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말씀대로 삽시다/ 에베소서 5:22~3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7. 1. 09:56

말씀대로 삽시다/ 에베소서 5:22~3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개역, 에베소서 5:22~33]

 

 

지난번에 왔을 때는 집사라니까 마음이 푹 놓이고 여유가 있더니 전도사라니 괜히 좀 떨리고 그러네요. 아직은 집사라는 게 마음이 편한데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고 잘 하게 된 다음에 불러주시면 오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빨리 오라고 하셔서 대단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왕 이 교회의 전도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제가 생각하기에 소중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오늘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콸콸거리며 흘러넘치는, 참으로 위험스러워 보이는 강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감하게 한번 들어가보자라는 말씀을 저번에 드렸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내 뜻과 다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해서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럴 때 용기를 좀 내어봐야 한다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구요. 혹시 그동안 지내시면서 예전에 못했던 이런 일들을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해보았더니 아!, 이런 좋은 일들이 있더라. 이런 간증들이 많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 중에 아마 우리에게 가장 요긴하고 시급한 것이 사실은 이 본문 말씀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본문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남자분이나 여자분들이 느낌이 좀 다를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을 읽으시면서 기분이 조금 나쁘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습니까? 성경말씀 읽으면서 ‘기분이 나쁘다’ 하면 문제가 상당히 많겠죠, 그러나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은혜가 되고 감격되시는 분들이 남자분들은 조금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여자분들 중에 ‘읽으니까 참 감동이 되더라!’ 손 한번 들어보세요? 세 분이나 계시면 대단한 겁니다. 감사합니다. 보통은 잘 없어요. 제가 대학생들 몇 백명 모였을 때 물어봤는데요. 손든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쉽게 동의하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라고 마음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설명을 한번 드려볼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못살아!’ 하시면 할 수 없구요.

학교 선생님들은 승진을 위해서 울릉도에 가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울릉도 갔다온 어느 분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지금은 길이 제법 잘 닦여있지만 예전에 울릉도에서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 작은 배를 타고 섬 바깥 쪽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느 선생님이 자기 가족을 태워서 반대쪽으로 배를 타고 가면서 승진도 해야 되겠고 점수도 따야 되니까 오긴 왔는데 이렇게 가다가 “만약에 배가 물에 가라앉기라도 하면 내가 누구를 제일 먼저 구해내야 될 것인가?” 이 고민을 하면서 그 배를 타고 다녔다고 그래요. 자기 부인하고 남자 아이, 여자 아이, 자기하고 네 명이 타고 가면서요. 그게 어느 정도로 심각한 고민인지는 저도 겪어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같으면 이 세 사람 중에 누구를 제일 먼저 건져내야 될 것 같습니까? 문제를 조금 더 어렵게 만들까요? 거기에 아버지 어머니까지 타셨습니다. 부모님 두 분에 아들, 딸 그 다음 부인. 다섯 명이 그 배를 탔다고 칩시다.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밖에 못건져요. 누구를 건지겠습니까?

아이

예? 아이를 건져요? 부모님을 버려두고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욕을 얻어먹을려구요. 설마 아내를 제일 먼저 구하겠다고 하시는 분 여기 없지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아마도 천하에 불효자라고 욕을 얻어먹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아내라고 대답하시는 분 있어요? 있어요? 에이, 본인의 고백이 아니고 옆에 분을 가리키며 이분요 하는 그것은 믿을 수 없어요. 아! 한 분 계시네요. 결혼 참 잘하셨네요.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답인가에 대해서 이런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조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나중에 마칠 때쯤에 다시 한번 더 물어보지요.

자, 그럼 성경을 봅시다.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랬거든요. 이중에 어느 단어가 제일 마음에 안듭니까? 복종요? 마음에 안 들어요? 복종의 뜻이 뭔데요? 순종이나 복종이나 비슷해요. 전 옛날에 이 복자가 엎드릴 복자가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엎드려서 따라간다. 야, 이것 좀 심하다. 아무리 내가 남자지마는 좀 심하다. 이래서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게 엎드릴 복자는 아니예요. 그냥 순종하고 잘 따라간다라는 뜻이예요. 복종하라. 기분이 조금 나쁘죠. 그 다음 것도 한번 보세요. 23절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이심이라’ 여기도 좀 아멘 하기 싫은 단어가 하나 있어요? 아멘이예요? 모두가 아멘 하면 저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구요.

