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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사람! (시 11:1-7)
요즘 한참 트고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빵 왕 김탁구'입니다. 무려 시청률 40%대를 기록 중인 KBS 2TV 드라마 '제빵 왕 김탁구'의 힘이 대단합니다. 급기야 제빵업체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빵을 그대로 출시하고 있습니다. 파리바게뜨에서는 명장 팔봉 선생의 비밀레시피인 쌀 막걸리를 발효해 만든 주종봉 단팥 빵이 나왔고, 김탁구가 경합에서 만든 배부른 보리밥 빵도 나왔다고 합니다. 삼립식품도 고전적인 단팥 빵, 크림빵에 카스타드크림, 슈크림 등을 가미해 제빵 왕 김탁구 단팥크림 빵, 제빵 왕 김탁구 울퉁불퉁카스타드, 제빵 왕 김탁구 찰떡 단팥 빵 등 7종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역시 드라마의 힘은 대단합니다. 대게 제과점의 이름이 파리바게뜨, 뉴욕제과 등 그 이름이 대개가 외국어인데 반해 유난히 자기의 이름을 상호로 내건 제과점이 있는데 바로 '김충복 제과점'입니다. 김충복은 어려서 제과점 직공으로 들어가 열심히 주인을 도와서 일을 했습니다. 그 주인은 나이가 많아 자기의 기술과 사업을 물려 줄 때가 되었으나 외동딸 하나밖에 없어서 고심 중에 있었습니다. 그 외동딸은 이화여대를 나온 인텔리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늘 마음속에 김충복이가 배움이 없지만, 주인을 충성으로 섬기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저런 사람이면 나의 사업을 물려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딸과 의논을 했습니다. '얘야! 내 나이가 늙어서 이젠 쉬고 쉽구나! 그런데 이 사업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구나! 대학을 나온 사람은 나의 제과기술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그래서 내가 너와 의논을 하는 것인데, 충복이가 배움이 없지만 믿음이 있고 주인을 잘 받드는 충성심을 보니 충복이가 네 사위가 되어서 물려주면 어떻겠느냐?' 그 소리를 들은 딸은 '아버지의 뜻이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어요!' 그래서 제과점 직공으로 있던 충복이는 일약 대학을 나온 주인집 딸과 결혼을 해서 그 사업의 뒤를 잊게 되었습니다. 그 딸은 그때부터 열심히 남편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열심히 배워서 늦게 일본 유학까지 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었고, 지금은 전국에 수많은 판매망을 가지고 꾸준히 성장하는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김충복씨의 충성심'을 이야기하고 싶고, 또 이대까지 나온 그의 부인의 '용기 있는 결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할/ ◀제목 소개!▶
흔히 오늘을 사는 현대를 가리켜 '용기가 없는 세대'라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헉슬리'는 '현대인간, 그는 누구인가? 그는 머리를 깎이고 두 눈을 뽑힌 채 노예로 타락한 삼손이다'라고 혹평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도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삼창을 주도했던 유관순열사의 용기도 대단했고, 부하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기 몸을 던진 김재구 소령 같은 분도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도 용기 있는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당대의 가장 강대국이던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당당하게 전한 모세도 있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도 용기 있는 결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또 다니엘과 그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어려운 시련 때에 소망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잇습니다. 바로 본문을 기록한 다윗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는 먼저 그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자의 감정이 그 배경에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기도와 찬양을 드렸는가를 알 때에 우리들의 상황에 비추어 보는 지혜와 더불어 성령께서 주시는 놀라운 감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①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유다 지파의 이새의 아들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출생하신 곳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얼굴이 준수하고, 수금을 잘 타는 음악적 재능과 함께 시를 잘 쓰는 문학적 소년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용기를 가진 장군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 어릴 적부터 부모를 도와 베들레헴 언덕에서 양을 치는 효자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징표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삼상16:7). 이것이 다윗 생애에 제1의 전기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제2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불레셋의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사건입니다. 그 당시 불레셋 나라는 철기 문화를 도입해서 최신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당시 세계적인 장군인 골리앗이란 명장이 엘라 골짜기에서 싸움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많은 장수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사울 왕으로서는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방을 붙였습니다. '누구든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주겠다. 그리고 나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겠다.' 한편 불레셋 진영에서는 그 날도 의기양양한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나와서 싸워 볼 자가 있으면 어서 나와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군대는 모두 사시나무 떨 듯이 벌벌 떨기만 했지 아무도 나가 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지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전부 불레셋 나라의 종이 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풍전등화 위기입니다. 이런 나라의 위기 앞에 하나님께서는 이 때를 위하여 한 사람을 준비해 놓으셨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께 합한 자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촌놈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가 세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었는데 소식이 궁금해서 말 째 아들 다윗을 전선으로 보낸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아들들을 위하여 옥수수 빵을 준비하였고, 천부 장을 위해서도 치즈를 준비하여 보냈습니다. 이새는 다윗에게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반드시 증표를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터에 온 다윗의 귀에 골리앗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큰 소리로 하나님을 욕하며 소리 지르는 골리앗을 보는 순간 어린 다윗의 마음속에 의분이 생겼습니다. '저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 이방 민족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욕하고 하나님까지 모욕하다니' 견딜 수가 없어서 형들의 만류에도 마다하고 사울 왕에게 찾아가 자신이 싸우겠다고 자청을 합니다. 