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예수님이 지구방문 목적(4)/눌린 자를 자유롭게/눅 4;16-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2. 12. 21:32

예수님이 지구방문 목적(4)/눌린 자를 자유롭게/눅 4;16-2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실 수 없으신 분이 오셨습니다. 반드시 오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구를 방문하신 것은 뉴스중에 뉴스입니다. 왜 오셨나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입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린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오늘은 눌린 자를 자유럽게 하시려 하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오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정리하면서 처음에는 이 구절을 빼려고 하였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라고 하는 말씀과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기도중에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같으면 왜 두 번 말했겠느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기에 말씀하셨지 않느냐?”

그래서 깊이 묵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들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전혀 다른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포로된 자는 누군가가 포로로 삼았습니다. 눌린자는 스스로 눌린자입니다. 포로된 자는 어디론가 끌려 간 자입니다. 눌린자는 끌려가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눌려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눌려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1. 열등감에 눌린 이.

열등감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말츠의 말을 빌리면 94%의 사람들이 열등감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든지 크든지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등감에 눌려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를 민수기 1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면서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들어갈 땅을 탐지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모세는 정탐을 반대하였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땅이까 거냥 가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모세는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한 지파에 한 명씩 모두 12정탐군이었습니다. 모세는 정탐군을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남방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 오라”(13;17-20)

12 명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 왔습니다. 10명이 보고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13;27-33)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방 부정적인 감정에 염색되어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군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14;7-9>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군은 우리는 메뚜기같다고 하였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메뚜기 의식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약점을 보고 상대방의 장점을 보면서 자기 비하를 시킬 때 열등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10명 정탐군은 상대방은 아낙 자손으로 키가 장대하고 자기들은 작은 체구임을 보았습니다. 상대방은 무기가 많고 자기들은 무기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은 성을 견고하게 쌓아 놓고 살고 있는 자기들은 공격자이기에 피해가 많을 것을 보았습니다. 상대방 군사는 잘 훈련되어 있고 자기들은 군사가 아예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약점에 눌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열등감이 우등감으로, 약점이 강점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키 작은 것이 강점이 되어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모함을 보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약점 때문에 예수님이 그의 집에 와서 주무시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세는 말이 둔한 약점으로 그런 열등감에 눌려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열등감이 우등감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7 귀신들린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창녀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쓸모없는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열등감에 눌려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가장 성녀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가장 많이 울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약점이 장점으로, 열등감이 우등감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나만 장군도 그렇습니다.

그는 국방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불치병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의 열등감 때문에 이스라엘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엘리야를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도 있지만 정신도 있습니다. 육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아픈 곳을 감싸려고 합니다.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건드리면 아파하게 됩니다. 공부하지 못 한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하면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박사에게 무식하다고 하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러나 부자에게 돈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웃고 말게 됩니다.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카니발 장군 초상화에 대하여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카니발 장군은 초상화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불렀습니다. 카니발 장군은 초상화가 앞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완성하였습니다. 자기 초상화를 손에 든 한니발 장군은 그 자리에서 그 화가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외눈박이였습니다. 그대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데 열등감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카니발 장군은 다른 초상화가를 불렀습니다. 그 초상화가는 한니발 장군이 먼저 초상화가가 외눈으로 사실 그대로 그려서 사형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고민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릴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옆 모습을 그렸습니다.

카니발 장군은 자기 초상화를 받아 들자 말자 너무나 기뻐하면서 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열등감이 있고 열등감을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죽일 정도로 아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서울 시내에서 3,000평 대지위에 저택을 지어 놓고 살아 가는 이 집을 방문하고 돌아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우리 집은 돼지우리 집같아서 한동안 메뚜기 의식에 빠져 있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장관실에 들어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열등감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10명의 정탐군이 가나안 거민을 보니 성이 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낙 자손이었습니다. 아낙자손이란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거인인지 말해주는 전설이 있습니다. 12명의 정탐군들이 너무 더워서 동굴속에 들어가서 한잠을 자고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동굴이 아니라 아낙자손들이 먹고 버린 석류 껍질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면 메뚜기 의식에 빠져서 좌절하게 됩니다. 자기보다 못 한 사람과 비교하면 우등감에 빠져서 거만하여 지게 되어 있습니다.

열등감은 오히려 거룩한 분노로 도전의 계기가 됩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호박꽃이 막 필 때면 할머니가 밭에 가서 그 호박꽃을 막대기로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호박꽃가루가 많이 날라서 큰 호박을 많이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마가 열릴 때에는 땅을 파고 이제 막 열리는 고구마에 호미로 상처를 내주면 호박만한 고구마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오히려 호박이나 고구마를 더 크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열등감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열등감에 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등감에서 자유함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의외에도 음란에 눌려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란이 지나 갈 수는 있습니다. 음란이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음란에 눌린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음란이 지나간 사람입니다.

순간적으로 벗고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음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왕권으로 데려다가 간음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하였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음란죄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죽기까지 간음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2장에서 다윗은 죽습니다. 1장에 보면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붙여 주어도 결코 간음하지 않는 다윗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음란할 수 있어도 음란에 눌리지 않고 벗어난 다윗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삼손은 다릅니다.