아멘

그러면 저 그만하고 가야 되는데요? 어느 단어가 좀 싫어요? 머리라는 거요? 남편이 몸의 머리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절대로 이게 기분 나쁜 말이 아니예요. 그런데 성경을 잘 안 읽고 이걸 가지고 욕을 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참 많습니다. 복종하라를 왜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요. 바로 그 앞에 보세요.

20절. 21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는 말씀이 나오죠? 피차 복종하라가 뭐예요? 서로간에 복종하라는 얘깁니다. 믿는 우리는요. 서로간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거는 뭔데요? 본전이잖아요. 남편은 그러면 아내에게 복종 안 합니까? 해야 된다는 뜻이예요. 그 말씀이 어디 있는데요? 앞에 있잖아요. 피차 복종하라 했잖아요. 그러면 아내들아 하고 특별히 복종하라는 말 별로 기분 나쁜 말 아니네요. 믿는 성도가 서로서로 피차간에 복종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복종을 하되 특별히 아내들아 복종하라는 거는 별로 기분 나쁜 일은 못되잖아요. 아내는 복종하고 남편은 명령만 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복종하라는 뜻이,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피차 간에 복종하라는 이건 무슨 말이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믿는 성도가 피차에 복종하라는 것은요, 서로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존중하고 아껴주고 말을 주의해서 하는 이런 관계입니다. 피차간의 복종이 믿는 성도간에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요것만 따로 떼내서 생각하지 마세요. 기본전제가 그렇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아내들에게만 특별히 해당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요. 나이가 많다구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젊은 사람에게, 옛날 우리는 다 그랬잖아요. 젊은 사람이 “안녕하십니까?” 하면 어른들은 뭐라고 대답해요? “오냐” 이러죠.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옛날에 다 그랬어요.

제가 학교 처음 발령받아서 이것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아이들이 “안녕하세요?” 이러거든요. 저는 한국 사람이예요. 그런데 “오냐”라는 말이 선뜻 안 나와요. 왜 그런고 하니까 영어공부를 좀 해서 서양 물이 좀 들었거든요. 서양 사람들은 한 사람이 “굿모닝” 그러면 저쪽에서도 “굿모닝” 하거든요. 참 좋더라구요. 그걸 아는 제가 “안녕하세요?” 이러는데 “오냐”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 거죠. 그래서 우물쭈물하는 거죠. “오냐” 소리도 안 나오고 그렇다고 “그래 오냐 니도 안녕하냐?” 이것도 안되구요. 그러다보니까 순간적으로 할 말을 놓쳐버리는 거죠. 나중에 아이들이 그래요. “저 선생님은 인사해도 인사도 잘 안 받더라” 이렇게 되는 거죠. 문제가 참 많아요.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자연스럽게 “오냐”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도 몇 년이 걸렸어요.

남편과 아내뿐만 아니라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 간에도 서로 복종하며 사는 것이 기본이구요 그 말의 올바른 의미는 서로가 존중하고 아껴주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 아까 기분 나쁘다 그랬죠. 머리가 왜 기분이 나쁜고 하니까 우리는 머리라고 하면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위의 사람은 밑의 사람을 억누르고 강제로 시키고... 그런 걸 말하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거 맞아요? 그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강제로 뭐 시키는 거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그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뭘 하셨어요?

십자가에 돌아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오늘(부활절) 그 얘기 안 하면 나쁜 사람이죠.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요. 머리되신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머리가 그런 거예요. 모르는 게 속편합니다. 괜히 알아서 내가 이 교회에 머리에 해당된다 그러면요, 교회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구요? 이 여자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게 머리예요, 그게. 오늘부터 집에 가서 “당신이 머리해...” 아마 머리 반납 사태가 생길런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런 의미인데 부인들이 왜 기분 나빠해요? 되돌아가서 다시 한번 봅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랬지요. 사실은 복종에 관심을 더 두지 말고요. ‘주께 하듯 하라’에 두면 됩니다. 남편을 뭘로 생각하구요?

