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밭에 왕대 나고
조병렬
담양 대나무 골 테마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은 산자락을 따라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선 가운데, 일만여 평의 대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산마루에는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노닐고, 이따금 햇살이 대나무 이파리에 반사되어 지나는 길손을 유혹한다. 대나무 숲은 어느 뜻있는 분이 30여 년에 걸친 노력으로 조성되었다고 하니,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 없으나 숱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마력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울창한 대나무 숲길 사이로 조성된 죽림욕 산책로. 왕죽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대나무에서 청량한 대숲 바람이 인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댓잎 향이 촉촉이 젖은 흙냄새와 어우러져 온몸에 맑고 시원하게 스며든다.
예로부터 선승이 수도하는 도량 주변에는 대숲이 많았다. 겨울철의 외풍을 막을 수 있고 대나무의 맑은 정신도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숲이 사랑받는 이유는 바람 소리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악사악 댓잎이 부딪치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온갖 망상과 번뇌를 잊을 수 있다고 하니, 대숲이야말로 오욕칠정의 인간과 이웃해야 할 소중한 마음의 벗이 아닐는지.
울창한 대숲에 압도당하면서도 그 고결한 분위기에 동화되려고 하며 천천히 비탈길을 오른다. 산 중턱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아담한 찻집이 있고, 오른쪽에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평상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는 평상에 올라 마치 좌선하는 도인처럼 가부좌하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명상에 잠긴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물소리,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 잎이 부딪치는 소리도 없다. 어느덧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누더기 걸치고 죽장망혜에 죽립을 눌러쓰고 한적한 산길을 거니는 도인 같은 풍모의 나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다시 대숲으로 눈길을 돌린다.
굵게 자란 왕대밭이 눈앞에 가득하다. 새로 돋는 죽순마저도 왕대로 태어나는 곳. 그래서 왕대밭에 왕대 나고 졸대밭에 졸대 난다고 했던가. 부피 자람은 하지 않고 길이 자람만 하는 대나무의 속성. 일행 중 누군가 대나무는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다를 바 없다며 만인 평등에 어긋나는 비민주적인 나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인가? 그러나 겉보기에는 초라한 졸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선비는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옛날 베 잠방이 선비들을 떠올려 본다.
대나무는 순수 혈통을 중시하는 고귀한 정신을 가졌다. 다른 나무들처럼 무더기로 꽃을 피우고 씨받이를 하여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뿌리로만 번식하고 자신의 형편에 맞게 수를 늘린다. 땅 기운이 충분하지 않으면 죽순이 태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약 지나치게 많이 번식하여 지력이 다하면 그 대밭의 대나무들은 모두 죽어 버린다. 이처럼 평생 꽃을 피울 줄 모르고 살던 대나무는 생의 종말에 가서야 오직 한 번 꽃을 피우고 말라 죽는다. 결실의 기약도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꽃을 피우는 대나무의 삶은 비장감마저 든다.
대나무는 왜 속이 텅 비어 있을까? 나는 그 빈속을 좋아한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 주려면 내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고서는 다른 사람의 진실한 마음도 사랑도 담을 자리가 없다. 오늘날 사회에서 속 빈 사람이라고 하면 모욕적일 수 있지만, 나는 더러 속 빈 사람이 되고 싶다. 대나무의 빈속과 곧고 단단한 줄기는 가진 것 없지만 굽힘이 없고 남을 원망하지 않는 선비적 표상이다. 또한, 그 빈속은 무한한 포용력을 갖춘 여유의 공간이지만, 함부로 불의와 부정이 범접하지 못하는 기개와 절조의 고결한 공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나무를 군자의 나무로 칭송하지 않았던가.
굵고 싱싱하게 하늘로 치솟고 있는 혈기왕성한 왕대밭 죽순의 모습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온다. 껍질을 뒤집어쓰고 나온 죽순은 자라면서 허물을 벗기 시작한다.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껍질 하나가 땅으로 툭 떨어진다. 허물 한 겹 벗어 던지니 매끈하고 잘 생긴 줄기가 나타난다. 대나무나 사람이나 허물을 벗어야 본질이 드러나고 새로운 모습으로 발돋움하는 모양이다.
저 죽순은 한 겹씩 껍질을 벗어 던지면서 제 본래의 모습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마디마디를 길게 늘이면서 여유롭게 속을 비워가고 있는데, 내 삶은 너무나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모태의 첫 허물을 벗을 때의 순수를 그리워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반추해 본다. 내 나이테에 비례하여 자꾸 늘어만 가는 부끄러운 나의 껍질들. 저 죽순은 벌써 허물을 다 벗어 가는데…….
나는 그만 조용히 눈을 감는다. 2004. 6.
구룡연 가는 길
조 병 렬
모든 것은 변한다.
