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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세기 미국부흥운동의 주역 `찰스 피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1:43

19세기 미국부흥운동의 주역 `찰스 피니`

“예언적으로 선포된 것을 위해 기도하라. 성경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의 말씀들이 많다. 우리가 기도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이라는 예언적 선포가 있을 때 우  리는 이것을 믿어야 하며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드림으로써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자신의 처지에 적용할 의무가 있다.”(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찰스 피니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 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1795~ 1835)을 이끈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이다. 피니는 1792년 미국의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카운티 워렌에서 평범한 청교도 농부였던 아버지 실베스터 피니와 어머니 레베카 라이스 피니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피니가 2살이 되던 해 뉴욕 주 서부로 이사 가게 되었다. 피니는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유대어 및 법률에 관한 수준높은 교육을 받아 총명하고 유망한 청년으로 인정을 받았다.    

회의적인 법률가에서 확신에찬 전도자로

피니를 통한 각성운동은 자신의 영적체험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29살이 될 때까지 교회의 설교 내용 같은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주 목사와 논쟁을 했으며 교회 청년회에서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하면 한 번도 기도응답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비꼬곤 했다. 그러나 피니는 그가 즐겨 읽는 법률 서적들이 대부분 성경에 높은 권위를 두고 있음을 주의 깊게 보고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성경을 읽어나가던 피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모순이 결코 성경 때문이 아님을 확신하고 성경이 명백한 하나님의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갈수록 구원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니는 자신이 구원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성경을 읽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오면 성경을 법률서적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어 놓았다.

마음이 괴로워 기도할 때조차도 혹시나 밖에서 사람들이 들을까 하여 열쇠구멍을 막고 소리 죽여 기도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나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그러던 중 1821년 10월 10일 아침 피니는 그의 사무실에서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예수님은 피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냐? 너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느냐?”

피니는 당시의 회심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술 했다. “나는 주님의 발앞에 쓰러져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 그는 이어 “성령이 내게 임하셨을 때 마치 전류의 파장이 내 온몸을 꿰뚫고 흐르고 또 흐르는 듯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령의 사랑이 내게 밀려 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피니의 성령 체험은 바울이 다메섹(Damascus*현재 시리아의 수도)에서 빛과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린 회심한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다.

50년 동안 각지를 돌며 부흥집회 열어

이런 영적 체험 후 피니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1823년 6월 25일 그는 세인트로렌스(St. Lawrence)노회의 배려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이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조지 게일(George W. Gale) 목사의 문하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해 6개월 후인 그해 12월 30일 강도사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1824년 7월 1일 피니는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특히 1824년 봄부터 그는 서부지역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뉴욕 주 북부 지역 정착민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며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그는 여러 대도시에서 오랜 기간동안 부흥회를 진행했다.  

피니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어느 날 피니가 뉴욕 주에 위치한 소돔(Sodom)이란 미국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생긴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앉은 자리에서 땅바닥으로 엎드려 기도하고 울부짖었다. 당시 모습을 피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양손에 칼을 쥐고 휘둘러도 그들을 그렇게 재빨리 넘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넘어지기 시작하여 2분도 채 못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편 어느 날 피니가 뉴욕방직 공장을 견학하는 동안 일하던 한 처녀가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푹 쓰러졌다. 소녀는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순간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그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한편 이 공장의 주인은 “공장 일보다 영혼 구원의 일이 더 중요하다”며 그 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해 공장에서 부흥 집회를 열었다. 공장주는 모든 직공들이 집회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며칠이 지나자 모든 직공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

이외에도 피니의 사역과 관련해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피니가 유티카(Utica*뉴욕 주 중부 모호크강에 면한 도시)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 지방의 오네이다(Oneida)장로회 노회도 모였다. 당시 피니의 사역을 못 마땅하게 여긴 한 늙은 목사는 피니가 인도하는 집회에 격렬한 비난의 연설을 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에 깜짝 놀랐으며 나쁜 영향을 염려해 울면서 기도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늙은 목사는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피니는 뉴욕이건 필라델피아이건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일년 이상 계속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청중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다. 피니는 1825년 후반부에 도시 중심으로 집회를 가졌으며 뉴욕에서는 7년 동안 대집회를 가졌다. 1830년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가진 전도 집회 때는 시민 10,000여 명 중 1/10이 회개했고, 1,200명이 교인으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1831년 한 해 동안에 십 만 명의 성도가 회심을 체험하는 기적을 낳았다.

‘새로운 척도’ 운동 통해 미국 사회 개혁

피니는 다른 목사들과 달리 원고 없이 자유로운 형태의 설교를 했으며 개인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해주었다. 여성들을 회중 앞에서 기도와 간증을 하게 했으며 회심자들을 강단 앞으로 불러 세워 간증을 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소위 ‘새로운 척도’(New Measure)라고 했다. 피니의 새로운 척도운동을 통해 반노예운동, 여권신장운동, 형무소개혁, 금주와 절제운동 등 수 많은 사회개혁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피니의 자유분방한 예배방식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 세력은 피니에 대한 거짓 풍문을 퍼뜨렸으며 피니의 활동을 정탐해 방해공작을 했다. 적지 않은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자 않을 정도의 반대도 있었다. 피니는 일생을 통해 사회로부터 많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뒤에는 늘 주님이 함께 했다. 실제로 피니는 주님으로부터 반대 세력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음성으로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방해 공작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피니의 부흥운동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한편 미국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에 대한 거짓 송사(訟事)만을 믿고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피니를 심문함으로써 그의 집회를 방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위원 중 한 목사는 일부러 피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목사의 요청대로 피니는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다. 그 목사가 피니의 설교를 듣고 노회에 통보하기를 “피니의 설교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더 이상 피니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동시에 주님께서 피니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피니를 방해하면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로인해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를 반대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피니의 복음 전하는 일에 협조를 했다. 결국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약해졌으며 오히려 그를 지원하는 세력은 더 강해졌다. 이를 통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은 피니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됐다. 특히 당시 매우 보수적인 신학자였던 윌밍턴(Wilmington)의 길버트(Gilbert) 목사도 피니를 초청해 집회를 열었다.

피니, 일생동안 50만 명 전도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피니는 3,000명을 수용하는 한 독일계 교회에서 집회를 계속했다. 이 집회에서도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를 통해 미국의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피니의 부흥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100,000명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훗날 사람들은 피니의 설교가 성공한 원인을 그의 논리적 제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마음에 연유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피니 자신은 이에 대해 다만 성경에서 제시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목사이자 신학 교수였던 피니는 일생동안 확성기도 대충매체도 없던 시대에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었다. 통계에 따르면 피니의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 중 90%이상은 계속해서 변화 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회심한 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변화된 삶을 위한 성화(聖化)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피니 자신의 삶도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그 격렬한 어조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회개했던 것은 피니 자신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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