주님.

주님이라고 생각하라는 얘깁니다. 남편을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분이 성경에 한 분 있다고 어디 나오는데요.

사라.

예. 이 교회 와서 성경 얘기하면 참 재미있어요. 다른 데 가면 대답이 안 나오는데 여기는 어쨌건 나오거든요. 이렇게 대답을 하시면 얘기하는 사람도 참 재미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순종했다고 합니다. 감동되시는 남편들은 아내를 쳐다보지 말고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길래 아내가 그랬을까 하고 자신을 먼저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다시 얘기 드리겠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 하고 하는데요. 이것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하셨냐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고요, 자신을 주셨을뿐만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신 분입니다. 그런 주님에게 우리가 마음을 드리는 것처럼 남편이 앞으로 나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할 건데 수고하는 머리를 그렇게 대접해 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남편은 그렇지 않은데요? 성경의 이런 가르침을 안 배워서 그렇겠지요. 이제 달라질 것입니다. ‘주께 하듯하라’라는 이 말씀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여러분들 ‘주님께 복종하라’ 기분 나빠요? 괜찮아요? 괜찮습니까? 어 이상하다. 주님께 복종? 그건 기분 안 나빠요? 주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니까 우리는 주님께 복종합시다. 이건 전혀 기분 안 나쁘죠? 그러면 부부사이도 꼭 그렇게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머리가 되셔서 내가 전혀 기분이 안 나쁠 것 같으면 부부사이도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라고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분이예요? 좀 차이가 있는 분이예요?

같은 분.

같은 분이예요? 같은 두 분이 왜 한 분은 아버지가 되시고 한 분은 아들이 되시나요?

본을 보이신 것. 아버지에게 아들로서의 복종하심.

두 분이 같은 분이라는데요? 위 아래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아니고요? 좋습니다. 똑같은 분인데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부부사이는 똑같은 사이예요. 똑같은 사이인데 하나님의 본을 따라서 우리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거죠.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질서일 뿐입니다. 누가 더 높고 낮고 그런 차이가 아니예요.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존재하고 계시니까 그 하나님의 모습을 부부라는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참 성경을 잘 가르치고 말씀대로 산다는 제 친구 부인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남편이 존경스러워요?” 하고 물었더니 “그래야 되는데 그게 잘 안돼요.” 하더라구요. “왜 잘 안되는데?” 그러니까 자기 어릴 때 자기 집은 아주 부잣집이었고 남편되시는 분은 그 동네에 살았는데 참 가난했대요. 그래서 그 동네에 자기 집만 텔레비젼이 있어서 저녁에 텔레비젼 틀어놓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여로’를 보았답니다. 저는 여로가 방송될 때에 고등학생쯤 됐었는데요. 저는 그 프로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게 있다는 거는 알았지만요. 그래서 저녁에 여로 할 때만 되면 동네 어른 아이 다 모여 오는 거죠. 그 중에서 마음에 들고 예쁜 애들은 “너는 마루에 앉아” 평소에 좀 밉보인 애는 “너는 나가” 그러고 지금 자기 신랑은 어디쯤 있었냐 하면 “니는 지저분하니까 저 쪽에 기둥 있는 데서 봐” 이랬는데 거기 서서 코 질질 흘려가면서 그것 봤다고 그래요. 그런데 지금 결혼해서 남편을 존경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자꾸 옛날 그 모습이 생각이 난데요. “어쨌거나 집사님, 옛날 그 생각은 고치는 게 맞지요?” “예, 맞아요” 맞는데 그게 그렇게 잘 안된답니다. 지금 남편이 자기보다 못하다고는 전혀 생각 안 하면서도요. 그렇더랍니다.

다시 말하면 그게 쉬운 일은 아니란 뜻입니다.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저 아주 쉬운 것이 잘 없어요. 쉬운 듯 싶어서 해보면 참 어려워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요.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고 실천을 해보면 그 속에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는 거죠. 남편에 대해서 별로 존경할 마음이 없는 이야기, 가령 남의 집에 가서 “우리 남편이라는 사람 있잖아”. 사람이라 그러면 그것도 다행이죠. “우리 그 웬수 있잖아” 하고 온갖 흉 다 보는 경우 있죠. 전도 실컷 해놓고 그런 소리 한마디만 했다면 그건 그 동안의 모든 전도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무서운 일입니다. 교회를 허무는 짓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얘깁니다. 존경에 흠이 될만한 얘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농담이라도요.