구룡연 가는 길이 아직은 눈길이다. 그러나 그 길도 변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눈길이 녹으면 단단한 돌길이 되고, 멀지 않아 그 길 위에 낙엽이 쌓이고 쌓여 우리가 걸어갈 황금빛 융단 길을 만들 것이다. 금강산 관광에 대한 기대는 어떤 두려움과 우려도 잊게 했다. 곳곳에 대설 경보가 내려지고 교통 두절이 보도되었지만 마음은 벌써 금강산 설봉의 한 마리 봉황이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차가 북쪽으로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온 천지는 눈 덮인 적막강산이다. 허리가 휘어지게 한 짐씩 눈을 짊어지고 서 있는 도로변 나무들은 눈길을 달리는 내 마음처럼 무거워 보인다. 한참 가다 보니 차창으로 보이는 자연의 모습은 변화무상하고 다양하다. 인간의 삶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눈을 한 아름 안고 숨죽인 채 서 있는 나무들이 있는가 싶더니, 어느덧 낙락장송은 세찬 눈보라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휴전선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너무 조용하기만 한 현실 앞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 흔적이 오히려 이상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침묵하고 있는 아픈 과거의 역사가 갑자기 아우성으로 내 뇌리를 흔들며 지나간다.
관광증을 목에 걸고 휴대 전화기를 수거하는 순간, 이 여행은 여느 관광과는 달리 자유가 제약된 길임을 실감케 한다. 남방, 북방 한계선의 중간에는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는 녹슨 시멘트 기둥 하나만이 삐딱하게 기울어진 채로 쓸쓸히 서 있다. 표지판은 떨어져 나가고 힘겨운 듯 서 있는 기둥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괴로운 표정이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가에 쌓인 눈은 따뜻한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며 녹아들고 있다. 남북 관계도 이렇게 눈이 녹듯이 화해의 분위기가 서서히 조성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자연도 인간사도.
그러한 생각도 잠시, 남북 양측 출입사무소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통과 절차를 치르면서 다시 통한의 아픔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이 지척이고 그대로 이어진 하나의 땅. 한 발짝만 내디디면 남이요 북인데, 이렇게도 힘이 든단 말인가. 통일의 그날이 그립고 통일의 염원이 치솟는 순간이다.
타고 온 관광버스가 북녘 땅의 여행지를 누빌 줄로 알았던 나는 북쪽으로 가는 다른 버스로 옮겨 타면서 자유로운 육로 여행이라는 꿈은 아직 착각이었다. 북녘 땅을 달리는 차창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은 내 마음을 쓸쓸히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저 태양은 내일도 모래도 새로운 희망을 담고 떠오른다. 북으로 달리는 이 차가 금강산에만 머물지 않고 평양을 지나 신의주까지 달리는 그날을 상상해 본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의 선두에 선 구선봉이 처음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구선봉은 눈마저 녹아서 말갛게 씻은 얼굴을 내밀며 환영의 첫인사를 한다. 앞으로 펼쳐질 탐승의 기대를 잔뜩 부풀게 한다. 개골산의 설경, 자유로이 이 골 저 봉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의 품속에 안겨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점점 인기척 없는 마을과 들판을 달리면서 구선봉을 바라보던 눈을 밑으로 향하니 너무나 대조적인 광경이 펼쳐져 나를 우울하게 하며 한참 동안 수렁 속에서 헤매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따라 양쪽 편 들판에는 외로운 전신주처럼 보초병들이 200m 정도의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다. 보초병이든 감시병이든 그것이야 그들의 임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바람막이도 없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아직 중학생 티도 못 벗은 듯한 그들은 방한모도 쓰지 않아 귀와 볼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찬바람에 시달린 얼굴은 얼어서 붉다 못해 검은빛이고 마네킹처럼 무표정하다. 가여워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작은 체구의 저 어린 군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음날, 악천후 속에서 눈길을 달리며 두려움에 휩싸였던 때는 송두리째 잊은 채, 눈길을 밟으며 구룡연 폭포를 향해 올라가는 발걸음은 힘들지만은 않았다. 금강산 계곡을 걸으며 호흡하는 것 자체가 감격이요 흥분 그 자체가 아닌가.
세속의 찌꺼기라도 씻은 듯이 상쾌한 기분으로 금강문을 통과하며 이 땅 위에 잔존하는 이데올로기의 유산을 짓밟아 뭉개버리기라도 하듯 한발 한발 힘차게 내딛는다. 잠시 후 계곡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가 나타나 그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내 몸도 이 땅도 흔들거린다. 안정을 찾기에는 나나 이 땅이나 아직 마음이 넉넉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이 밝게 비취고 있다. 그 빛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과 희망처럼 밝고 환하다.
