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할 수 없는 부활
요 20;1-10.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 이야기로 부활 이야기를 열고 싶습니다.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찬양한 시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부인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기쁨으로 차 있는 모습이 신기하여 물었습니다.
<오늘 아침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이 미소를 띠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습니다.
<부인! 그것은 오래 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자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부활의 첫 열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모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여인과 성령의 연합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성령으로 잉태된 것.>
이것을 모방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2. 죄사하는 권세를 모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인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 지 한 명도 더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 한 명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서기관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죄사함을 사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 누구도 죄를 사할 권세가 없습니다. 모방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자기가 제자들 앞에서 설법을 하면서 자기는 신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 무연중생 제도불능(無緣衆生 制度不能)
신은 죄많은 중생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하는 데 자기는 신적 연분이 없어서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삼세중생 제도불능(三世衆生 制度不能)
신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할 수 있어야 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하는 데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음으로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입보중생 제도불능(業報衆生 制度不能)
자기가 신이라면 중생의 모든 죄를 사하여 줄 능력이 있어야 하는 데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음으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누구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3. 빈 무덤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무덤을 남기게 됩니다. 지구 역사상 빈무덤을 남기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금요일 오후 3시였습니다. 6시까지 장례를 치루어야 토요일 안식일을 지낼 수가 있으니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닦을 시간도 없이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다만 여자들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일곱 귀신들렸었으나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일 새벽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이른>이라고 하는 원어는 <프로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밤을 네 등분한 중에 마지막 시간을 말합니다. 즉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치울 수 있을 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조건 갔습니다. 걱정하며 앉아 있는 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현장으로 가면 무슨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기록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아직 어두울 때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28장 1절에서 <안식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요?
성경을 주석하는 학자들은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어두울 때에 집에서 떠나 무덤에 오니 서서히 밝아 오는 새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을 종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앞으로 갔을 때 마리아를 너무나 놀라게 하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그 큰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알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요한 자신입니다. 이는 요한을 말하는 특징입니다.
<예수의 제자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19;26)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렸습니다. 요한이 먼저 달려서 무덤에 도착하였습니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훨씬 젊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살아 남아 있던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거의 100년 경에 순교하였습니다.그래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까지 가서 들어가지 못 하고 밖에서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베드로가 뒤늦게 도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성격답게 무덤속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세마포는 따로 개서 다른 곳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 때 밖에서 들여다만 보고 있던 요한이 들어 왔습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들어가서 보고 믿었더라>라고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만 빈 무덤입니다.
3,500년 전에 죽은 모세 시체도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영국 고고학자들은 시내산 2250m 지점에서 지하동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모세의 미이라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돌판 위에 반드시 놓여 있었는 데 돌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모세, 사악한 바로를 멸망시키고 동포들을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끌었던 용감한 지도자이며 하나님의 메신저.>
어느 종교나 자기 종교를 세운 창시자의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메디아에는 <예언자의 모스크> 사원이 있습니다. 그 곳에 마호멧 무덤이 있습니다. 회교의 상징입니다. 그 무덤을 회교도들은 자랑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죽었을 때 그의 뼈를 왕 8명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나누고 또 나누어 파씨만큼한 뼈들을 수없이 퍼뜨려서 세계 도처에 수많은 석가모니 뼈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산동성에 있는 공자 묘는 30번 이상을 증개축을 하였습니다. 22만 제곱미터의 땅에 공자 기념 성전이 있습니다. 가로 54m, 세로 34m, 높이 32m입니다.
중국 서안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도 볼만합니다. 동서 80m, 남북 50m, 높이 15m 크기의 무덤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무덤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0년 동안 70만명이 동원되어 만들었습니다.
이집트 가자에 있는 피라밋 무덤도 기상 천외입니다.
밑면의 가로 세로가 230m입니다. 높이는 210개 돌단입니다. 2.5t에서 10t 되는 돌만 250만개로 만들어졌습니다. 20년 동안 10만명이 만들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이중에 하나입니다.
묘비도 희안합니다.
