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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출 15:22-27)
세상이 불안합니다. 왜 이렇게 살기가 어렵습니까? '장사가 안 돼, 뭐가 되는 일이 없어' 세상 사람들은 늘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여, 하나님의 손길은 염려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렘32:17절에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나이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나라를 빼앗기고 예루살렘 도성이 멸망되어서 폐허된 벌판에서 외친 신앙인의 절규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여기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말은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것도, 주 하나님께서는 힘드시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맡길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우리 국민의 의무 가운데 교육의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은 개인과 국가가 다 같이 잘 살아가는 방편이 됩니다. 그래서 의무교육 수준이 더 높은 나라일수록 그 나라가 잘 살고 모든 면에서 앞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일찍부터 교육에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극성스러운 엄마들의 힘이 큽니다. 그래요! 아는 것은 힘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하나님의 학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 학교를 꼭 졸업하게 만드십니다. 그곳은 바로 광야학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학교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기르고 영적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광야는 한 마디로 영적인 훈련을 받는 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 광야학교는 성도들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질병으로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부도로, 또 가정의 불화로, 자녀들의 문제로, 또한 사람을 잘못 만나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운 처지에 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이시라면 아마도 당신은 지금 광야학교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광야학교를 지나고 있는 성도 님들이 계십니까? 그 학교를 졸업하셔야 합니다.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약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할/
▶오늘 제목입니다.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광야에서 40년 간 고생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는 마치 유격 훈련을 시키는 곳과 같은 특수한 지형 조건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사람도 생물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잡아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곳입니다. /할/ ▶먼저 광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광야 또는 빈들'은 믿음의 사람들의 영성을 새롭게 체험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광야를 거처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미디안 광야 40년의 훈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끌고 나온 이스라엘도 역시 40년을 광야에서 우상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분별하는 훈련을 받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광야 체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사는 사람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 광야 40년을 거치고서야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선민 공동체가 형성되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 40일간의 금식 기도를 통하여 출발하신 것을 볼 수가 있고,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광야의 체험을 했고,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요한도 역시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하고 난 다음 맨 먼저 간 곳이 아라비아 광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나 빈들은 단순한 지리적 용어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과 훈련을 통하여 '바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이요, '광야'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할/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무인도 하나를 구입하고, 나무를 잘 심고 꽃도 여기저기 심어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토끼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토끼들이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털에 윤기가 사라지면서 병난 토끼같이 보였습니다. 드디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병이 나다니....' 수의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수의사가 고개를 저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랍비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리를 같이 기르십시오.' 부자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토끼를 다 잡아 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랍비가 말했습니다. '토끼의 병은 환경이 너무 좋아서 생긴 병입니다. 이리와 함께 기르면 이리에 안 잡혀 먹히려고 힘차게 도망 다닐 것입니다. 눈빛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다리에 힘이 생길 것입니다. 털에 윤기가 흐를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고난이, 광야가 새롭게 살게 만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친 파도는 사공을 유능하게 만든다.' /할/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⑴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 내가 의지했던 배경, 인간의 의지와 실력과 지식은 모두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만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곳이 광야입니다. ⑵지난날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는 곳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구습을 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영적으로 애굽은 죄악 세상이고, 바로는 사탄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백성을 건져내고 하나님의 약속된 은혜의 땅 가나안으로 직접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거치게 한 것은 애굽의 생활을 정리하고 죄악된 생활을 끊어버리고 거룩한 삶을 준비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를 통과해야 가나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죄인이 곧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할/ ⑶광야는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곳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중요한 것은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행여나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았는가? 너무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는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귀합니다. 깨달은 자는 겸손해 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광야는 나 자신을 깨뜨리는 곳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발견하는 곳이요, 메마른 심령 속에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할/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향하여 전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430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애굽을 출발, 홍해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나온 스릴이 그들의 행진을 더욱 감격스럽게 했습니다. 그때에 그 감격을 모세는 노래를 지어 후손들에게 남긴 장이 본문 1-18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9-21절에 보면 해방의 감격! 홍해 바다를 갈라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 앞에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풍속은 공식 석상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금지시켰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죄가 여자를 통해서 들어 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여자는 인구수에도 빠졌습니다. 