한참 오르다 보니 골짜기는 왼쪽으로 휘어져 돌아가는데, 갑자기 상류에서 밀려오는 세찬 눈보라 때문에 눈도 뜰 수 없고 발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을 정도이다. 구룡연 폭포의 장엄한 성소를 나 같은 범인이 쉽게 다가서기도 어렵거니와 우리 앞에 쉽사리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보라가 불어오는 곳을 향하여 힘차게 한발씩 옮겨 놓는다.
구룡폭포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아쉽게도 폭포는 제 힘을 자랑하지 못한 채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는 폭포는 무한히 잠재된 힘을 지니고 있는 듯이 우람하다. 이 땅이 얼어붙지만 않았다면 폭포수가 휘몰아쳐 눈안개처럼 공중으로 날리어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얼어붙은 빙벽 속으로 가늘게 흐르는 물줄기는 미래를 꿈꾸고 있으리라.
영원히 멈춘 폭포는 없다. 지금은 저렇게 꽁꽁 얼어붙은 물줄기지만 새봄이 멀지 않으니 희망의 그날에는 동족의 정기가 하나가 되어 민족의 동맥에 붉은 피가 흐르듯이 화합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릴 것이다.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그 힘이 비봉폭포 위를 꼬리를 휘저으며 훨훨 날아오르는 봉황새처럼 아홉의 용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될 그날을 상상해 본다. 이 폭포의 물줄기는 우리 민족의 막혔던 동맥을 뚫으리라. 흐르는 물줄기를 가로막을 힘은 아무에게도 없다. 설봉의 눈 녹은 성수가 한강까지 흘러 이 땅이 하나의 물줄기로 이어져야 함은 하늘의 뜻이다.
남남북녀가 금강산에서 뗏목을 타고 함경도 아리랑과 경상도 타령을 번갈아 부르면서 어깨춤을 추며 우리의 갈 길을 가야만 한다. 본래는 뚫려 있었던 그 길이 잠시 동맥경화를 앓고 있지만 한순간 막혔던 그 길이 다시 뚫려 뱃길이 되고 뱃길이 산길이 되는 것이 한민족의 뜻이고 하늘의 순리이다.
구룡연 가는 길은 웅장하고도 아름답다. 금강산의 사계 중에서 이때가 제일 절경이 아닐까 싶다. 내린 눈은 분별력이 있었다. 나목이 수줍어하고 있는 금강산의 계곡을 눈으로 가리고 있지만 그래도 보여줄 만한 곳은 스스럼없이 다 드러낸 개골산. 봉우리 정상의 기암괴석에는 바람에 날리고 햇볕에 씻겨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고, 조용한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눈이 쌓여 있으니 바라보는 이들에게 흑백의 조화와 산세의 다양함을 드러내는 신비함과 슬기로움마저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은 변한다. 변화는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희망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새삼 느꼈다. 남북의 상황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아직 불편하지만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변화의 시작이고, 뱃길이 육로로 바뀐 것도 변화이다. 북한의 식당에서 그들의 서비스를 받고 대화를 하며 편안하고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 변화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미래의 변화는 한층 빨라질 것이라는 느낌이다. 남남북녀가 대화를 하며 먹었던 한 그릇 평양냉면의 맛이 입안에서 맴돌고 있다.
모든 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 삼천리금수강산을 거침없이 달리던 이 땅 호랑이는 백두대간을 종횡무진 누비며 달려야 한다. 어제는 한라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오늘은 삼천리 방방곡곡의 밥 짓는 냄새와 군불 지피는 저녁연기에 취해 살다가, 내일은 백두산 천지에서 한 움큼의 성수를 들이키며 환희의 기지개를 켜야 한다.
구룡연 가는 길이 아직은 눈길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 길도 변하고 있었다.
2006/02
맑은 물에 눈을 씻고
조 병 렬
어느 대통령이 이임 기자 회견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건강, 결단력, 신뢰감 등을 꼽았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대통령에게 휴식과 재충전은 필수적이고 조용한 가운데 사색을 할 수 있는 아늑한 휴양시설 또한 필요할 것이다.
나는 단체의 일원으로 지난가을에 이어 또 청남대를 찾았다. 지난 가을의 고운 단풍과 이 여름의 녹음 속을 거닐면서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풍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천하명당 자리라고 설명한다. 일찍이 원효대사가 이곳의 지형을 둘러보고 장차 세 개의 호수가 생길 것이며 임금이 머무는 나라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하니, 천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예언이 이루어진 셈인가.
1980년, 대통령의 새로운 별장 건립에 대한 지시에 따라 불과 6개월 만에 완공했지만 어느 한 곳 부족한 데가 없을 정도이니, 우리의 귀한 장병들이 밤낮으로 땀 흘리며 일했으리라.
