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건강한 가정은 권위가 살아있다! (엡 5:22-33)/이규현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7. 1. 09:39

건강한 가정은 권위가 살아있다! (엡 5:22-33)/이규현목사


우리는 살면서 어디를 가든지 권위를 가진 사람들과 연관을 맺게 됩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리더는 반드시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난 곳에 역량이 뛰어난 지도자 여럿을 보내는 것보다 평범한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많은 것보다 권위가 부여된 한 사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럿이 승합차를 타고 어디론가 갈 때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길을 안내하려고 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작은 조직체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권위는 존재합니다. 권위가 없다면 그곳은 울타리가 없는 집, 지붕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세상을 보면, 그 세상을 유지되게 하는 힘이 있는데 그것이 권위입니다. 국가에는 대통령이 있고, 군대에는 지휘관이 있고,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고, 교회에는 목사가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권위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적인 직위나 감투 때문에 존경하고 따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전에는 어느 정도 권위를 인정했던 반권위였다면 요즘은 아예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탈권위 시대입니다. 권위 자체를 부정하고 권위의 냄새만 나도 싫어합니다. 이제는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생들이 교사를 우습게 여기고 심하면 선생님이 얻어맞기도 합니다. 대통령의 이름을 비하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권위, 남편의 권위가 흔들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아들이 “아빠, 물 좀 가져와.”라고 하면, 아버지가 “이 녀석이 죽으려고!”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들이 “그럼 아빠가 나 죽이러 올 때 물 좀 가져와!”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존경의 분위기는 찾기 힘듭니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거부해야 하지만 권위는 인정되어야 합니다. 모든 권위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그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13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3~14)」 성경은 모든 제도와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를 위임받은 총독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에 순응하시고, 십자가에 묵묵히 매달리셨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 좋은 주인에게만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까다롭고, 임금을 떼먹기도 하고 부당한 대우를 하는 주인에게도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존경하느냐와 상관없이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운전을 하다가 교통 법규 위반을 했을 때 아주 젊은 경찰이 면허증을 요구하면, 가끔 연세 드신 분들이 “너 나이가 몇 살이야?”라고 호통을 칩니다. 법을 어긴 것을 단속하는 것과 나이가 어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경찰은 국가가 부여한 권위를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한국 사회에서는 경찰관을 때리거나 단속하는 경찰을 매달고 달리는 경우가 있는데 서구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국가 권위에 대한 모독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성경은 영적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가르칩니다. 다윗의 영성은 권위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권세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권위를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광야에서 힘든 세월을 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도피해 있던 동굴로 사울이 볼일을 보러 왔습니다. 사울이 무장을 해제하고 앉아서 볼일을 볼 때, 다윗에게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왕위에 등극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며 명령만 내리면 단칼에 목을 베겠다며 이 지긋지긋한 고생을 끝내자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다윗은 칼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이 아니라 그 왕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보았습니다. 인간 사회에 주어진 모든 권위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권위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름부음을 받은 후, 처음으로 한 일은 나쁜 왕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미래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수업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그 왕을 세운 절대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에게 순복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진정한 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년에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의 왕권에 도전하고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 압살롬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경 안에는 권위에 도전했다가 혼이 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종종 나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립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보호하는 일에 아주 민감하고 관심이 많습니다. 인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그 권위를 허락하신 하나님과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권위에 대한 불순종과 거부는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거부와 반항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권위와의 관계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유심히 보시는 것입니다.