보통 여자분들은 잘 그러대요. 집에 아이 하나 더 있다고 하대요. 아이 둘 있는 집에 아이가 몇이냐 하면 셋이라고 하대요. 작은 아들 둘하고 큰 애 하나. 큰 애 하나가 누구예요? 남편들이 애기 짓을 가끔 하긴 하죠. 가끔 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입니다. 그걸 밖에 나가서 아예 애기 취급을 한다구요? 아니예요. 결혼하지 않은 혹시 처녀들은 이런 얘기를 기억해두시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결혼하겠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평생 주인으로 모시고 섬겨야 할 주인을 하나 지금 선택한다고 생각하시면 틀리지 않습니다. 저 사람을 평생토록 내가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결혼하십시요. 쓸데없이 분홍빛이니, 장밋빛이니 하면서 허상에 젖은 행복을 꿈꾸지 말고... 그런 꿈은 일찌감치 깨는 게 맞습니다.

그래놓고 좀 넘어갑시다. 남편들아 쪽으로 가야죠. 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래요?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하라는 얘기죠? 죽기까지 하래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얼마만큼 사랑하셨느냐를 기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그것만 생각하지 말구요. 선악과를 따먹은 그때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수 많은 선지자들을 쭉 보내오셨던 것. 그것을 다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나 나귀도 제 주인을 알건만 이스라엘은 자기 주인을 몰라본다’ 이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구약에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래도 안 되니까 결국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기까지 하시는 거죠.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요? 말을 지독하게 안 듣는 그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이후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매일 매일 체험하면서 살았죠. 그런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라했습니까? 아니요! 광야에서 매일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렇게 살았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해서 전쟁에 이겼습니까? 자기들이 잘나서 이긴 것 별로 없어요. 여리고 성? 뺑뺑이만 돌고 이겼어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셔서 그 전쟁을 다 이겨놨는데 거기에 살면서 하나님 잘 섬겼어요? 사사기 혹시 공부하셨을 거예요. 야∼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지독하게 말 안 듣는 백성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말 안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 안 듣는 그 백성, 그게 교횝니다. 그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아내요? 말 잘 듣고 이쁜 아내요? 아니예요. 어느 정도로 말 안 듣는 아내를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말 안 듣는 그 아내라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법이 그렇거든요. 그걸 구약에 잘 보여주는 선지자가 한 사람이 있지요.

호세아.

예. 맞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라는 겁니다. 바람이 나서 집나간 아내를 몸값을 주고 찾아와서라도 사랑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쯤에서 한번 물어봅시다. 아내들아 하는 게 쉬워요? 남편들아 하는 게 쉬워요? 아니, 우리가 남녀관계를 떠나서 공평하게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서 하라면 어느 것을 하시겠어요?

아내들아.

아내들아 하실래요? 그러면 인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기분 나쁜 얘기예요? 괜찮은 얘기예요?

괜찮은 얘기.

좋은 얘기죠. 저도 선택을 하라면 그 쪽으로 할 판인데요. 남편들에게 주어진 이 명령이 결코 가벼운 명령이 아닙니다. 부부사이에 싸움을 왜 해요? 큰 일 갖고 잘 안 싸워요. 부부싸움에 관한 유명한 얘기가 몇 가지 있는데 특히 치약 짜는 것 가지고 많이 싸워요. 남편은 치약을 맨날 중간을 짜서 눌러요. 그러면 부인이 들어가서 끝에서 똘똘 말아 올려요. 말아서 올려놨는데 그 다음에 가보면 또 허리를 꾹 눌러놨어요. “여보, 제발 치약 끝에서 짜면 안되나.” 그것 잘 고쳐집니까? 그러다가 싸우는 거죠. 부부싸움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것 가지고 안 싸워요. 싸우다가 생각이 나거든요. 하나님께서 내게 뭐라고 하셨느냐. 목숨까지 버려가면서라도 사랑하라고 한 그 아내에게 내가 치약 때문에 싸움을 한다?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죠.

