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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언 (4,24일 부활절 설교초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21. 08:37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증거하시는가? 눅24:27-35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눅24장의 두 번째 단락중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1-12절에서 천사들의 예수부활소식과 사도들에게 여인들이 예수님 부활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13-26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에 본문은 두 제자와 함께 저희가 가려는 촌에 들어가 음식을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니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자 예수님은 떠나고 안계십니다. 두 제자는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주의 살아나셨음을 선포하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요?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을 바로 알라 (27)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확실한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확실히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쓰인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 모든 성경]은 구약성경의 성문서(케투빔)를 말합니다.

‘모세의 글’은 모세오경 즉 토라를 말하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네비임)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의 주인공은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시며,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구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고, 예수님과 대화 하고 있고, 직접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작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함께 엠마오로 내려온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즘 40%가 웃도는 시청율을 보이는 “웃어라 동해야”에서 안나 레이커가 28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만날 듯 만날 듯 비껴 가다가 드디어 상보하게 됩니다.

처음 만나서 부모자식인줄 모르고 다만 마음만 끌리다가 결국 친자관계가 밝혀지기까지 시청자들로 하여금 궁금하게 하고 안타까워하게 합니다.

사고로 9살 나이에서 정체해버린 안나 레이커의 순수함을 시청자들이 사랑하고 아끼며 좋은 결말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흉한 사람들과 맞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긍정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동해의 모습이 많은 시청자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영안이 열려지지 않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슬퍼하며 실망하여 옛 삶으로 돌아오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주님은 그들과 동행하며 자신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길을 오늘 우리들에게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통해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대면하거나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더 무지하고, 그의 뜻을 모르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성경을 통해 만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요5:39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말씀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성경 속에 있습니다.

루터는 당대 최고의 구약학자입니다.

그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다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린 것입니다.

루터가 천주교를 적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은 사제들만 성경을 보게 한 것 때문입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되어있고 그것을 사제들만 읽게 한 것입니다. 루터가 카톨릭의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경번역 사업에 매진했고 마침내 그 성경이 오늘 날 우리 손에 까지 이르게 되엇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성격의 변화를 통해 삶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계시는지요?

예수님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려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살라는 주님의 명령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요?

둘째로 성도의 마음이 말씀으로 뜨거워져야 한다.(32)

닭은 알을 품기 시작하여 21동안 자기의 체온을 이용해 알을 품어 돌립니다. 먹이도 안 먹고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위험에 맞서 온몸을 곧추세우고 품은 알을 뜨겁게 합니다. 엄마의 심장소리와 따뜻한 온기를 전해 받은 알은 태동을 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하신 말씀처럼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뜨겁지’는 [카이오메네]는 ‘불을 붙이다’ 는 καἱω의 수동태분사로써 큰 감동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낙담하고 낙향하고 있는 자기들에게 찾아오셔서 직접 성경 말씀을 풀어 해석해 주신 큰 은혜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 합니다.

너무 감격해서 그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마음이 뜨거워진 것 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생명이 잉태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내 영적 생명이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마음에 뜨거움을 품되 바르고 옳고 좋은 것을 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에 미쳐서 가족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아예 인생을 도박판에서 날려 보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제 마늘밭에서 나온 111억은 인터넷에서 불법 도박판을 개장하여 벌여 들인 돈을 은닉한 돈이 또 다른 탐욕으로 노출된 것입니다.

도박장을 개장하면 판돈의 10%를 도박 개설자가 수익으로 가져갑니다.

확률이나 구조적으로 10번을 하면 본전이 완전히 탕진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오는 따는 재미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결코 잃지 않고 반듯이 딸 것이란 계산만 됩니다.

경마, 경륜, 화투, 윳놀이, 고스톱, 빠징코, 마작, 투견, 투계..... 수 많은 노름의 형태가 있지만 결국은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음욕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집창촌을 단속하니 이제 주택가로 침투해 영업을 합니다.

가정집을 전세로 얻거나 오피스 건물을 사글세로 얻어 사창가를 만들어 윤락행위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타락한 성매매 행위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저마다 무엇에 마음이 불타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정열과 재능을 어디에 불태우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본문은 바로 말씀에 불이 붙어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말씀으로 마음에 불이 붙었을 때 더 가시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며 축사하시자 눈이 열려 예수님인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불타오르자 영안이 열려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그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떠나온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도 죽었으니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지으면서 노예로 예전처럼 살겠다고 하던 제자들이 이제 죽어도 좋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뜨겁게 불타오를 때 비로소 성도는 비로소 성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이라고 뒤로 빼던 인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뜨겁게 사로잡히자 어떻게 변했습니까?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 증언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 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숨기에 급급하고 부인하기에 전전긍긍하던 정말 안타까운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 말씀에 사로잡히고 나니 행4:20에서 “우리는 보도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충성된 주의 제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를 성도답게 , 강하고 담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에 사로잡힐 때 성도는 성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나아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돈, 명예, 식욕, 음욕, 쾌락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오직 예수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말씀에 노예가 되어 뜨겁게 타오를 때 예수님은 성도 여러분을 직접 만나주시고 동행 하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요?

셋째로 자기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3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해석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자 망설이지 않고 즉시로 회개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의 두 가지 측면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먼저 회개는 잘못을 깨닫는 즉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일이 생긴 즉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기에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아직은 교회 갈 생각이 없고 다음에 퇴직하고 힘없고 할 일이 없을 때 찾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처럼 성도 중에서도 다음에 회개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고해성사를 하는데 고해 성사를 하기 전에 사전에 예약을 하고 찾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회개는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회개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후6:2“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합니다.

지금 이란 시기를 놓치면 기회는 영원히 다시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일이 있으면 바로 지금 하시기 원합니다.

다음은 회개는 본연의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던 성도의 본분, 망각했던 자기의 자리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회개에 대해 착각하고 혼돈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현재의 자기 자리에 앉아서 눈물만 흘리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회개인줄 압니다. 큰소리로 통곡하며 부르짖어 울고 잘못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만 하면 모든 죄가 다 사해진줄 지레짐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다 된 줄 아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처럼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후회하고 한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마음과 생각뿐만 아니라 돈으로 하는 것이요, 몸으로 하는 것이요, 행실로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삶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의 타락과 음란이나 우상숭배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체의 행위를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인격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위주의 인간성을 버리고 이제 타인을 위해 사는 이타적 성격, 남을 나보다 먼저 배려하는 삶으로 인격이 변화되어 말과 행동이 완전히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회개란 성격이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싸우기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던 성격을 버리는 것입니다.

따뜻하고 다정하며 온유한 성격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글에서 가장 큰 공부는 다른 사람의 과오, 책임, 허물, 죄를 내가 뒤집어쓰는 것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에는 이렇게 우리의 생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타락과 멸망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발걸음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흔드는 것입니다.

그릇된 행실을 그치고 선한 행실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릇된 행실을 그치고 선한 행실로 바꾸는 것입니다.

탕자의 회개처럼 앉아서 자기의 과오만 한탄한 것이 아니라, 즉시 아버지께 돌아와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 회개하자 즉시 자신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자를 구제했으며,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네베로 배상했습니다.

이와 같이 참회개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까?

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회개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회개를 하시기 원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요?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을 바로 알라 (27)

둘째로 성도의 마음이 말씀으로 뜨거워져야 한다.(32)

셋째로 자기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33)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시는지 바로 깨닫고 주님의 기대에 부합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에 이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을 바로 깨닫게 해주시고, 성도들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하여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성도는 한결같은 주님의 제자이므로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자기 본연의 자리를 찾아 충성봉사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서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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