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끝난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 꽃보다 청춘 > 시리즈는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서는 유례없이 최고의 시청률을 유지하며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에 대해 일상에 바쁜 사람들의 일탈과 휴식의 욕구를 대리 충족해주기 때문이라거나 평소에 잘 가볼 수 없던 곳을 소개해 주는 정보성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출연자들이 보여준 ‘우정’과 ‘진정’의 요소는 아니었을까. 그들의 감정은 연출된 것이 아닌 ‘진짜’처럼 보였고(아마도 진짜일 것이다), 특히 그것이 속 깊은 우정으로 나타났을 때, 무엇보다도 빠르게 몸과 마음을 데우는 감동의 연료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 꽃청춘 > 시리즈 열광의 진원은 우정과 진정
여행 중에 문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털어놓거나, 자신의 능력과 작업의 한계에 대해 토로할 때에, 그것은 시청자에게 인간에 대한 어떤 가능성과 희망의 느낌까지 전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담담히 하나의 손짓이나 몸짓, 표정으로 건네었을 때, 시청자는 그 작은 신호에 안도하는 동시에, 모종의 향수(자신이 예전에 겪었던,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를 느꼈던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인들은 우정과 진정에 대한 극도의 소외와 갈망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발견하고, 화면을 통해 (대리)충족하는 이중의 정서경험을 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리얼리티’를 표방한 ‘다큐’ 프로그램이 많이 편성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인 어떤 것, 진정한 말, 표정, 행동, 관계인 듯싶다. ‘진짜’만이 상품성을 확보하고, ‘진정’만이 소비의 대상이 되는 역설적인 사태를 현대 한국인은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어린이가 등장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순수’를 소비상품으로 채택하는 영리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진정과 순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현대인의 가능성이자 희망이지만, 그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감상하고 소비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슬픔과 절망이다. 말하자면 이제 ‘순수’와 ‘진정’, 누군가와 벗이 되어 나누는 ‘정’은 희귀해진 인문적 자질이 되어,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성 상품이 된 진정과 순수
자본주의, 경쟁주의, 성과주의가 팽배하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은 ‘우정’이라기보다는 사회생활의 ‘매너’이며, 나를 보다 이롭게 해줄 ‘인맥’을 찾는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목적이 중심이 되는 ‘인맥’이라는 단어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빈번히 사용되며, 심지어 영리한 사람들의 ‘성공 전략’처럼 통용된다. 누군가를 무조건 좋아한다거나, 그(녀)에게 잘해주는 것은 ‘밀당’을 모르는 숙맥의 처신이거나, 언젠가 손해를 보고 큰코다칠, ‘선한 자’의 ‘우매한 처신’으로 폄하되기 일쑤다(누군가를 착하다고 말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거니와, 그 이유는 사람을 논하고 평하는 언술이 ‘인성’의 차원에서 ‘성과/스펙’의 차원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착한 건 나쁜 게 아니야」가 최근에 발표된 사회적 맥락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정’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어느덧 우리는 우정을 말하는 방식에 대해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 들면서 내 주변의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지, 늘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관찰하고 판단해보라(가령, 나의 현재의 조건이나 입지가 바뀌었을 때에도 내 주변에 순수와 진정을 나눌 사람이 그대로일 수 있겠는가. 질문하는 동안 얼굴에 미소가 띄워졌는지, 어쩐지 심각해졌는지를 살펴보라. 생각보다 몸이 먼저 여기에 응답하고 있을 것이다). 사물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처럼(『넨도: 디자인 이야기』의 저자 사토 오오키의 말), 사람의 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것일까.
오랜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이 어느 순간 ‘화학변이’를 일으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거나(관계의 사물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관계의 소격화). 손에 쥔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듯 사라진 사람들이 생기는가 하면(관계의 실종.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보라), 어느 순간 별똥별이 지듯 익숙히 알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버리기도 한다(관계의 산화).
반대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으며, 나이가 들어 뜻밖의 계기로 새로운 우정을 경험하는 즐거움도 없지 않다. 인간관계의 오묘함 속에서, 그리고 사람 심리의 중층성과 현대사회의 복잡성 속에서 우정을 지키는 일은, 때로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지키기만큼이나 어렵고, 바로 그 때문에 고귀하다. 이제 우정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감상하는 감정 소비의 대상으로 자리바꿈되어, 우정에 관한 인문학적 가치는 ‘박물학’과 ‘보존학’, ‘고고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싶다.
목적이 없는 우정, 심미적 관계성의 출발
[선인들의 우정론] * 내가 보기에 우정은 필요보다는 우리의 본성에서, 얼마만큼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냐는 계산보다는 사랑의 감정과 결합된 호감에서 비롯된 것 같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우정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2005, 122쪽)
* 처음 내가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는 빈객이 문 앞에 가득 했지만, 파면되자 문 밖에 참새 잡는 그물을 쳐도 될 정도로 썰렁했다. 내가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은 예전처럼 모여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문에다 이렇게 적었다. “한 번 죽을 뻔하고 한 번 살아나니 우정을 알 수 있고, 한 번 가난하다가 한 번 부자가 되니 사귐의 태도를 알수 있고, 한 번 귀하다가 한 번 천해지니 참된 우정을 알게 되었다.” (사마천, 『사기』, 「급정열전(汲鄭列傳)」)
* 군자의 사귐은 담담해서 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아서 단술 같다. (『장자』, 「산목(山木)」)
우정에 관련된 요소로 사랑, 신뢰, 지조, 존경, 의리, 정, 친밀감, 다정함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이자, 삶의 의미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인간적 요소다. 따라서 우정을 지키는 것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인문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정을 구성하는 가치들을 생성하고 지켜내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누군가와의 신뢰를 지킨다는 것은 그저 평화로운 시대에 서로의 손을 맞잡고 악수하는 정도의 무게가 아니라, 때로 자신의 아주 귀중한 것과 교환하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 가치로서의 중량감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다른 무엇과 우정의 요소가 양립할 수 없다면, 양자를 저울질하는 과정에서 ‘신뢰가치’가 포기되기도 한다. 그 대가는 우정의 상실이다. 신뢰가 깨진 우정은 연약하게 연명되거나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상실과 퇴락의 증거로 우리 앞에 ‘관계의 검은 주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정에 대한 인문적 사색을 위해 풍성한 우정의 언어, 태도, 문화를 만들어 낼 차례다. 우정의 심성적 바탕이 목적이 매개되지 않는 호감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목적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우정은 심미적 관계성의 출발을 의미한다. 손익을 따지지 않는 관계,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는 관계를 기꺼이 선택할 때에, 그 사람은 다른 무엇으로 계산될 수 없는 가장 큰 보람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