 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모든 것,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나는 여기 서 있는 형제들과 여기 없는 형제들의 죄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서 눈을 감았습니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프란시스는 지나친 금욕으로 건강을 잃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조용한 산중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가장 예수님 같은 분이었습니다.


도미니쿠스(Dominicus, 1170-1221년)가 창설한 도미니코 탁발 수도회가 있습니다. 도미니쿠스는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팔렌시아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어거스틴 교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1215년에 그의 친구가 기증한 집을 수리하여 탁발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이 것이 바로 도미니코 탁발 수도원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적 청빈 생활을 하였습니다. 은둔이 목적이었습니다. 이 곳 출신 중에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탁발 수도회는 급속도로 퍼져 나가서 순식간에 수 만 명이 되었습니다.

이 수도회는 인노센트 3세에게 정식으로 공인 받고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1221년에는 수도사의 숫자가 3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서유럽의 모든 대도시 곳곳에 탁발수도회가 세워졌습니다.

대학에서는 탁발 수도회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갈멜 수도회, 어거스틴 수도회 같은 큰 탁발수도회가 생겼습니다.

1224년에는 프란시스 제자인 클라라를 지도자로 하는 부인 수도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여자들도 청빈과 공동 생활에 힘썼습니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살았습니다.


설립자가 세상을 떠난 후 탁발 수도회는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탁발 수도회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탁발 수도회는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설립자의 뜻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엄수(嚴守)파와 규율을 약간 완화시킨 수도(修道)파로 갈라졌습니다.

나중에는 완전히 설립의지를 떠나 선교사 훈련학교로 변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럽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남으로 모로코, 동으로는 중국, 서로는 북미 남미 대륙으로까지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더 문란하여졌습니다. 명예와 재물로 얽룩진 기관으로 타락하였습니다.


클라라 탁발 수도원

오늘 날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는 클라라 수도원은 탁발 수도원에서 나왔습니다. 프란시스의 제자 클라라가 세운 탁발 수도원입니다. 그는 1193년 앗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머니의 좋은 신앙을 이어받았습니다.

프란시스의 첫 설교 사명을 받았습니다. 한 설교, 첫 번 들은 설교에서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프란시스 설교가 끝나자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저를 탁발 수도사로 세워 주십시오.”
프란시스는 즉석에서 머리를 잘라주고 수도복을 입히고 띠를 띄워주었습니다.

가족들이 달려 갔을 때에는 이미 머리를 자른 후였습니다. 그는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누구도 그의 결단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 후부터 프란시스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청빈으로 살았습니다. 죽기까지 맨발로 살았습니다.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두건을 쓰고 다녔습니다. 음식은 간단하고 검소하게 먹었습니다. 잠자리는 맨 바닥위에 요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베개는 나무토막을 사용하였습니다. 공동 침실은 추웠습니다. 식사는 하루 한끼 먹었습니다. 주일과 성탄절에는 두 끼 먹었습니다. 고기와 포도주는 금하였습니다. 빵과 채소만 먹었습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하였습니다.

월, 수, 금요일에는 프란시스 스승이 먹으라고 할 때까지 먹지 않았습니다. 가난하신 예수님이 사랑해 주시는 것을 모두로 알았습니다. 영적인 부요를 위하여 육적인 가난을 택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습니다. 가난을 그리스도의 특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료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클라라는 밤낮으로 꾸준히 기도하셨습니다. 클라라 어머니는 저녁 기도 끝에 긴 시간 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토마스 첼리노가 쓴 성녀 클라라 전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클라라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눈물은 애도의 격정 때문에 마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너무 울면 못 쓴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너의 뇌가 녹아서 콜로 흘러 나와 코가 삐뚤어 질 것이다.”

클라라가 말했습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조금도 삐뚤어지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는 또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사람 클라라는 스승 프란시스가 죽은 지 30년 만에 죽었습니다. 죽을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그 분이 보이는 것처럼 여러분도 저 영광의 왕이 보입니까?”

그는 눈물을 쏟으며 말했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시고 또 이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는 1253년 8월 11일 석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탁발 수도를 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마지막 때인 오늘 날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을 닮으려는 모세나 탁발 수도사 같은 이들이 그리워집니다.

주님이 허락하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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