그런 풍속의 배경 속에서도 여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범국민적으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으로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넨 이스라엘이 수르 광야에 들어와서 삼일 길을 걸었으나 마실 물이 없어 또 다시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시 행군하여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드디어 그 곳에서 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들은 서로 다투어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소리치기를 '마라, 마라' 즉 '쓰다, 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또 다시 원망이 시작됩니다. 홍해를 건넜던 감격을 잊지 못해 민족의 대 합창을 부른지 3일 만에 그들은 또다시 원망의 대 합창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환경을 보며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는 그 환경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해결의 방법으로 한 나무를 지시하여 던지라고 합니다. 그대로 순종하여 던졌더니 쓴 물이 단물로 바뀌어 이스라엘이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할/ 그 다음에 또 보면 마라를 지나고 나니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림은 샘이 있고 종려나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에 이스라엘 회중이 장막을 치고 잠시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구출하시고 홍해의 위기에서도 기적을 베풀어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연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연단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원리와 방법을 적용하십니다. 오늘 이 문제를 같이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홍해의 기적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약속대로 바다를 친히 갈라주셨습니다. 구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바다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홍해 바닷길은 애굽과 영원히 결별하고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며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되었습니다. 고전10:1-2절에서는 홍해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홍해의 체험은 세례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게 세례를 받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 윤민, 이치용, 손춘란 성도가 지난 주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자기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만민 앞에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신분상으로는 세상과는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는 의식입니다. 성경에서는 애굽을 세상으로 비유합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됩니다.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홍해의 사건은 성도들의 세례식과 연관을 둡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한 후에 체험한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한없이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옛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후5:17절에서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홍해를 건너기 전과 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우리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입니다. 죄악 속에서 쾌락을 누리며 인생의 어떤 행복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옛사람은 장사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삭개오와 같은 사람을 한번 보세요, 홍해의 감격이 무엇인가를 좀 알 것 같습니다. '오! 주님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중에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신약의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구원을 받은 것이 너무나 기뻐서 재산을 전부 교회에 바치고 성도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이상적인 천국의 삶을 한동안 맛보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을 통하여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온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홍해 바다의 체험입니다. /아멘!/ 성도들은 누구에게나 이런 기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은 지 얼마 안되었어도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감격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은 지가 오래 되었어도 감격과 체험이 없어 늘 그저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구원에 확신이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이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마음에 놀라운 기쁨이 생수처럼 솟아오르는 체험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왜 우리가 홍해를 건넨 환희를 맛보지 못합니까? ⑴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약간의 불 신앙이 그 마음에 찌기와 같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가라고 했지만 '중간에 가다가 물이 덮으면 어떻게 할까?' 건너가면서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기쁨을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불 신앙의 착고에 묶여 있는 성도의 마음에는 구원의 기쁨이 찾아오지 못합니다. ⑵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⑶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성도가 아닌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상태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기쁨과 확신이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그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이 확실한 기쁨이 없이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할/
둘째, 광야의 연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생활한 이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듯 사하라 사막과 같은 모래밭은 아닙니다. 목축이 약간 가능한 황량한 벌판입니다.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는 곳에서 낮에는 더위가 심하고 밤에는 온도가 급강하하여 추위가 닥치므로 견디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이 앞서가는 하나님의 구름기둥을 따라간 곳이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첫날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기쁨에 기분이 설레고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은 아무리 걸어도 물 한 방울 없는 광야 길만 계속됩니다. 이젠 백성들은 점점 불안에 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에는 무서운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성도에게 이런 원망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토록 홍해를 건넌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말입니다. 대부분 신앙생활을 처음으로 하는 초신자들은 순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기쁨이 넘칩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신앙생활만 잘하면 인생 전부가 축복의 연속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사정없이 좌절해 버리고 맙니다. 마치 돌 짝 밭에 뿌리 운 씨앗처럼 처음에는 말씀을 받고 기쁨으로 충만했지만 핍박이 오고 어려운 시험이 왔을 때는 뿌리가 약하고 흙이 얇아서 말라죽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구원에 환희에 차서 기뻐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기억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세의 일생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인생의 절정기인 나이 40에 광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무려 40년간 광야의생활을 거칩니다. 모세의 이 40년 광야생활은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 쓰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멘!/ 예수님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주야로 금식하며 준비하셨습니다. 거기서 또한 사단에게 시험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실명하여 눈이 어두워 졌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 주시는 놀라운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다시 광야로 몰아넣었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의 3년 세월이 없었다면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내다보시고 우리의 약점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지 광야로 인도하시어 시련 뒤에 오는 더 큰 축복을 받도록 준비시키는 분이십니다. /아멘 입니까?/
