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마 9:18-2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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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마 9:18-26)

 

  오래 전에 한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학교를 갈 때면 큰산을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을 돌아가다 보면 학교도 늦고 다리도 아프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년은 '저 산이 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갔는데,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런 설교를 하십니다. '얘들아! 예수님 말씀에 너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들어 바다에 옮기라 그러면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소년의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래! 저 말씀은 나에게 주신 말씀이야!' 그때부터 소년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산을 옮겨 주십시오' 얼마나 바보 같은 기도입니까? 얼마나 멍청한 기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소년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학교를 마치고 오는데 수백 대의 트럭과 포클 레인이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만에 산을 무너뜨리고 서해안 간척지에 흙을 다 부어버렸습니다. 그곳에 평지가 생기고 아파트가 생겼습니다. 소년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입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그것이 소년이 기도해서 그런 건가요? 벌써 2년 전부터 도시 계획에 있던 것이 그때 이루어진 거예요. 우연입니다.'
  여러분, 우연히 믿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우연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연히 실패하고 우연히 넘어지고, 그러다가 우연히 죽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하나님의 역사로 알고 기도의 응답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 우리 모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두 편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이 소개되었고, 또 하나는 12년 된 혈루증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이런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기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고, 또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모든 인생사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아셨고, 그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도 아셨고, 그 여인이 두려워하는 것도 아셨고, 회당장의 야이로의 딸이 살아 날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손에서도 능력이 나오고 말씀을 통해서도 능력이 나오고 옷단을 통해서도 능력이 나타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할/
  본문은 공관복음에서 다 취급하고 있습니다. 막5:22절 이하에서, 또 눅8:40절 이하에서도 취급하고 있습니다.

 

