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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 인생! (벧전 1:1-9)
오늘 본문 3절은 '찬송하리로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찬송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실에 대해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평생 불러야할 노래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찬송'해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 노래들은 글자 그대로 유행하는 노래들입니다. 그때 유행이 지나면 그 노래를 시들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찬송은 100년 전에 불렀던 찬송을 지금 불러도 새롭고 은혜가 됩니다. 그 이유는 찬송은 유행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주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신령한 노래이며 구원의 찬송이기 때문에 50년, 100년 아니 천년만년 불러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믿/ 지금 우리는 복 받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얼마든지 자유롭게 마음껏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쓰여 질 때의 배경을 보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가 네로 황제였는데 얼마나 박해가 심했던지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을 빼앗기고 목숨을 빼앗기고 다 빼앗기면서도 그들은 신앙은 지켰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후서를 보면 박해받는 성도들은 격려하는 내용들이 참 많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된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⑴'반 국가 단체'로 오인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로마시민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길 때입니다. 로마 황제가 바로 신입니다. 그래도 아무나 항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인들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극심한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는 세상에서 박해를 받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 왕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해를 받다가 마침내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폴리갑은 로마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화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 일본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주기철 목사님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지금도 저 이북 땅에는 김정일부자 종교를 섬기지 않으면 수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답니다. /믿/ ⑵'비도덕적인 단체로 오해' 때문에 박해를 당했습니다.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어디로 피했는가 하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이 동굴이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카타콤이라는 지하무덤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동굴입니다. 예수님도 동굴 속에 묻혔습니다. 다급해진 그리스도인들이 지하동굴로 피신해 들어갔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굴 속에서 매일같이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눔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쟁이들이 동굴 속에서 사람을 잡아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미운 털이 박혔는데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되자 로마 정부는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오해를 받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참 묘한 데가 있습니다. 그렇게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으면 무너져야 되는데 더 강해지고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극심하게 핍박을 받을 때가 네로 황제 때인데 기독교의 복음이 그때 제일 왕성해 졌습니다. 그들은 박해하면 할수록 지하 동굴을 더 깊이 파고 더 넓게 파고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력이고 능력이고 힘입니다. /아멘!/ ⑶'인사법' 때문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법으로 입맞추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벧전5:14절에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서로 만나면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인사를 나눕니다. 이것이 원래 그리스도인의 인사법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박해를 피해서 지하 밀실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갖은 운명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형제애가 돈독했겠습니까? 그래서 만나면 서로 얼싸 않고 입맞추며 반가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입맞추는 인사법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밖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속에서 음란한 짓을 하고 못된 행위를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그런 음란행위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방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는 제사행사로써 음란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 때문에 사교들이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속에서 입을 맞춘다는 소문이 퍼짐으로서 밖에서는 그것이 음란행위로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로마정부는 마음놓고 그리스도인들은 잡아다가 죽이고 맹수들에게 밥으로 던져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독교인들이 지하동굴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숨었고 더 넓게 파고 들어가서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카타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카타콤은 지하무덤이란 뜻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말로 들으니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 신앙생활은 참 처절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었고 죽음을 당하고 있었고, 언제까지 이런 박해가 계속될지 알 수도 없었고, 또 그 핍박 때문에 낙오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보니까 그때 사도였던 베드로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붓을 들어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하고 잘 인내하며 견디라고 권면의 글을 쓴 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신앙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실 어려움을 당할 때는 누군가가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가 되고 흩어지지 않고 구심점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
①베드로 사도는 인생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1), 여기에 기록된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는 소아시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들을 가리켜서, '성도'라든지 '형제'라든지 '교회'라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고, '나그네'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이 디아스포라, 즉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원래 이 '나그네(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고국을 등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야고보 장로님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흩어져 있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이제 다음 주간이면 추석입니다. 추석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이란 두지 말라.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가?' 마치 성경 진리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유행가이면서도 찬송가 같은 유행가입니다. 인생은 나그네라고 베드로도 오늘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⑴흩어진 나그네의 유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12:1절에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은 이후로 본향을 떠나는 디아스포라의 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객이 되었고, 출애굽 이후 40년 간은 광야생활의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저들의 역사 중에 바벨론의 70년의 포로 생활로 실로 고향을 떠난 디아스포라적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1948년 독립을 얻을 때까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적 유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비록 독립이 되어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지만 지금도 본국에 돌아와서 사는 자보다 미국을 위시한 러시아와 여러 외국 등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적 백성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본향을 찾아 떠도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히11장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나온바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아멘!/
⑵나그네 인생은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 철학이 무엇인가? ㉠언젠가는 반드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는 잠시 잠깐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므로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은 영원한 본향이 아니며, 잠시 잠깐 후면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에 가게 됨을 깨닫고, 이 땅에 살아도 항상 본향에 돌아갈 준비를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많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자리인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을 떠날 때에는 목에 조그만 흙 자루를 걸고 떠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흙을 간직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꿈꾸며 산다고 합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살기에 고향을 늘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나그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의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아멘!/ ㉡나그네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떠날 곳, 떠날 날이 있는 것이 나그네입니다. 지금 이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런 철학을 나그네 인생은 가져야 합니다. /아멘!/ ㉢나그네는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7절에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십니다. 나그네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쓰러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것이 나그네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적 공동체를 향하여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정돈하면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고 했습니다. /할/ ㉣나그네는 돌아갈 본향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고후5:1-3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할/아멘!/