사울 왕이 보니 너무 어린 소년이기에 무시해 버렸는데 자꾸만 졸라대니 사울 왕이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큰 용사'라고 하면서 다윗을 이해시켰지만, 오히려 이 소리를 들은 다윗이 왕에게 '제가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의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사자의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고, 사자나 곰이 나를 해하고자 할 때,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들을 다 쳐 죽었습니다. 내가 사자나 곰도 쳐 죽었는데 하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을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그도 그 짐승의 하나같이 될 것입니다. 왕이시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나를 블레셋 사람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 확실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사울이 너무 기특해서 그럼 나가 싸워 보라고 하면서 자신이 입던 군복을 입혀주고 투구를 씌어주고 칼을 주었습니다. 다윗이 군복과 투구를 다 쓰고 칼을 들고 보니까 군복도 크고 투구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게 익숙지 않으니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군복과 투구와 칼을 다 벗어버리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냇가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우리말로 고무줄 새총)를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골리앗이 이 꼴을 보고 깔깔 웃으면서 '내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 내가 너의 몸을 찢어 공중의 새들과 짐승들에게 주리라'고 하자 이때 다윗은 믿음으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려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가리라!'하고 달려갔습니다. 골리앗도 화가 나서 달려 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돌을 취하여 물매를 던졌습니다. 물매 돌은 날아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이마에 돌이 박혔습니다. 제 아무리 힘이 센 골리앗 장수도 꼼짝 못하고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이때 다윗이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빼내어 그를 죽이고 그 목을 베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블레셋 군대는 혼비백산 다 도망가 버리고 이스라엘 군대는 만세를 부르며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를 당한 것처럼 이런 위기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누구에게나 블레셋이 있고, 심지어 골리앗 같은 적도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산 넘어 산'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오늘 다윗이 승리한 비결을 배워서 우리 모두 위대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 일로 인하여 다윗은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고, 그 나라 국군 총수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갑작스런 그 출세도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 큰 고난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지방을 순시하던 사울은 동네 처녀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 왕이 마음이 불안해 졌습니다. 다윗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길 것 같아서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몇 차례의 위기 속에 있을 때 다윗의 친구들은 그를 산으로 도망하도록 권유를 합니다. 오늘 1절에서 3절의 본문은 다윗이 그 친구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나타낸 말입니다. 지금 친구들이 다윗에게 다급하게 말합니다. '악인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는 급박한 순간이 아니냐? 빨리 산으로 도망가자'고 하면서 빨리 위급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인간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다윗은 나직이 또한 용기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산으로 도망하기보다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 피하겠노라' /할/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께 피할 것인가? 아니면 산으로 피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중대한 국면을 앞에 놓고 심각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다윗을 통해 그의 신앙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②산으로 피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다윗더러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고 충고합니다. 누구나 새를 쫓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를 쫓으면 새는 마치 혼비백산한 것처럼 산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면 도망가는 새 대신, 사람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비겁하게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을 상징한 말입니다. '하나님이고 믿음이고 의롭게 사는 것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단 쉬운 길도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자는 의미가 산으로 도망가자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할/ 3절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이 말은 산으로 도망갈 것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충고가 매우 합리적이요, 현실적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위협일 수도 있습니다. '터가 무너진다'는 것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 의인이라도 사울 손에 잡히면 망하지 별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터가 무너지면'이란 말은 금방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주 어려운 상황을 만나 마치 터가 무너지는 듯한 암담한 심정을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최유순 집사님이 지금 실제로 그런 상황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병마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재물도 지위도 생명까지도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긴박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 산으로 도망하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③그러면 하나님께 피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당하든지 즉 터가 무너진다해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겠다는 결단입니다. 상황에 관계없습니다. 