그는 평생 음란에 눌려 살았습니다. 결국 음란으로 죽었습니다. 기생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다가 잡혔습니다. 눈을 뺐습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누구나 음란에 실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음란에 눌리는 것은 아닙니다.

음란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죄악중에 하나입니다. 역사상 파멸된 도시들은 거의 다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노아 시대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킨 이유중에 하나도 음란이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7-39)

마지막 심판도 음란한 때 심판이 갑자기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당하였는 지를 잘 압니다. 바로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성적 타락의 극치는 동성연애입니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성적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남자로 가장 하여 들어 가서 롯의 집에 머믈 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말했습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19;5)

상관한다는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성적 관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동성 연애가 공공연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음란에 눌렸었으나 벗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갈멜산 기도원 집회 인도를 자주하고 있습니다. 원장님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한국의 기도원 원장님으로서 제단에 한번도 안 서시는 분은 그 분 한 분 밖에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자신은 부흥회 은사가 없기에 설교는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설이 기도원이기에 얼마나 든지 자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강단에 서본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또 존경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30년 전쯤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혼자 살고 계십니다. 성적인 흠없이 성결하게 살고 계십니다.

나는 신혼여행을 대전 유성 온천으로 갔었습니다. 해외로 신혼여행가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때였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이는 부자중에 부자였습니다. 계룡산 산책을 하였습니다. 그 때 동학사옆에 남매탑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스님이 도를 닦고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옆으로 오더니 입을 벌렸습니다. 잡아 먹으려는 줄 알고 놀라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벌린 입을 보니 큰 가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가시를 제거하여 주었습니다. 호랑이가 사라졌습니다. 얼마 후 예쁜 처녀를 물고 와서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스님은 그 처냐와 평생 남매로 지냈습니다. 이런 전설이 내려오는 남매탑이었습니다.

모두 성적 욕망을 잘 누르고 살았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그렇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문제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우리나라 말로 약혼하였습니다. 임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기절할 노릇이었습니다.

요셉은 가만히 끊기로 작정하고 행동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1:20)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1:25)

처녀 총각이 같이 지내면서 1년을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성적인 욕망을 이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열등감에 눌리고 음란에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3. 스트레스에 눌린 이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을 가장 누르고 있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에 눌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스트레스는 심각합니다.

현대인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는 말은 스트레스입니다. 영국 산업 연맹에서 조사하였습니다.

1950년대보다 1990년대에 스트레스로 인한 결근이 6배나 늘었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하여 입는 기업의 손해는 노사분규로 인하여 일하지 못 하여 입는 손해에 30배가 넘었다는 보고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에는 두 가지 별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언의 살인자라는 별명입니다.

가량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슬비인 데 한참을 맞다보면 속옷까지 적셔집니다. 스트레스가 조금 조금 쌓이다 보면 병이 깊어 어느 덧 돌이킬 수 없는 병문턱까지 와 있게 됩니다.

앗차!” 하는 순간은 이미 늦었습니다.

스트레스의 징조가 있습니다. 불안, 초조, 불면, 위장장애, 두통등이 신체 장애가 스트레스의 시작입니다.

설사를 자주한다, 위가 아프다, 배가 더부륵하다, 심장이 터질 것같다, 골이 빈 것같다, 죽을 것만 같다, 암처럼 느껴진다...병원에 가도 아무 병도 없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들입니다.

스트레스는 무언의 살인자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을 조사하니 암에 걸리기 전에 무엇엔가에 깊이 신경을 썼었던 사람들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스트레스는 무언의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스트레스의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인생의 양념입니다. 반찬에 양념이 없으면 맛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양념이어서 스트레스가 없으면 인생이 맛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에 쫓기는 스트레스가 있을 때가 공부가 제일 잘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업가는 남의 사업이 잘 되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가장 사업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니다. 스트레스는 인생의 양념입니다. 스트레스가 있어야 합니다. 이같이 스트레스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문제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이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트레스는 왜 받는 것일까요? 내가 아픔이 되고 내게 손해가 될 것이라 생각되기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내게 잘 될 것이라고 느낄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럴 때 믿음을 가지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늘 같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구하기만 하시면 주시는 분임도 믿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안 되는 것같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매와 독수리 연구가인 부로프 박사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매가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는 때때로 까마귀나 딱새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독수리나 매는 이런 새들에게 공격할 힘이 있지만 같이 대항하지 않고 하늘 높이 솟아 오릅니다. 그러면 더 이상 괴롭히지 못 하고 제 풀에 꺽여서 물러 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입니다.

한 차원 높은 기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문제가 생기고 아픔이 일어나도 스트레스가 쌓여도 믿음을 가지고 한 차원 높이 올라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트레스에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오헤려 스트레스를 통하여 더 큰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밤,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시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 인도하였다고 죽이려고 하고, 바로 군대는 잡으러 추격하고 있을 때 홍해를 갈랐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1000번 흔들려야 어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지구를 방문하셨나요? 예수님의 입으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열등감에 눌린 자를, 음란에 눌린 자를 그리고 스트레스에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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