  ▶1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 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 네 집에서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어찌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자, 예수께서는 '어찌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자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지났고, 은혜의 시대가 왔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되듯이 은혜의 시대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 엉뚱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은 지체가 높은 유대인의 고급 관리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한 직원'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개념으로 보면 어떤 하급관리처럼 느껴집니다만 본문의 원 뜻은 '통치자, 지배자'란 뜻을 가진 유대의 고급 관리를 지칭합니다.
  막5장에서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마태는 단순히 한 직원의 딸이라고 하였으나, 마가복음에는 회당장 중 한 사람인 야이로의 딸이라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외동딸이라고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당시 회당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이 쳐들어 올 때 하나님의 성전이 다 무너져 버렸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부터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성전 중심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작은 회당을 지어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회당장은 유대 장로들 중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입니다. 회당에는 열 사람의 관리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세 사람의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야이로는 그 중에 수석 회당장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로 말하자면 당임 목사 밑에 부목사, 교육목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공식적인 가르침이나 설교를 하지 않고, '공중 예배에 있어서 회중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었고, 일반적인 회당의 일을 지휘 감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배하는데 있어서 기도할 사람과 성경을 낭독할 사람을 임명하고 설교할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을 깨끗하게 하며 회당 건물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판을 포함한 회당의 모든 행정적인 사무를 맞아 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야이로는 학설에 의하면 나이가 많았는데 늦게 딸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어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늦게 둔 외동딸, 그 딸은 야이로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인생살이의 행복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이런 귀한 딸이 갑자기 죽음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동분서주 사방팔방으로 유명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가 보고 좋다는 약은 다 써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은 점점 죽어만 갑니다. 죽음이란 참으로 무상한 것입니다. 죽음은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노소의 순서도 없습니다. 빈부귀천 차별도 없습니다.
  히9:27절을 보세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언제부터 인생이 죽음이 왔습니까? 아담이 죄를 범한 후부터입니다. 창3: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 죽음 앞에 사람은 누구든지 숙연해지고 진실해 집니다.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권세도, 어떤 세상의 명예나 지위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유대의 고급 관리요, 종교 지도자요, 회당장 야이로도 열두 살 된 사랑하는 외동딸의 죽음 앞에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는 자기 딸이 '방장 죽었다.'고 했는데, 이는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숨이 막 끊어지려는 순간입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포기를 합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는 부모의 마음이 제일 아플 때입니다.
  이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께 뛰어온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사실 당시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최고의 사건입니다. 유대관리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판적인 상대로 보았습니다. 유대교를 무너뜨리는 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비판을 했고, 틈만 있으면 죽이려고 기회만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야이로가 절을 했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겸손과 존경을 다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주님께 최대의 존경과 겸손을 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야이로의 믿음을 한 번 보겠습니다. '내 딸이 방장 죽겠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내 딸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딸이 살겠나이다.' 이런 믿음이 귀한 믿음이요,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아멘!/
  야이로는 예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믿었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믿/
  인간은 인간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하루살이의 생명도 한번 죽은 것은 다시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도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교에 사두개파 교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막12:24절에서 부활이 없다고 우기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꾸짖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분은 세상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사람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고장이 나면, 그러니까 병난 것도 죽은 것도 고칠 수 있고, 살릴 수가 있습니다. /믿/
  마19:26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19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예수님은 야이로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일어나서 따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과거를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의 지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지위도 묻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옵니다. 과거에 도적질한 사람도 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무엇을 봅니까? '만약 당신이 오셔서 우리 딸 머리 위에 안수해 주신다면 낫겠습니다.' 이런 믿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십니다. 야이로가 무릎 꿇고 절했을 때, 그 속에는 진정한 회개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은 죽음 앞에서 위협을 받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로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큰 무리들로 인해 에워 쌓인 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또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옷자락만 만져도 낮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12년 동안 고통 받았던 그 혈루 근원이 깨끗이 마르고 치료받았다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묘하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낫게 하신 사건의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종 뜻하지 않는 중에 놀라운 발견을 하고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자기의 아버지 나귀새끼를 찾으러 다니다가 뜻밖에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만나 '네가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또 '콜롬부스'가 인도를 찾다가 뜻밖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의 이 여인도 이런 감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청을 받아 그 집에 가는 도중에 뜻 밖에 초청을 받지도 않은 이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 뒤에서 그 옷을 만져서 열두 해나 앓고 있던 혈루증이 낳게 되고 구원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기적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20-22절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본문에서는 두세 절로 간단하게 소개되었지만, 막5장에서는 25-34절까지 이 사건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12년 동안 저주스러운 혈루증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은 지칠 대로 지친 사람입니다.
  세월이 가면 낫겠지 하는 기대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신념도 무너졌습니다. 유명한 의사면 고칠 수 있으리라는 소망도 헛것이 되어버렸고,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재산은 탕진되고 몸과 마음을 다 상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혈루증은 어떤 병인가? 구약에서는 유출병이라고 불렀던 이 병은 고통스러운 병일 뿐만 아니라 여인들에게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병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도 꺼리는 병입니다. 이 병은 쉽게 말하면 신체 내부에서 어떤 이상 때문에 하혈을 하는 그런 부인병입니다.
  레15:15-30절에 보면 혈루증에 걸린 사람에 대한 규례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 병은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있어 일단 이 병에 걸리면 ▶몇 가지 제재가 가해집니다.
  ⑴부정한 사람이라고 해서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 하나님께 나가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은 저주와 심판과 다를 바가 없는 형벌이었습니다.
  ⑵그녀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그를 만질 수도 없습니다.
  ⑶공식적인 모임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⑷대부분 가정으로부터 버림받거나 남편에게 이혼을 당합니다.
  ⑸유대 율법에 따르면, 피를 흘리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문둥병자의 같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록도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한 병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는 작은 행복조차도 박탈당했습니다.
  이 병이 얼마나 불행한 병이며 가혹한 형벌이 있는 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병으로 12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앞 사건의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도 분명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중 속에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만 하는 부정한 존재요, 이름 없는 얼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떳떳하게 나타내고 병을 고쳐달라고 할 자신도, 자격도 없었습니다. 물론 사람과의 접촉을 율법이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공개적으로 접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멘!/
  이 여인의 형편을 보자! 막5:26절을 참고해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여인은 좋다는 약, 용하다는 의사, 다 먹어보고 만나봤습니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혈루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녀는 양의, 한의, 민간의약 할 것 없이 모든 의원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의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들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습니다. 아프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무병이 장사'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 아픈 것이 상팔자입니다. 아프면 별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 고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고생을 많이 하게 되고, 어려움도 많이 당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12년 동안 좋다는 약과 좋다는 병원을 다 찾아다니며 치료했지만 재산만 날렸을 뿐 병은 오히려 깊어만 갔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여자입니다. 한마디로 절망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낫겠지 하는 기대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신념도 무너졌습니다. 유명한 병원, 유능한 의사면 고칠 수 있다는 소망도 헛것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지칠 대로 지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할/