②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박해가 너무 심하니까 많은 무리들은 동굴 속으로 피하여 들어갔고 또 많은 사람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멀리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피신을 해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가리켜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즉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느냐하면 거기에 중요한 원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⑴2절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사람들이 왜 흩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단순히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서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을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여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흩어져야 복음이 널리 퍼질텐데 그들은 그곳에서만 모여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을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해서 예루살렘에 박해를 가하게 하십니다. 그때 엉겁결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 멀리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이방 땅으로까지 퍼지게 되었고, 그때 그 유명한 선교의 센터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할/ 오늘날도 우리에게 개인적인 어려움과 교회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고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난 중에 탄식하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라도 그 고난 뒤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금 고난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⑵2절에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해 자녀로 삼기 위하여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말은 지금 너희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너희는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더 쉽게 말하면 '값을 알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이 값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존재의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값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피 뿌림을 받아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값을 알고 계십니까? 이 값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가 보일 줄 믿습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③다시 그 당시 배경을 보겠습니다. 기원 64년경에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불은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일부러 방화한 불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었고 로마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위협을 느낀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하기 위해서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는 이 불을 그리스도인들이 방화했다고 뒤집어씌우고 조직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실라와 마가를 데리고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평안하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드로 또한 로마에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핍박받고 있는 형제들은 직접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로마에 갔습니다. 가서 베드로는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④그래도 '찬송하라'고 합니다(3). 무엇을 찬송하라고 했는가하면 세 가지입니다. ⑴부활을 찬양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과 다른 점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영생을 남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나게 되고, 그 거듭남을 통해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할/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철저하게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습니다.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친구들은 링컨이 목숨이라도 끊을까봐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의에 빠졌던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그에게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할/ ▶어떤 사람이 큰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그분은 그 실패로 인해서 충격을 받고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초점 잃은 눈길로 벤치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라보니 정신병에 걸린 어느 여인이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라는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찬송을 듣는 순간 이 사업가의 마음에 뜻하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순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다음에 이분이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그래, 맞아, 주님이 지켜주시는데 뭘 걱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분은 마침내 퇴원을 합니다. 퇴원 후 그는 심기일전합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데 걱정하지 말자' 그리고 조그만 포장마차를 차려놓고 닭고기를 열심히 튀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요리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국제적 판매망을 차려 한국에도 KFC라는 체인점이 설치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의 주인공 '커넬 할랜드 샌더스'입니다. 그 분은 누구보다도 실패 속에서 헤매고 있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할/
⑵거듭나게 하신 것을 찬양하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이 거듭났다는 말은 중생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옛사람이 죽어 장사되었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요3: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가요? ▶죄 사함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에 의지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신분의 변화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우리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종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개종이란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교를 기독교로 바꾸었다고 하여서 거듭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으로 가는 길이지 거듭남 자체는 아닙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개종하기는 하였으나 거듭나지 못 하였기에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 할 사람이 세상에는 많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무엇인가? 바울이 고후5;17절에서 말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거듭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유명한 세계적인 전도자 T.L. 오스본 목사님은 '한 사람이 거듭났다거나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때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삼3:9절에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씨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본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입니다. /할/ 거듭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듭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을 가요? 예수님은 거듭나는 비결을 알려 주셨습니다. 요3: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 하면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성령님이 하실 일은 우리를 도와 주시는 일입니다. 롬8: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베드로는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나고 새롭게 중생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찬송할 조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듭 난자들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여러분, 어떤 환경과 조건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지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⑶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시므로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3절의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산 소망으로 믿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소망이란 원어의 뜻은 '피난을 가기 위해 서둘러 간다, 살길을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그 말이 상징적으로 변해 '확신한다, 신뢰한다, 안전하다'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은 그 소망이 살아있는 소망이며 생명이 있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산 소망이 되십니다.
