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 김정화
이야기 하나
작고 수필가 허천 선생에 대한 글을 쓸 때다. 당시 그분의 지인을 만나 귀한 일화 한 토막을 들을 수 있었다. 허천 선생은 평소 오영재 화백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오 화백은 부산미술의 개척자로 평생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가 가난에 쫓겨 부산 변두리의 외진 마을로 들어갔을 때 허천 선생은 심심찮게 그곳에 들러 종일 보내다 돌아오는 낙을 즐겼다. 그런데 두 분은 아침나절부터 해거름까지 별말도 없이 지냈다고 한다. 화백은 좁은 방의 벽을 향해 스케치만 하고, 허천 선생은 창밖 풍광이나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가끔 빈 종이에 글 몇 줄 끄적거리는 일이 전부였다. 점심때가 되면 화백의 빈처貧妻가 내어온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저녁까지 조용히 지내다 돌아오곤 했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주변 사람들이 실답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달리 두 분은 서로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함께 있어도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큼 완벽한 합일이 있을까. 운전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운전 시험을 앞두고 방에 누우면 천장이 온통 주행코스로 보이고 형광등은 신호등으로 바뀐다. 춤을 시작하면 눈앞에 무대가 둥둥 떠다니고 바둑에 입문하면 네모 판이 모두 바둑판으로 와 닿는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운전자는 운전대와 한몸이 되고 댄서는 무대를 안방처럼 종횡무진하게 된다. 진정한 프로가 되면 눈앞의 형상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제자리를 잡는다. 사람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함께 있어 어색하고 신경 쓰인다면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이고, 옆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면 상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나와 대상이 맺어지지 않은 결과이다. 마음의 끈으로 완전히 보듬어 안을 때 비로소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묶어야 할 끈이다. 지금 내 곁에는 누가 있는가. 나는 진정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가.
이야기 둘
불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떠올린다. 한 노승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옆에는 막 산문山門에 든 행자가 장작을 쌓는 중이다. 행자의 고민을 알고 있는 노승이 말했다. “뒤꼍에 가면 장작이 더 있느니라. 가져오너라.” 행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어갔다. 그런데 이내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뒤꼍엔 장작이 없는데요.” “음, 수고했다. 거기 놓아라.” 그 말에 당황한 행자가 다시 대답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내려놓든지, 무겁게 들고 서 있든지.” 노승이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장작을 가져오라 했는데, 행자는 없다고 했다. 내려놓으라고 했는데, 행자는 또다시 장작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노승은 장작을 내려놓든지, 무겁게 들고 서 있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다. 노승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자가 안고 있는 세속의 끈이며 마음의 짐일 터이다. 버려야 할 끈이다. 끈이라고 말하니 낯선 여행길이 떠오른다. 언젠가 태국을 거쳐 캄보디아의 옛 앙코르 왕국으로 가는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차창 너머 풍경은 낡은 수채화처럼 오랫동안 이어졌다. 손수레 행렬을 끄는 맨발의 짐꾼들. 푸른 무논을 갈던 야윈 물소 떼. 시골집 앞마당의 덩그런 웅덩이. 흙담 옆에서 부지깽이 같은 팔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 ‘생에 집착하지 말라. 죽음이란 강 너머 동쪽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라던 믿음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가난해도 웃는다. 우리는 어떤가. 나는 그 여행길에서조차 현실의 끈 중 하나인 손해 본 보험 불입금을 떠올렸다. 내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는가. 내 눈은 자꾸 어디로 향하는가.
이야기 셋
한 부자가 있었다. 가진 게 많아 창고에 온갖 물건이 가득했다. 하루는 그가 아끼던 손목시계를 창고에서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많은 물건 사이 어딘가에 있으련만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할 수 없이 동네 아이들을 불렀다. 시계를 찾은 아이에게 얼마간의 용돈을 주겠노라 제안했다. 아이들은 창고를 뒤지고 기웃거리느라 난리법석이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도 시계를 찾지 못했다. 싫증이 난 아이들이 하나둘 포기하고 창고를 떠났다. 어떤 아이는 부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한 아이는 끝까지 남아 조심조심 찾아다녔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폈다. 밤이 한참 깊어갈 무렵 어디선가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귀를 세워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창고의 귀퉁이에 잃어버린 시계가 숨은 듯 놓여 있었다. 물론 그 아이는 부자가 내건 용돈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가득 차면 귀한 것은 묻히게 된다. 일체의 소음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비로소 시곗바늘 소리가 들려온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외면적 소음이 요란하면 내면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법이다. 불필요한 소리들을 지워냈을 때 자신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요즘 뜨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뿔테 안경을 쓰고 슈베르트 같은 파마머리에 톡톡 튀는 강의를 하는 김정운 교수다. 그가 얼마 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느닷없이 다가온 자유 때문에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의 달콤함을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쉰 살의 창창한 나이에 안정과 품위라는 매듭을 끊고 아슬한 자유의 끈을 집어 올린 그는 미뤘던 글쓰기에 몰두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르바가 질그릇을 만들 때 물레 돌리기에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왼쪽 집게손가락을 잘라버리듯이 진정한 자유는 추구하는 바가 분명해야 한다. 재미있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면 재미있다는 게 조르바의 이론이다. 가려야 할 삶의 끈이다. 자유는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영토로 진입하는 것. 내 마음에는 어떤 소음들이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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