신약의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종들은 상전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노예제도는 악법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바울은 노예제도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 종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권위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주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언젠가 심판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노예가 노예의 위치에서 주인의 권위 아래 어떻게 순종의 삶을 보이는가,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를 보일 때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바울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삶이 변화되자 억지로, 숨어서, 때로는 거짓을 행하고, 게을렀던 삶이 변하고, 자발적인 순종과 더 적극적으로 주인의 일을 감당하자 주인이 놀라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주인들이 그 원인을 찾아보니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가 무엇이기에 그들을 이렇게 바꾸었는가 하고 복음을 접하게 되고 주인들이 변하게 되자 마침내 노예제도의 해체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삶이 변하고 주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 하나님이 직접 다루십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권위의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의 근원은 권위에 대한 부정 때문입니다. 권위가 흔들리면 세상 전체가 흔들립니다. 기초가 없는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사실은 오늘날의 가정에서의 남성의 권위 상실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남편의 권위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엄마에게 물어보라며 떠넘깁니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빠보다 엄마의 권위가 더 높아지면 아이들은 권위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아닙니다. 가장이 바른 권위를 사용하지 못할 때 자녀들은 사회생활에서 다양한 권위들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권위를 가진 사람과 편안한 관계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일은 잘하는데 일정한 주기마다 직장 상사와 싸우고 직장을 옮겨 다닙니다.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심지어 교회에서도 목사와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결혼하여 가정 안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바른 권위를 행사할 줄 모릅니다. 바른 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권위들과 불편한 관계는 결국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역기능적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은 자녀들은 성장한 이후에도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반항심이 표출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거부하고 괜히 싫어하며 거리를 둡니다.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입은 딸들 가운데는 남성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심하면 결혼을 기피하기도 하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남성에 대한 잘못된 관점으로 부부 관계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역기능적인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권위에 대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권위에 대해서 반항적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누르려고 하는 것 같거나 자유를 침해당하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조직체 안에 들어가서 상사와의 관계, 선배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자주 일어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에 늘 실패합니다. 나이 든 윗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힘들어합니다. 자신도 나이가 꽤 되었는데도 어떤 권위 앞에 서면 주눅이 들면서 말이 나오지 않고 어색해집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억압했던 역기능적 권위를 사용한 아버지의 경험 때문에 그 시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권위 앞에 서는 순간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과 격차가 없이 아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종종 봅니다. 손님이 오면 아이들도 대화에 참여해서 아이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줍니다. 한국사회에는 권위주의와 유교적 문화가 강합니다. 자세히 보면, 특히 남자들은 권위로 인한 상처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좋은 권위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아버지들도 자신의 아버지가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기능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보고 자란 아이가 아버지가 되어서 또 역기능적인 모습으로 권위를 사용하면서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정에서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2~23)」 남성과 여성 모두 각자의 성경적 위치와 모델을 붙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의 머리로 남자를 세우셨습니다. 가정에서 남성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하고 남편의 권위는 가정의 머리로 보호되어야 합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어야 합니다. 남편으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에는 남편의 권위가 많이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의 모델을 잘 볼 수가 없고,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집니다. 한국에서 자녀를 명문학교에 입학시킨 부모들이 모여서 결론을 내린 것이 있습니다. 자녀의 체력이 좋아야 하고, 아버지의 쥐꼬리 월급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재산이 있어야 하고, 엄마의 정보력과 분석력이 뛰어나야 하며, 아버지의 무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풍자입니다. 엄마, 할아버지는 있는데 아버지는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남편, 아버지의 권위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한 때,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유행했습니다. 20대의 간 큰 남자는 아내에게 밥 차리라는 것이고, 30대의 간 큰 남자는 아내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것이고, 40대의 간 큰 남자는 외출하는 부인을 쳐다보는 것이고, 50대는 몇 시에 들어오느냐고 묻는 남자이고, 따라가도 되냐고 묻는 60대는 간이 배 밖에 나온 남자라고 합니다. 가정의 위기는 권위의 상실에서 왔습니다. 권위가 없는 곳은 가정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권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남편으로서의 권위, 혹은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무너진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권위로 둘러싸인 세상 속에서 권위와 어색하거나 혼란한 관계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권위가 바로 세워져 있지 않은 가정은 사사시대와 같습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무정부상태입니다. 리더의 권위가 없으니 무질서와 혼란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권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그런데 그 힘이 중심을 잃어버리면 가정에도 각자의 위치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리더의 권위가 인정된 곳에는 모든 위치가 정리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자기 위치를 잃어버립니다. 오늘날 가정의 혼란은 가정 안에서 모두가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 권위주의라고 합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역기능성도 문제이지만, 권위 자체가 사라진 곳은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가정 안에서 권위의 실종은 기초가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권위는 일종의 비 오는 날에 우산과 같아서 거추장스럽다고 치워버리면 비를 맞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혹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바른 권위를 경험하지 못할 때 사회에서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친밀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도하거나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모든 선한 것들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오는데 육신의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가 되지 못할 때 영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 혹은 남편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성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존경의 마음을 보여 권위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리더십을 잘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리더십이 자라지 않으면 그 후유증으로 오는 고통은 고스란히 가족들의 몫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권위를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주눅이 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을 때 그가 온전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자유롭게 의논을 하고 온 가족이 토론을 할 수 있지만, 최종적인 권한은 남편에게 위임하는 것이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집안일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이 남편의 최상의 역할이 아닙니다. 남성으로서의 고유한 역할들이 살아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전보다 교육적인 기회가 많고 사회에서도 높은 지위의 여성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무능해 보이는 남편이 많아졌습니다. 돈도 아내가 더 많이 벌어서 남편의 수입이 부수입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남성으로서의 권위가 위축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을 때 아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아무리 탁월한 어머니가 있어도 하나님은 아버지를 통해 그 가정의 권위가 흘러가게 하셨습니다. 남편의 리더십이 자라지 않을 때 그 가정은 미성숙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남편의 권위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 열등감이 쌓이고 그로 인한 분노가 시도 때도 없이 폭발합니다. 남편이 뭉개진 상태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가정의 질서가 깨지고 평화는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리더십이 자랄 때 그 권위 아래에서 가족 모두가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웬만한 것은 남편에게 미루고, 책임을 지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십시오. 남편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존감이 회복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실패가 있더라도 아낌없는 지원과 격려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당신을 믿고 따르겠다고, 실패해도 당신 편이라고 하며 자신감을 심어줄 때, 권위가 살아나고, 그 권위 아래에서 가족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의 행동과 상관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아빠 노릇, 남편 노릇을 잘해야 순종할 것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는 인격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이 세우신 지위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인격적인 결함과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이 비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그 가족 안에서 남편으로서 위치를 조금씩 세워갈 것입니다.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남편 흉을 보면 안 됩니다. 권위에 흠집을 내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마치 머리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식물인간이 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안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가진 사람을 보호하시고, 그 보호 받는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이 보호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권세 가진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이 바른 역할을 감당함으로 그것이 우리 삶에 안정과 평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리더십이 바른 역할을 감당할 때 그 리더십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요함과 평안함을 얻게 됩니다.


이 땅의 아버지와 남편들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고스란히 가족들이 누리게 됩니다. 권위가 바로 세워진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세상 속에서 권위자들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나중에 좋은 권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큰 축복 중 하나는 좋은 권위자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는 축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만남의 축복은 좋은 선생님,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권위 아래에서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놀라운 자산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이 풀리게 됩니다. 가정에서 권위에 대한 순종을 배우지 못한다면 권위를 통해 주어지는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권위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배운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열어가게 되고, 뿐만 아니라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권위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가정에서 남편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 그 가정을 올바로 세우는 것만큼 위대한 헌신은 없습니다. 나 혼자만의 신앙이 아니라 함께, 남성이 온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때 그 가정의 영적 권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남편이 영적인 가장, 제사장으로서 거룩한 손을 들어 중보하는 권위자가 될 때 그 가정은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아름답고 견고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아빠와 남편을 축복하고, 건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격려하여 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과일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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