▶이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는 몇 가지입니다. ⑴광야는 영적 연단을 의미합니다. 시험은 예수 믿는 사람이 당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남편이 믿지 않으므로 오는 핍박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믿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업으로, 물질로, 질병으로, 가난으로, 여러 가지 고통 등은 우리가 광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⑵광야는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과거에 좋아 보이는 것이, 가치 있게 생각되던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됩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허무감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위로 받을 만한 것이 없고, 진정한 평안히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가 인생광야를 지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⑶광야를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당신을 거역하고 범죄 할 때 징벌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삼하12:10-12). 하나님의 기대가 크고 하나님께 총애를 받는 사람일수록 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징벌하십니다. 한편 다윗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극심한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시32:4-5절에서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또 그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⑷하나님이 그들을 그 멀고 험한 길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만일 가까운 길로 가게 되면 블레셋 땅을 통과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당시 싸움 잘하기로 이름난 족속이요,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입니다. 싸울 줄도 모릅니다. 블레셋과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애굽에서 도망 나오자마자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스라엘은 크게 당황하고 실망하여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 길을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요, 배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서 가게도 하시고 기다리라고도 하십니다. 또 인생 길에 어둡게도 하시고, 고독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놓고 나면 '아하! 하나님이 그때 그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깨닫게 되어 집니다. /믿/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광야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광야를 피하기 위한 도피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려움은 사라지고 바라는 데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일정한 하나님의 믿음의 훈련과 연단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기간이 광야의 생활입니다. 이 광야의 생활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수단이 좋아서 경험이 풍부해서 축복을 받았다고 자기를 내세우고 맙니다. 그러나 광야의 훈련 속에 자신을 온전히 깨쳐 버리고 '아이고!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사오나 우리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를 붙잡아 주세요' 주님만을 의탁하는 자세로 바꾸어집니다. ▶정말 우리는 광야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행복을 위한 도피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피하는 샛길도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서 산산이 부서뜨리시고 다시 만드십니다. 그런 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축복을 받도록 허락하십니다. /믿/아멘!/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 깨어지도록 하나님이 당신을 다루실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향한 야망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깨어지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개척교회에 오면 시련이 더 많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교회에 시련이 많고, 문제가 심각하고 어려운 자들을 모아주시고 그곳에서 교회와 함께 성장하도록 축복의 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믿/ 그래서 광야의 생활을 거쳐야 합니다. '핑크'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광야의 시련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무가치한 가를 발견하게 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와 같은 시련이 없이는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홍해를 일단 건너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를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훌륭히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아무렇게나 교육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요, 가장 지혜로운 선생님이십니다. 그가 세상의 수십 억의 사람들 중에서 우리 각자를 택하셔서 자기의 자녀로 인을 쳐주셨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바른 삶을 살도록 광야에서 교육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멘!/ ▶부자들이 많이 사는 압구정동 현대 APT에 사는 어떤 가정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된 자녀에게 자가용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 자가용에 전속 운전사가 따라다니며 월급을 그 어린아이가 손으로 준다고 합니다. 그 운전사는 그 아이와 놀아주고 교실에 들어가면 기다렸다가 끝나면 집으로 모시고 온다고 합니다. 얼마나 불쌍한 아이입니까? 유리 동물원에서 사는 새끼 사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사자 새끼를 산에다 풀어놓으면 얼마 못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발바닥에 흙이 묻지 않고 키운 자녀보다는 차라리 힘든 고생을 하며 키운 아이가 어떤 면에서는 더 훨씬 낳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어리석은 부모처럼 우리를 키우지 않습니다. /할/ '찰스 코우만' 여사는 재미있는 체험담을 글로 소개합니다. 그녀는 일년 동안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을 너무 작았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오랫동안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급히 가서 가위를 가져다가 그 구멍을 옆으로 조금 따주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나방이 고맙다는 듯이 퉁퉁 불은 몸집을 기우뚱거리면서 쉽게 꼬치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큰 선심이나 쓴 것 같은 만족감에 젖어 있으면서 이제 그 나방이 오색찬란한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자기가 나방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나방은 자기의 몸을 질질 꿇고 다니면서 날지 못하는 달싹둥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작은 구멍을 빠져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 이것은 나방이 꽃을 찾아 이산 저 산으로 날아다닐 행복한 나비로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할/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너무 값싸게 동정하지 마십시오, 경제적으로, 건강으로, 사회의 여건으로 형제가 진통을 겪고 고통을 당할 때, 가위를 들고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더 큰 위험에서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며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시험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벧전1: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아멘!/