제가 옛날에 집사람하고 싸움을 조금 하다가 제 생각에 이거 뭐 하는 짓이냐 싸우면 안되는데, 그만 둬야 하는데 중지하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제가 집사람한테 물었죠. “당신 본적 어디야?” 우리 처가 주소는 대구시 북구 노원동 1645번지거든요. 그런데 “포항시 덕산동 236번지” 그러더라구요. 제 본적입니다. “그러면 됐다. 그만 싸우자.” 자기 본적 버리고 내 본적을 자기 본적이라 하고 사는데 내가 뭐 그것 가지고 싸울 일 있느냐 말이야. 성경까지 갈 거 없어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만 싸우자.” 그래서 그만 뒀거든요. 그 이튿날 학교 가서 재미있다고 같이 있는 선생님들한테 이야기를 했어요. “어제 이러 이러다가 그만뒀다” 하니까 옆에 안강에 있는 어느 선생님이요. “야 그것 참 재미있겠다” 그러더니 부인이 성모병원에 근무하는데요. “나도 한번 해보자” 하고 집에 가서 일부러 물어봤대요. “당신 본적 어디야?” 부인이 멍하게 있다가 자기 친정 본적을 댔나봐요. 되레 싸워가지고 난리가 났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형님 때문에 베렸어요” “야, 상대를 봐가면서 묻는 거지 덮어놓고 남 따라 한다고 되냐?” 웃고 난리가 났었어요.

공부하느라고 대구에서 있을 때 일인데요. 어느 장로님이 가정의 경제 문제를 장로님이 혼자 꼭 움켜쥐고 전혀 내놓지 않는다더라구요. 사모님이 장에 가면 오늘 콩나물 얼마치 두부 얼마치 그거 일일이 계산해서 돈을 타서 가더라구요. 저는 그것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요? 성경말씀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게 어디 부부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못 믿고 존중하지 않을 바에야 뭐하러 같이 살아요? 부부가 사랑한다는 것은요 상당 부분을 믿어주고 인정해줘야 된다는 얘긴데 그런 식의 삶의 방식이 되면 참 곤란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내를 사랑한다 해도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라는 생각이 많이 드실 겁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 내가 사랑을 받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도대체 저 양반이 나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본인이 모를 정도같으면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셔서 한번쯤은 이야기를 좀 해보고 그러십시오. 경상도 말로 좀 쭈굴시럽고 아이들 말로 쪽이 팔린다 싶더라도 상대방이 그렇게 원하면 쪽팔리는 방법으로 사랑하십시오. 그게 맞습니다. 왜요? 받을 사람이 받았다고 여겨야 주는 게 되잖아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꼭 그렇게 사랑하셔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싫으면 여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시든지...

그 다음에 볼까요? 26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남편과 아내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이 둘을 그렇게 해서 깨끗하게 세워서 하나님 앞에 점도 티도 없는 교회로 세우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부부 두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섰을 때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부부 두 사람이 이렇게 살 때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두 사람만 잘 먹고 잘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대해서 지금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되라는 뜻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증거가 그 뒤에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구요?

교회.