휴양 중에도 항상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며, 국가 일급 경호 시설로써 사중의 철책이 설치되어 있다. 나는 이 철책을 바라보면서 휴전선 철책은 몇 겹으로 설치되어 있는지가 궁금했다.
본관에 이르는 길가에는 반송 수십 그루와 다양한 정원수가 로마 황제의 근위병처럼 화려하면서도 호기만장하게 서 있다. 역시 국민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대통령의 휴양처답게 잘도 꾸며 놓았다. 이곳을 건립한 대통령은 이 정원을 거닐면서, 그해의 봄을 되새기며 당시의 용기 있는 결단이 구국적인 판단이었다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본관 앞에는 헬기 두 대가 동시에 이착륙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잔디밭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어르신들은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복잡한 과거사와 하찮은 민심을 송두리째 잊으려고 하였을까?
대통령 가족들의 산책 코스로 가장 사랑을 받은 오각정은 많은 숲과 야생화가 어우러져 삼림욕에 적합하고, 낮에는 호수와 산을, 밤에는 달구경과 영손들의 재롱을 보던 청남대 제일경이다. 푸른 숲을 가르며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그네의 옷자락을 흔들고 있으나 정자 위로 밀려드는 세찬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한때의 칼바람처럼 싸늘하다.
옛날 힘없고 이름 없는 백성에게 애국적 법질서를 명분으로 총칼을 휘둘러 대었듯이, 있는 힘을 다하여 테니스공을 휘어 치며 흘린 땀방울은 주변에 열대식물을 심어 남국의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하는 수영장의 맑은 물에 흔적을 감추었고, 지난날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모여 구국적 결단으로 이룩한 이 나라를 생각하며 함께 피웠던 웃음꽃은 아직도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이 땅의 한 지도자는 국민의 부귀영화와 태평성대를 위하여 충직한 국민으로 하여금 전가부좌(全跏趺坐)로 신령 전에 빌게 하여 집집이 전가지보(傳家之寶)를 대대로 전하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전지전능한 지도자 ‘본인’의 깊은 뜻이었고,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지도자는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노적가리를 쌓게 하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보통사람’의 위대함이었을까? 그 덕분인지 그것도 부족하였던지 알 수 없으나, 노구(老軀)를 이끌고 인적 뜸한 산사와 보통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된 선방에서 오래도록 공덕을 쌓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더러 속세의 옛 추억이 그리울 때면 속주머니에 깊숙이 감추어 둔 이십구만 전도(錢刀)만 잡고 노니면서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나라는 생각할수록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점이 적잖다는 생각을 감출 길이 없다. 세계전도를 펼쳐두고 이 땅을 찾아보려고 모래밭에서 바늘 찾듯이 샅샅이 헤매어도 희미해진 노안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더니, ‘대한민국’ 네 글자가 내 새끼손가락 밑에 숨어 있지 않은가. 반갑고 기쁜 마음에 더욱 다잡고 보았더니, 가엽게도 허리에는 붉은 포승줄을 둘렀다. 그 안에서 비명횡사(非命橫死)하거나 영어(囹圄)의 몸이 된 각하(閣下)들이 각축하며 살아왔다.
이런 와중에도 이 나라가 세계 십 위 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으니, 어찌 불가해의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땅의 성실하고 지혜로운 민초들은 지도자를 믿다가 속다가 그리고 버렸다. 어느 지도자도 온전하게 존숭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우리는 이 아픔이 각혈(咯血)이 아닌 마지막 진통(陣痛)이기를 언제까지 기다리며 살아야 할까?
옛날 요임금의 신하인 허유는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귀를 더럽혔다고 하여 영수에 귀를 씻었고, 그의 친구 소부는 그 물을 망아지에게도 먹이지 않았다는데, 나는 이곳을 뜻하지 않게 두 번씩이나 찾아와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으니, 대청호의 맑은 물에 눈이라도 씻고 돌아가야 하련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2006. 08.
☆ 약력
ㅇ 『수필과비평』 등단
ㅇ 대구수필문예대학 교수, 솔빛수필창작교실 강사, MBC문화센터(시지점)수필창작아카데미 강사, 대구교육청학부모역량강화 교육강사,
ㅇ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전국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회장 및 (전)대구지회장, (전)수필문예회 회장, 영남수필문학회 회원
ㅇ 제17회 신곡문학상, 제1회 대구시민문예대전 산문부최우수상
ㅇ수필집 『왕대밭에 왕대 나고』, 영남일보『고교논술독서특강』기획출제위원
ㅇ 대구시 수성구 노변로 55, 105동 702호(노변동, 수성월드메르디앙)
ㅇ (053)793-1563 010-2513-3644
ㅇ E-mail : choby813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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