 

  ▶막5장을 보면 그 여인의 믿음이 내 단계를 거치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①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첫 단계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막5:26-27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그녀는 많은 의원에게 시달림을 받았고, 재산은 모조리 탕진해 버렸으며 병은 더 중해졌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은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있는 바로 그때가 가장 위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문둥이도, 귀머거리도, 장님도 다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이런 좋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께로 나가면 틀림없이 고침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로 나간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소망 적인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소문이란 퍼뜨리는 사람이 있어야 퍼지게 됩니다.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복된 복음의 소식은 우리가 퍼 쳐야 합니다. 교회의 자랑은 우리가 퍼 쳐야 합니다. 그런데 뜬소문, 헛소문을 퍼뜨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소문만 퍼뜨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②이 여인은 들은 믿음에서 예수께로 나아오는 믿음으로 발전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소문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앞은 어디입니까? 바로 이 자리 교회인줄 믿습니다. 이 전은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믿/ 이 자리에 우리 주님이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주님을 만나려고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힘들수록, 아플수록, 어려울수록, 냄새나고 더러울수록, 주변 사람들이 만류할수록 오히려 더 주님 곁에 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③이 여인은 결단하는 신앙, 행하는 신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비참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예수님을 가깝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 다가갔습니다. 정면으로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 뒤로 갔습니다.
  이것이 큰 결단입니다. 이 여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였습니다. 그 분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냥 한번 예수님이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어떤 천으로 만든 옷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그냥 만져 본 것이 아닙니다. 치료를 확신하고 손을 댄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 손만 대도 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손을 댄 것입니다. /할/
  세상 사람들은 화려한 옷 붙들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있는 옷을 붙들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은 권력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자색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을 붙들기만 하면 거기엔 충만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옷을 믿음으로 붙들기만 하면 구원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치료함을 받습니다. 붙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붙들면 하늘 문이 열려지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렇게 믿음의 손을 그에게 대는 것입니다.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서로 부대끼다가 가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주님을 앙모하고, 신앙의 손을 그분의 옷자락에 대는 것이 예배요, 그런 사건이 예배 시간에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예배 시간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손을 댄 자에게 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④즉시 고침 받고 체험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내 옷의 손을 내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는 중에 주님에 옷이 어디 한 두 사람이 부딪치겠습니까?' 즉 주님의 옷을 다른 사람에게 닿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옷에 믿음으로 손을 댄 여인'이 있음을 아시고 그를 보려고 뒤를 돌아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나와서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할/
  여기 '평안히 가라'는 말은 '평안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평안 밖에서 맴돌았고, 남의 평안을 보기만 했고, 네게는 평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평안이 예비된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할/
  ▶이 여인은 두 가지 구원을 얻었습니다.
  ⑴육신이 건강해졌습니다. 12년 맺힌 한을 풀고 그 육체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⑵영혼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심령의 평안과 영혼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 평안이 축복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유세비우스'는 이 여인은 고향에 내려가서 병 고침 받은 사실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워놓고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병 고쳐주었다고 간증하다가 죽었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의 혈루증의 여인처럼 절박하지 않습니까? 절대 신앙으로 매달립시다. 끈질긴 신앙으로 매달립시다. 그러면 절대 응답이 오고, 절대 해결이 옵니다. /믿/

 