신앙 양심대로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내가 망할지라도 세상적인 타협이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자신이 생명이나 가정이나 남은 생애 모두를 맡김으로써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겠다는 것이 하나님께 피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도망 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어 도망 다녔고, 심지어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여 질풍같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받고 허둥지둥 도망 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평생 다윗은 한 두 번의 사건이외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믿음이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강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에 다윗 왕조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다윗의 위급한 상황, 쫓기는 상황에서 그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용기입니다. 몹시 어려운 위기를 만나 하나님께 피하려고 할 때는 용기 없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할/ 그런데 성경에 '믿음과 용기'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신31:6절에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모세가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떨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떨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그러므로 떨지 않는 용기와 하나님을 분명히 신뢰하는 믿음이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시3:6절에 다윗의 고백을 보세요!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이 말씀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지닌 큰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나를 포위하고 있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이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④본문 1절에서 보면, 다윗의 외부적인 갈등에 부딪친 것을 봅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여기서 '내 영혼 더러'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마음 깊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흔들렸다는 의미도 됩니다. 다윗도 자칫 세상으로 피해버릴, 신앙에서 포기해 버릴 그런 위협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갈등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진정한 용기로, 승화된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다윗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갈등이 옵니다. 왜 갈등이 생깁니까? 우리의 주변을 돌아봅시다. 때로 예수님 믿는 사람보다는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이 더 지혜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말에 유혹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일이 잘 풀려야 될 텐데 일은 안 풀리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고 훨씬 지혜롭게 보입니다. 이때 신앙 인들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영세 가게를 이끌어 가는 알뜰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빚을 가진 젊은 부부는 명절 대목이 오면 한목 잡아 빚을 갚겠다고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달력을 보니 추석이 주일입니다. 부부의 마음도 착잡해 집니다. 신앙이 비교적 좋은 부인은 아직 신앙이 미숙한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여보 우리가 아무리 빚을 지고 있고 또 추석 대목을 본다 할지라도 주일날에 어떻게 문을 열고 장사를 하겠어요? 장사를 못해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우리 교회에 갑시다. 그 날 벌지 못한 것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거예요'하고 부인은 간절히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과 더불어 어디로 피하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 피하자는 것입니다. /할/ 부인은 가난을 초월할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화가 벌컥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니 교회는 일년 내내 다니는 것이 아니냐? 추석은 겨우 하루뿐인데, 그 날 하루 즘 문 열어 놓았다고 큰 벌을 받겠느냐? 그 날 장사를 하면 우리가 빚을 얼마나 갚을 수 있는데... 여보 당신 혼자 교회에 가고 나는 장사를 할 테니까 그리 알아' 이렇게 큰 소리를 칩니다. 자! 이 남편은 지금 어디로 피하려고 합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 세상을 향하여 즉 산으로 도망가려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러면 이 남편을 설득하여 끝까지 하나님 편에서 살기를 원하는 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로 용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갈등이 심화된다해도 오직 하나님 편에 서는 길은 믿음과 용기뿐입니다. 용기 없이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습니다. /아멘!/
⑤다시 다윗의 한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는 위험한 판국입니다. 다윗은 일가 친척들과 함께 사울 왕의 미움을 받은 6백 명의 사람들과 피신을 다녔습니다. 사울 왕의 군대는 끊임없이 추격을 해 옵니다. 황급한 나머지 다윗의 무리는 큰 굴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유대나라 남부지역에는 자연 굴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굴속에서 피신한 다윗 일행들은 사울 왕의 군대가 굴 앞으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울 왕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발을 가리우기 위해 굴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잠깐 쉬기 위해 낮잠을 자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이 굴속이 시원하니까 혼자 누워서 자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일행들은 '이때다' 하고 다윗에게 말합니다. '다윗이여 보시옵소서, 여호와께서 언젠가 당신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붙이려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하셨는데 오늘이야말로 바로 그 날이 아닙니까? 왕을 죽이십시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사울 왕을 왕으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필요치 안다고 하실 때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사울 왕을 폐하실 것입니다. 지금 사울 왕은 칼도 없는 무방비 상태인데 비겁하게 뒤에서 치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실 때 나는 왕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어디로 피하려고 했습니까? 하나님 품으로 피하려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사울 왕은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산으로 도망가자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다윗과 그 무리들이 극단적으로 심리적 갈등을 일으킨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살금살금 기어가서 그의 옷자락을 조금 짤라왔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사에 사울 왕은 크게 감동을 받아 다윗 쫓기를 포기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다윗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의 소유자이며 믿음에 승리자였습니다. /아멘입니까?/할/