⑤산 소망의 조건을 4절에서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⑴'썩지 않고' 우리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썩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썩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 기업은 썩지 아니합니다. 부활의 몸도 썩지 아니할 몸입니다. 고전15:52절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할/ ⑵'더럽지 않고' 땅은 사람의 죄악으로 손상되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것들은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깨끗합니다. 그곳은 사람의 범죄한 손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므로 정결합니다. 그곳에 있는 것, 그 나라에 속한 자 모두 정결합니다. /아멘!/ ⑶'쇠하지 아니하는' 세상 것은 세월이 지나면 쇠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습니다. ⑷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할/ 그런데 세상이 주는 소망은 그렇지 못합니다. 곧 변하고 오염되고 추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영원한 소망다운 산 소망입니다. 시39:7절에서 시인의 고백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할/ 주께 소망을 둔 사람은 넘어지는 것 같으나 일어서게 됩니다. 눅12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업에 성공하여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짓고 거둔 곡식을 저장하고 배를 두드리며 자기와의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부터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면서 그 물질에 소망을 두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그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현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그 사업이 몰락할 때 함께 몰락합니다. 우리가 IMF시대에 얼마나 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기업가들이 몰락했습니까? 가진 소유에 소망을 거는 사람은 그 소유가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권력에 소망을 둔 자들도 그렇습니다. 그 권력이 붕괴되면 함께 붕괴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한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믿/ 여기에 우리가 빨리 눈을 떠야 합니다. /아멘!/ 시71:14절에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할/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환난 당하고 고통 당하는 성도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는 찬송하라, 왜냐하면 산 소망의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참 위대한 것입니다. 신앙에는 깊고도 심오한 힘이 들어있습니다. 이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 함이 없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할/
⑥왜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5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할/ 어떤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까? 그 앞부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말씀이고, 또한 그 능력의 보호를 받으려면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으면 보호를 받고 믿지 않으면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믿/ ▶어떻게 지켜주십니까? 신32: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다는 것은 가장 소중하게 가장 완벽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호하십니까? 시145:20절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찾는 자를 사랑하시고 만나주십니다. 잠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할/ ▶또 사43:4절에서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왜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보호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본문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서 찬송하라고 한 이유는 그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너희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인가?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아멘!/
⑦이제 그 베드로는 6절에서 '시험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 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시험은 원래 '페이라조'라는 말인데, '시험은 넘어지는가 보려고 한 번 테스트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페이라조'라는 말은 '한번 해본다'는 뜻입니다. 해봐서 넘어지면 시련이고, 안 넘어지면 시험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너희가 넘어지는가 한번 해보는 그런 시험에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 때문에 당하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시험은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시험, 정신적인 시험, 영적인 시험, 육체적인 시험 등 시험은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⑵그러나 그 시험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시험이라도 그 시험이 죽음까지 인도하지 않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그 뒤에는 축복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고난 중에 있고,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시험은 잠깐으로 끝납니다. 또 하나님은 그 시험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끝도 없이 계속되는 시험이라면 그리고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는 절망적인 시험이라면 그 시험이야말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믿음을 성장시키십니다. /믿/ ⑶왜 시험이 오는가?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할/ 이것이 시험의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금보다 더 귀하게 하시려고' 그런 시험을 주십니다.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이 왜 귀합니까? 그 이유 두 번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아멘!/ 여기서 베드로는 신앙 연단을 금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금입니다. 금이 귀한 것은 다 변해도 금은 변하지 않는 그 영구성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땅속에 묻혀 20, 30년 있으면 다 부패하고 한 줌 흙이 되어도, 금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반지를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왜 그런지 이시지요? 변치 않고 살자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같은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연단 받은 믿음입니다. 순금을 만들려면 용광로 속에서 가려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에 넣고 끌이면 불순물을 제거되고 순금만 남게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연단과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을 걸러내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떨어져 나가는 신앙'이 있고, 또 하나는 '더 단단해 지는 신앙'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이 없다고 충성해 보지도 않고, 헌신해 보지도 않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중심이 있는 신앙인은 더더욱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립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의 욥입니다. 욥의 신앙은 연단을 발음으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재산 잃고, 자식 잃고, 나중에는 아내도 잃고, 몸에 병까지 들어서 목숨만 가날프게 붙어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견디어 냅니다. 그 연단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끝까지 인내합니다. 목적이 분명하니까 끝까지 인내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이 지나간 후에 욥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이 났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까? '금보다 더하게 하시려고' /활/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모든 문제의 해결의 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 자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이 믿음 가지고 살면 후에 주님 앞에서 칭찬이 있습니다. 이 믿음을 9절에서 보면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금의 가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믿음은 언제 어디서나 금처럼 그 가치가 인정되고 그 효능이 평가를 받습니다. 칭찬은 행위의 결과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행실도 좋기 마련입니다. 행실이 좋으면 칭찬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서나 칭찬이 있고, 그 시대를 이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의 가치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할/ 여러분, 가치를 바로 알면 그 가치 때문에 어떤 희생도 기쁘게 감당하게 됩니다. 가치에 따라 비릴 것을 버릴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믿/아멘!/ (2010년 9월 12일 대예배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