어디 있어요? 그 말씀이? 32절 끝에 한번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 그러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뭐냐 하면 부부사이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내가 지금 교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부가 싸움을 해서 한쪽이 마음이 허물어져서 내가 여태까지 교회를 다녔으니까 다니긴 다닌다마는 천당까지 당신하고 같이 갈까봐 두렵다. 이런 말 나오면요. 교회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겁니다. 단순한 부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말 아닙니다. 교회를 허물고 있다는 얘깁니다. 왜 사도 바울이 거룩한 성경에 시시콜콜하게 이런 말씀을 주고 있느냐? 시시콜콜한 부부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여자분들은 그러대요. 시댁에 한 맺힌 것도 많고 불만도 많잖아요. 그래서 어디 나가면 ‘아이고 저것도 남자라고...’ 이런 말 많이 들어요. 사실은 교회를 허무는 일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교회를 망치고 있는 일입니다. 부부가 혹은 가정이 교회의 가장 기본 단위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피 흘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면서 세웠던 그 교회를 우리가 이렇게 허물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주위에 한번 보세요. 교회 열심히 다니다가 부부사이에 이게 잘 안되면 남에게 비난을 받기 이전에 자신들이 먼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조금 지나가서요. 28절 한번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자와 여자는 심리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는데요. 남자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많은 기쁨을 누릴려면요,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게 맞습니다. 아내는 받아서 기쁘고 남편은 그런 행복한 아내를 보면서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묘한 관계가 남녀 사이랍니다. 그래서 아내의 행복과 남편의 행복은 비례해서 나갑니다. 아내가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나도 행복해지는 것이고요. 아내를 놔두고 나 혼자 행복할려고 해서 좀 기분 좋은 일이 생겨도 이건 얼마되지 않습니다. 따로 국밥요? 식당에서는 좋은 메뉴일런지 모르지만 부부사이에는 정말 좋은 산해진미를 옆에 두고 초라한 국밥을 드시는 꼴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행복하면 할수록 그만큼 내 행복이 이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두셔야 합니다. 제 말이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시는 분은요.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부터 방법을 좀 바꾸십시오.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 보겠노라고. ‘아 그 말 맞아’ 속으로 동의하시는 분은 그렇게 살아 본 사람입니다. 아주 큰 행복을 맛본 사람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그렇지만 육체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고 느끼십니까? 진짜 행복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 맛보지 못한 더 높은 경지의 행복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십시오.

두 가지 목적이에요. 하나는 첫째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죠. 또 하나는 그로 인해서 내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손발이 좀 잘 안 맞아요. 남편이 모처럼 큰 마음 먹고 뭘 사든지 좋습니다. 좋은 선물을 비싼 돈 들여서 사왔는데 집에 들어오니까 부인이 뭐라 그래요? 보통 뭐라고 그래요? “뭐하러 돈도 없는데 비싼 돈 들여가면서 이랬냐”고 구박을 주는 경우가 가끔 있더라구요. 우리 집이 전형적입니다만, 아, 제 얘기가 아니고 우리 집 어른들요. 뭐 하나 사다 드려서 좋은 소리 듣는 경우가 잘 없으니까요. 그런데 절대 그러시면 안돼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세우고 속으로 돈은 좀 아깝더라도 돈을 보지 말고 뭘요? ‘저 분이, 정말 평생 꽃이라고는 사본 적이 없는 저 분이 오늘 나를 위해서 이걸 하나 샀구나’ 감동도 좀 하고 그래야지요. 안 하던 짓을 할려면 얼마나 힘들고 쪽이 팔리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선물이라고 사왔는데 그걸 무참하게 짓밟아요? 쪽이 팔리는 방법으로 감동을 표현하십시요. 좀 쭈글딱시럽더라도 말입니다. 돈이 아깝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부사이의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29절 중간쯤 어디를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라는 ‘보양’이라는 말이 나오죠. ‘보양’이라는 말이 그 바로 앞에 있는 ‘양육하여 보호하기를’이라는 말을 합쳐 놓은 겁니다. 순서를 바꿔서 합치면 보양이 되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처럼 부부는 보호하고 양육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나요. 다 달라요. 그런데 미안합니다. 보통 안좋은 말로 ‘빙시같은 게 그것도 못하나’ 이렇게 잘 나가죠. 그런 일이 있으면 ‘빙시같은 게’ 아니라 ‘아, 내가 할 일이 하나 있구나’ 뭐요? 양육하고요. ‘저 사람이 이 부분에 있어서 좀 잘 안되는구나’ 그러면 그걸요. 내가 맡아야 하는구나. 감당해야 되는 것이구나. 그걸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보양해야 하신다는 뜻입니다. 부부사이도 부족한 부분이나 맞지 않는 부분은 그렇게 보충해주고 서로 메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라’고 했죠.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는 결혼하고 지금 17년쯤 됐는데 아직도 부모를 안 떠나고 같이 살고 있거든요. 대흥 교회에서 언젠가 특송을 한번 하는데 저 또래들이 나와서 찬송을 불렀는데 부인들이 저 뒤에 앉아 있다가 찬송에 은혜 안받고 엉뚱한데 신경쓰는 사람들이 늘 있긴 있어요. 나중에 나오니까 이랬답니다. “결혼하고 살이 안찐 거는 홍 집사밖에 없네 다른 사람은 결혼하고 다 몸이 불었는데 저 홍 집사만 왜 안불었을까?” 하다가 답을 찾아냈대요. 다 밥이 바뀌었는데 홍 집사만 밥이 안 바뀌었다나요. 결혼하고도 부엌 일은 저희 어머님께서 하시거든요. 그래서 밥이 안 바뀌어서 그렇대요. 한소리 했어요. 찬송은 안 듣고 앉아서 엉뚱한 소리하고 앉았다고.