시인 조병화는 이렇게 묘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처칠은 익살스러운 묘비명을 남겼습니다.
<나는 창조주께 돌아갈 준비가 됐다. 창조주께서 날 만나는 고역을 치를 준비가 됐는 지는 내 알 바 아니다.>
헤밍웨이는 묘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네.>
모두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돌려 주었습니다. 사실은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묻히려고 준비하여 놓은 무덤이었습니다. 전설입니다. 어느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에게 물었습니다.
<그 좋은 무덤을 왜 예수님에게 제공하였나?>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3일만 빌려 드리면 도로 내 것이 되.>
예수님은 무덤이 필요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미국 메사스츄세스주에 8살 난 톰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불구자여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주일학교 선생님이 프라스틱으로 만든 달걀을 한 개씩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부활주일에 올 때에는 달걀 속에 생명을 의미하는 것을 하나씩 담아 오세요.>
어떤 아이는 곤충을 잡아 넣어 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나무 잎을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벌레을 넣어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톰은 빈 달걀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톰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톰아! 너는 몸이 아파서 거냥 왔구나! 불편하지? 괜찮아.>
이 말을 듣고 톰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생각하였어요. 빈 무덤이 생명인 것처럼 빈 달걀이 생명이예요. 빈 무덤이기에 부활이 있는 것처럼 빈 달걀이기에 병아리가 태어나 생명을 얻어 나간 자국이예요.>
그 후 10개월이 지나 톰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톰의 관위에는 꽃대신에 빈 달걀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4. 부활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덤에서 다시 부활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김 준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대낮에 해를 보고도 해를 믿지 않는 것과 같다.>
독일이 낳은 유명한 문호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은 세상지식에 통달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회의와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자살하려고 약을 입에 대는 순간이었습니다. 만물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새벽 조용히 숨을 스스로 끊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새벽 공기를 뚫고 어디선가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찬양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이 자기 곁에 계심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솟아 올랐습니다. 재생의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곁에 계십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죽음을 인식시켜 주고 죽음을 준비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다가 가서 손을 꼭 잡고 물었습니다.
<아들아! 너 죽음이 무엇인지 아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나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
<어떻게 알았니?>
<나는 엄마 얼굴을 보고 내가 죽을 것을 알았어요.> 엄마가 아들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을 때 엄마가 너를 안고 네 방 침대에 눕혔단다. 일어나 보니 네 방이었지?>
<네.>
<죽음이란 그런 것이란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사가는 것이란다. 너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가면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신단다. 예수님을 만나거든 빨리 달려 가서 예수님 뺨에 뽀뽀해드려라.>
비행기를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은 라이트 형제입니다. 이버지가 목사였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위험하기에 안 태워드렸습니다. 아버지 목사님은 매일 아들에게 비행기 한번 태워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들아! 네가 비행기를 만들었으니 나를 네 비행기에 태워다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비행기를 태워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불안하여 떨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무섭다고 내려 달라고 하셔도 안 됩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아들은 몇 번이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 아버지를 태웠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이 떠나가라 외쳤습니다.
<더 높이! 더 높이! 날라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더 높이 날라라.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나는 지난번 미국에 가서 스탠포드 대학을 둘러 보았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학교이고 미국에서 명문대학입니다. 그 학교를 세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리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는 미국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외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잘 생기고 수재이고 외아들인 그는 스탠포드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습니다. 장례를 치루고 난 밤에 그 아들이 꿈에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 곁에 있어요.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세요.> 꿈에서 깨어난 그는 외쳤습니다.
<아들도 살아 있고 하나님도 살아 계시구나!>
그래서 청년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만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모두 기부하여 만든 학교가 스텐포드 대학입니다. 그리고 고학생들을 모두 불러 장학금을 주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내 재산에 10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모두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부활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생은 B로 시작하여 D로 끝난다. 그런데 중간에 C가 있어서 소망이다.>
B는 birth 출생입니다. D는 death 죽음입니다. 그런데 C는 christ 예수님입니다. 출생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지만 예수님이 중간에 계시기에 우리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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