셋째, 광야에서 얻는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 ①기도하게 만듭니다. 모세와 백성들이 부르짖었습니다. 고난 앞에서 성도는 늘 기도하게 됩니다. 시련은 마치 바람과 같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을 향하여 더 빨리 달려가게 합니다. 광야에는 반드시 샘이 있습니다. 샘이 없는 사막은 없습니다.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 축복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 것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안'입니다. 사막에는 반드시 샘이 있습니다.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찾는 사람에게 찾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 ②영의 눈을 뜨게 만듭니다. 모세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광야의 시련은 마음의 때를 벗겨주고 마음의 눈을 열어 육체의 안일주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③십자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모세가 주님을 향해 기도하여 눈이 열었을 때 그는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그 나무를 꺾어 마라의 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벧전2:24절에 보면 그 나무는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그리스도인은 광야의 생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만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④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체험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 해결의 체험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쓴 물이 있는 샘물 바로 곁에 나무가 있었습니다. 바로 나 자신 일 수도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쓴맛을 주던 문제들이 단맛을 내는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느 장로님이 광야생활에서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을 인수받았는데 3년 동안 계속 적자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기도하고 포기하지 않은 채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십일조는 물론 주일 성수 감사까지 철저히 지켰습니다. 어려움이 오면 올수록 공장 바닥에 엎드려 더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변의 모든 공장들이 문을 닫았으나 그 장로님의 공장을 흑자를 내는 유일한 공장이 되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저 공장은 일요일날도 쉬는데 이상하게 흑자는 내니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의 3년의 고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의 고난을 통하여 믿음을 키워주시고 교만해지거나 쾌락에 빠지는 위험을 미리 막아 주신 것입니다. /할/ 이것이 성도들이 맛보는 단물입니다. 시련 뒤에 하나님은 위로와 보상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게 하시고 난 뒤 다음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곳은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시련을 잘 이기면 하나님께서 엘림의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련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그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고난이나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 중에 함께 하시며 우리 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영적 무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할/ ⑤여러분, 예수 믿고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맛의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전에 달던 것이 이제는 쓴 것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저도 예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도 계속 술을 못 끊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달던 술이 쓴 물로 바꿔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영적인 원리에 붙잡힌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받은 형제들 중에 이런 고백들을 많이 합니다. '이제 조금만 술을 먹어도 속에서 안 받는다'고 합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단물이 쓴 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쓴 물을 마셨듯이 우리들에게도 이 쓴 물의 과정이 절대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마라'입니다. 여기에서 세상 것을 써야합니다. 아직까지도 세상 것이 달다고 느낀 사람은 홍해를 건넌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애굽에 있는 자입니다. 사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허무는 더 큽니다. 세상의 부귀는 소금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라'와 같다고 합니다. ⑥광야를 기억하며 삽시다. 신9: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십니까?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은 그 어떤 민족도 맛보지 못했던 기적과 영광으로 가득한 시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서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를 통해서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아멘!/ ▶역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음악작곡가는 말할 것도 없이 '요한 세스바챤 바하'입니다. 바하의 음악은 장미같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쓰라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형 집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며 살았습니다. 바하는 악조건 속에 자라 '마리아'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7명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레오폴드 후작과 외국에 연주 여행을 다녀와 보니 아내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이미 치른 후였습니다. 재혼했습니다. 아들 11명, 딸 9명 모두 2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20명 자녀 중에 10명이 죽고 10명이 남았습니다. 10명 자녀를 모두 자기 손으로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살아남은 10명 자녀 중에는 정신 박약아도 있었습니다. 바하는 노년에 장님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극빈 가정이었습니다. 둘째 아내 안나 마크달레나가 1760년 2월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빈민 구제위원회에 장례를 맡겨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 그는 인생을 깊이 알게 되었고, 그런 고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아픔을 같이 하는 음악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물은 바위와 부딪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법입니다. 큰 고난, 계속되는 고난, 참기 어려운 고난은 최고의 음악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바하는 오라토리오, 칸타나 작곡을 끝내고 나서 꼭 오선지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적었습니다. 바하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곡을 작곡하고 나서는 꼭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적었습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바하 가문은 200여년 흐르면서 저명한 작곡가 50여명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바하에게 그렇게 고난을 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하를 고난 속에서 크게 훈련시켜서 좋은 음악이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친 파도는 사공을 유능하게 만듭니다. /할/ ⑦중요한 것은 이 광야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임마누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출13:20-22절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에 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광야 길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그들 앞에 행하셨습니다. 미2:13절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인도자이십니다. 여러분, 아무리 인생광야를 만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 길에 앞서 가십니다. /믿/ 우리는 주님만 따라 가면 승리합니다. 찬434장에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할/ 이제 끝으로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시련의 연속인 광야생활이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같은 시련 뒤에는 아름다운 축복과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23: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할/ (2010년 8월 22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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