부모를 떠나라는 말이 뭡니까? 부모하고 같이 살지 말고 나가란 얘기예요? 설마?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떨어져 나오란 뜻입니다. 말을 바꾸면 부모보다 자기 아내를 혹은 자기 남편을 더 소중히 여기란 뜻입니다. 맞습니까? 부모를 떠나라는 얘기는, 부모를 떠나서 남녀가 한몸이 되라는 얘기는, 제가 좀 심한 얘기를 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절대 부모를 소홀히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모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를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일단 부모를 떠나서 남편과 혹은 아내와 한몸이 되라는 거예요. 말을 쉽게 바꾸면 남편과 아내를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게 정답이 맞습니다.

둘이 한몸이 되라는 얘기는 여러분들이 참 많이 들으셨는데 이것하고 아주 비슷한 표현이 성경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둘이 하나가 돼라. 이것하고 아주 흡사한 표현이 성경에 있습니다. 셋이 하나라는 말요. 아! 이 말 자체는 성경에 없네요. 셋이 하나가 뭐예요? 삼위일체죠. 누군가가 물으면 제일 대답하기 어려운 게 삼위일체죠. 누구에게 물어도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삼위일체를 잘 설명하면 이단이라는 말도 있어요. 왜요? 우리 머리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데 그걸 정확하게 설명을 해낸다면 이단이라는 거죠. 그만큼 삼위일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둘이 하나가 된다는 걸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걸 느낄 수 있게 되면 ‘아!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이렇게 한 분으로 존재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걸 어느 정도는 느끼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죠. 서로가 복종하고 서로가 이렇게 사랑하고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상상만 한번 해보십시오.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굉장히 어려우니까요. 그렇게 상상을 해보고 나면 ‘아!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렇게 존재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하게 하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것을 보내주신 이유가 하나님을 잘 알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속에 이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이 어디 나와있죠?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부부 이야기 실컷하면서 무슨 비밀까지가 나와요? 아니요. 이 속에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지 않으면 모르는 비밀요. 말씀대로 사는 부부의 삶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죠. 비밀을 영어로 뭐라고 그러죠?

secret.

감사합니다만 여기는 secret이 아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mystery란 말 있죠. 영어성경에 보면 mystery라고 돼있어요. mystery가 뭐예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란 뜻입니다. 부부의 이야기는 mystery입니다. 텔레비젼에 미스테리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보면 진짜 ‘신비’라고 할 만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더라구요. 그러나 이 속에는 정말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어요. 그렇게 사시란 뜻입니다.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부부 관계에 관한 얘기냐 교회에 대한 얘기냐. 어느 쪽이죠?

교회.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부부사이란 단순한 남녀 관계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교회를 허무는 일은 절대 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도 만약에 오늘 이후 부부사이에 싸움이 났다 하면 좌우간 옆에서 신고를 좀 해주십시오. 제가 신고 받고 달려가든지 무슨 수를 내야 안되겠습니까? 왜요? 교회를 허물다니요.