  ▶23절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지금 예수님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야이로 회당장 집을 향하여 갑니다. 지금 야이로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찬송 작가는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고 찬양했습니다.
  지금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행차가 늦어졌습니다. 본문은 야이로의 집에 도착한 것을 소개했지만 막5:35절을 보면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중간에서 이런 소식이 왔습니다. 이 말은 '이제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도 늦었습니다.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란 말과 같습니다. '기도한들 무엇합니까? 열심히 신앙 생활한들 무엇합니까?' 이런 소리와 같습니다.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다가오는 시험을 이런 부정적인 음성입니다. '너는 이제 망했어, 너는 이제 틀렸어' 이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듣습니다. '믿은들 뭐하며, 기도한들 뭐해' 이런 때 대부분이 실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막5:36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한번 따라합시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아멘!/
  그래서 믿고 예수님을 따라 집에 갔는데 본문은 어떤 상황입니까? 딸이 죽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환경을 통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었을 때 세 가지 의식을 합니다.
  ⑴슬픔을 표시하기 위하여 옷을 찢습니다.
  ⑵통곡을 합니다. 당시는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 돈을 주고 샀다고 합니다.
  ⑶피리를 불면서 애도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분명히 그 딸이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24절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그런데 막5:39절에서는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 비웃는 자들을 다 버리십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 앞에서는 역사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아멘!/
  우리 모두 믿는 자들이 되십시다. 부정적이고 비웃는 사람들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여기서 '비웃더라'는 말은 '예수님을 가소롭게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미친 자 취급을 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가끔 이런 비웃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비웃음을 통해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여러분들을 누가 비웃습니까? 비웃는 자들 앞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25-26절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그 손은 치료의 손이요, 축복의 손입니다.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는 손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그뿐입니까?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손에 얹으시고 축사하실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손입니다.
  막5:41절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님은 아침에 잠자는 아이를 깨우는 어머니와 같이 '소녀와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소녀가 뻘떡 일어났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⑴본문에서 나오고, ⑵눅7:11절 이하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⑶요11:25절 이하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할/
  혈루증의 여인은 자기의 믿음으로 병을 치료받았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아버지의 믿음으로 딸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본문 26절은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로 끝났지만 다른 복음서는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다시 살아난 거기에만 도취되어 기뻐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세심하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자!
  ①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스님이 예수 믿는다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율법 즉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확고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생명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이 사울로 있을 때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치는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율법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요, 의외 중에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우리는 요3장에 국회위원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을 대하게 됩니다. 그는 국회의원이었습니다. 또 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무엇인가 속 시원하게 해답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 후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할/
  ②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사람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만나 주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예수님은 살려 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믿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죽은 자녀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믿음을 보시고 자녀를 사랑합니다. 부모의 행함 때문에 자녀를 축복하십니다. 디모데는 할머니,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축복 받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자녀를 만나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③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충성하고 따라 다니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시신 앞으로 야이로 부부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건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시91:14-1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할/
  ④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을 보고 비웃는 사람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보고 잔다고 하시니 얼마나 비웃음거리입니까?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우리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시며 '달리다굼'하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명령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비웃는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할/ 비웃던 이들이 죽었던 소녀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5:42)이라는 말씀대로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축복으로 만나시지만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에게는 책망으로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만, 일군에게만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책망하실 분에게도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빌라도 아내에게도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왕에게도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12년 된 혈루증의 여인도 치료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죽은 야이로의 외동딸도 살리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요11장을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몹시 슬퍼하며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 때 부활 할 것을 안다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아느냐?'고 묻지 아니 하시고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서야 마르다가 '주님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안다고 대답하지 않고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아멘!/ 
  여러분! 주님을 아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주님을 아는 자는 많습니다. 예수님을 성현가운데 한사람으로, 교육자로, 윤리 도덕가로, 민중의 혁명가로, 시민운동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렇게 알아서는 구원도, 영생도 주님의 능력도 덧입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바로 믿기만 하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어떠한 일도 주님이 개입하시면 만사 오케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한 요14:1절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고 맡기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0년 6월 27일 대예배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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