⑥이제 하나님 편에 서려면 왜 용기가 필요한지 그 까닭을 알아봅시다. 먼저 하나님 편에 서려면 누구나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줄기찬 인내로서 그 고통을 이겨야 할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근방 고난이 축복으로 바뀌지는 줄 알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유심히 살펴보십시다. 하나님 편에 의로운 사람들이 금방 하나님이 복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그들도 한동안 무거운 십자가를 지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험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악이 성행하는 곳이며 어두움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며 고통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십시다.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예수가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 무서운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을 눈앞에 보며 하나님 편으로 피한다는 것은 용기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할/ ▶다시 다윗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다윗이 사울 왕을 살려준 다음에 오히려 다윗은 모질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악착같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눈초리를 피해 막바지에는 국경을 넘어 타국인 불레셋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당시 블레셋 왕은 아기스인데 아기스 왕은 사울과 다윗 사이가 문제가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다윗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그를 환영하고 다윗과 그의 일행을 시글락 땅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에서 600여명의 부하들과 그의 식구들까지 먹여 살리는데 아기스 왕이 절대적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곳에 머무른 지 1년 4개월이 되는 어느 날, 아기스 왕이 다윗을 불러 말하기를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하는데 너는 나가서 군대에 참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기스 왕의 말을 거절할 수도 없는 그런 입장입니다. 다윗은 몸은 비록 블레셋에 도망을 왔지만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는 아닙니다. 자기는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할 수없이 원수의 나라 블레셋에 왔지만 자기 백성들에게 칼을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삼상29:1절 이하에 보면, 다윗은 아기스 왕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기스 왕의 호위대장이 되어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가슴만 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중심을 아신 하나님은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삼상29:4-5절 사이를 보면, 블레셋 장군들이 모여서 자기 왕에게 진언을 합니다. '아기스 대왕이여! 저 다윗을 망명지 시글락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만약에 다윗 장군이 거느린 600명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 나라 이스라엘과 합세를 하여 우리를 대적하면 그 때 우리는 속수무책입니다. 다윗은 우리의 전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위험이 너무 큽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윗이 그 나라에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사울이 죽이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추앙하던 존재가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아기스가 자기 장군들의 말이 옳다고 판단하여 다윗을 불러 말합니다. '나는 자네를 믿지만 우리 장군들이 자네를 의심한다네, 그러니 자네는 내일 새벽 일찍이 시글락으로 돌아가서 전쟁에는 나가지 않도록 하게!' 그래서 다윗이 어려움을 면하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아말렉 족속들이 습격을 와서 자신들의 처자와 전 재산을 모두 빼앗기는 수난을 당합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절망과 분노 끝에 돌멩이를 들고 다윗을 치려고 덤벼듭니다. '사울 왕을 죽였더라면 이러한 변을 당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신하들의 울분은 사뭇 다윗을 위기로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이지만 이와 같은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기가 없이 하나님 편에 피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이 배출한 위대한 흑인 지도자입니다. 그는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공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민권운동가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민권운동이 점차 열기를 띠고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했을 때 흑인들은 저마다 밀려드는 희망으로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전 흑인을 동원해서 폭력으로 흑인의 권리를 찾자는 강경한 세력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끝까지 폭력을 거부했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지도자들이 킹목사 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등을 돌려 대는 사람, 심지어는 죽이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968년 4월 3일 날 킹 목사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앞에는 어려움이 놓여 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만 나는 지금 그런 일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다시 오시는 주님이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한 다음날 킹 목사는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괴한에 의해 암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흑인들뿐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후광을 받고 있습니다. 킹목사는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께 피한 승리자입니다. 폭력을 행사하자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자고 하는 진정한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용기를 상실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 안에도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악과 대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고난을 각오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즉 십자가를 질만한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⑦그러면 용기를 가진 신앙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⑴본문 4절 '상'반절에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우리가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성소에 계신다는 말은 '높은 곳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지 않은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므로 우리는 언제나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가 있는 곳이면 항상 안심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는 믿음이면 아무리 악이 들끓고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용감할 수 있습니다. ⑵4절 '하'반절에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용기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일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아멘!