이 본문이 아직도 좀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안 느껴져요? 여자분들은 안 느껴지지만 남편들이 조금 손해다는 느낌이 안들어요? 들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성경은 결코 누가 손해가 되고 덕이 되고... 이런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괜찮으실 거라고 여겨져요. 아까 처음에 했던 이야기요. 배를 타고 가다가 물이 샜습니다. 누구를 먼저 구해야 된다구요? 아내요? 만약에 여선생님 같으면 남편?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을 소홀히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모여서 식구들끼리 아니면 다른 집에 가서 얘기를 하다가요. “당신은 식구 중에 누가 제일 소중합니까?” 하는데 ‘아들’이라고 대답하면 감히 단언하건데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다. 예수 믿는 흉내만 내고 있는 겁니다. 나는 아들이 가장 소중하다? 아니예요. 절대로. 성경대로 믿고 있지 않는 겁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찬찬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이라는 답이 우리나라 조상대대로 내려온 유교의 영향이라고 봐야지요. 생각을 바꾸시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서 우리 집에 전화가 왔어요. “홍 선생 두 달만에 잡든지 잡히든지 둘 중에 하나다.”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알았습니다.” 하고 끊었죠. 지금 우리 교단의 장로님이십니다. 집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요. “응. 두 달만에 잡힌 사람.” 여러분들이 결혼할 즈음에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서 이렇게, 이렇게 처음부터 질을 잘 들여야 한다 해서 코치 받은 게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성공해서 편안하게 사시는 분도 있을 테고 작전에 실패해서 쥐어 사시는 분도 있겠지요. 그래서 신혼초에 대리전쟁 많이 하죠. 제가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신앙의 선배라고 하는 그 분의 얘기를 인용합니다. 믿음의 선배라는 분이 결혼한 후배한테 성경적인 가르침을 전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달만에 잡은 그건 누구 얘기겠어요? 그것도 자기 얘기 아닐 거란 말이예요. 자기도 배웠을 거 아니예요. 어디서 배운 얘기예요? 불신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저 독학을 많이 했거든요. 두 달만에 잡아야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성경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쳐준 분은 한 분도 없었어요. 정말 한 분도 없었습니다.

이게 굉장히 슬픈 현실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왜 우리 후배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대로 이렇게 살자라고 얘기를 못해주는지 모르겠어요. 교회는 열심히 다니면서 이런 문제에 부딪치면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내가 옛날에 세상에서 물려받은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 혹시나 옆에서 믿는 후배가 결혼을 하게 되고 자녀가 결혼을 하게 되거든 반드시 이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쳐서 보내십시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 안 하고 ‘야, 처음부터 꽉 잡아야 한다’ 언제쯤 이런 생각들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혼초에 잡혀서, 지금까지 잡혀서 사시는 분들이 여기도 좀 계실런지 모르겠네요. 잡으신 분이 빨리 놓으시길 바랍니다. 계속가면 안돼요. 그래서 믿는 우리가 우리 후배들에게 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더라 그걸 가르치고요. 성경말씀대로 살자라고 말할 때 우선 이것부터 가능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꿈에 나타나셔서 내게 온 세계를 복음화 시킬 사명을 주시면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소리 하기 전에 뭐부터요? 내 가정에 일어날 수 있는 이것부터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할 기회가 계속 주어지면 이 비슷한 얘기를 아마 계속해서 할 것입니다.

제가 옛날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쳤는데요.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야 내가 그때 뭘 가르쳤냐?” 어느 학생이 그럽디다. “선생님은요. 3년 동안 하나님 얘기밖에 안했어요.” 제가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그럽디다. 하나님 외에 가르친 것 없대요. 제가 속으로 뿌듯하더라구요. 제대로 잘했구나 이랬죠.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붙이고 마치죠. ‘자, 오늘부로 나는 이렇게 살기로 한다.’ 나는 이렇게 사는데 집사람이 저렇게 살아줄까? 걱정되시죠?

성경을 배우는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가 모든 말씀은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아내들아 하는 구절은 아내만 기억하지 남편들은 기억하면 안됩니다. 남편들아 한 구절도 마찬가지로 아내는 기억하면 안됩니다. 말 안 듣는 아들 방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에베소서 6:1)’라고 써 붙였더니 이 아들이 한 수 더 뜨는 겁니다. 아버지 방에 에베소서 6:9을 적당히 잘라내서 ‘공갈을 그치라’ 혹은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부모 방에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도서 12:12)’ 이런 식이면 이것은 성경 아닙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구절을 인용했다는 것 아시죠? 항상 말씀을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순종하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항상 임하여 계실 것입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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