/ 하나님의 간섭이란 '감찰하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보호하시는 상태의 의미'입니다. 시121:4-6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터가 무너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망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5-6절에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할/ ⑶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용감해 질 수 있습니다.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 곧 현실적으로 쉬운 길을 택하여 양심과 신앙을 다 내어버리고 좋은 길을 택한 사람은 한동안은 굉장히 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혜로운 처세술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감하게 피한 다윗을 하나님은 두 손으로 잘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성군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항상 고난에서 허덕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의 어려움은 잠시 잠깐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세우시고 크게 축복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앞길에 큰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놀랍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울음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아침을 우리에게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폴 틸리히'라는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보다 덜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⑧하나님께 피한 다윗은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삼하3: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에 전쟁이 오래 되었습니다. 두 집안 사이의 싸움이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죽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벌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다윗의 집은 강해 졌으나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⑴시기와 사랑의 차이입니다. 사울의 마음은 시기로 가득 찼고, 다윗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블레셋으로 인하여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 가고 있을 때 17살 밖에 안된 다윗은 거인 골리앗과 단독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나라를 구했습니다.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자기보다 인기가 좋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옷자락만 자른 것도 마음에 걸려서 아파했습니다. 이유는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의 옷을 잘랐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울의 시기를 다윗은 사랑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하늘에서 확실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집은 강하게,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요셉을 형들이 시기하며 팔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자녀들을 잘 돌보고 기른 것과 똑같습니다. ⑵회개 차이입니다. 사울은 회개가 없었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습니다. 하나님은 회개에 빠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자세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은 회개가 없엇고 다윗은 회개에 빨랐습니다. ⑶하나님 동행의 차이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떠나셨고,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삼상18;1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삼하5:10절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또 삼하 7:9절에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할/ ▶사울 왕조는 당대로 막을 내리고 그 후임으로 뽑힌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리라는 꿈도 꾼 일이 없었고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왕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8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왕은 장자가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형들 다 제치고 막내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손이 왕이 되는 법인데 다윗은 사울 왕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지파도 다르고 가문도 다릅니다. 그런 그를 왕으로 선택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행13:22절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할/ 다윗이 왕이 된 것도,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만사는 형통입니다. /믿/아멘!/ ▶오래 전에 인도에 파송한 선교사님이 하나님의 기적을 세상에 전해 왔습니다. 인도의 유니온 카바이트 회사에서 유독가스가 유출되어 2천 5백 명이 죽고 15만 명이 피해를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스회사 건너편에 2만 여명을 가진 '보팔'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파시피 인도는 흰두교와 회교가 압도적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것은 용기와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나 보팔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가스가 유출되어 골목마다 스며들고 가스가 지나간 곳마다 사람들이 쓰러집니다. 가스가 보팔 마을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도에서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보팔 마을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길 하나만 건너면 가스가 그 마을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가스가 길 앞까지 와서는 왼쪽 다른 동네로 비켜 가 버린 것입니다. /할/ 그 보팔 마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덕분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보호를 받았다고 선교사가 세상 메스 콤에 전한 실화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망은 절대 안전합니다. 어떤 곳에서든지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피하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10년 9월 5일 대예배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