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아버지의 유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8. 24. 16:17

아버지의 유언|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8 |추천 0 |2015.08.24. 10:28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34 

 8월의 밀씀 산책


내 아버지는 한의사가 왕진 후 바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언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유언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내게 들려주신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리운 모습으로 한 마디 하신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버지는 끝내 소천한 것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그 때 미국에서 학위과정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내가 아버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소천 두 주 후 우연히 문안전화를 드렸다가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그곳 목사님과 그 때야 추도예배를 드리며 울음을 삼켰다.


나는 크는 동안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첫째는 내가 초등학생 때 학교 귀가 길에 홍수에 덮인 길을 걷다가 익사해서 죽을 번했는데 길가에 자란 나무에 걸려 학교 소사가 헤엄쳐 와 살려 준일이고 둘째는 중학교 때 내가 전신주에 올라가 변압기를 잘못 건드려 감전되어 실신해 땅으로 떨어졌을 때였다. 아마 아버지는 나를 저승 문 앞에서 두 번 건진 아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래선지 내가 장성하여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이를 포함 연년생의 애들 셋을 아내와 함께 시골 교장 관사에 사시는 아버님 댁에 맡기고 초급대학으로는 안 되겠다고 4년제 대학에 편입을 결단했는데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이 단행한 혁명전선에 당신도 뛰어들 테니 걱정 말라고 며느리를 위로하셨다고 한다.

 

1978620일 나는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텍사스로 향하고 있었다. 이 년이 지나면 재직하던 대학에서 학비 지원이 끊나기 때문에 자력으로 학비를 조달할 능력이 없으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텍사스의 아내 친구가 그곳에 오면 여자도 월 1,000불 정도의 수입은 거뜬히 보장 받을 수 있으니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삿짐을 다 싸서 차에 싣고 댈러스에 가는 중이었다. 친구가 말한 부 수입이 사실이면 그곳에 머물러 학위를 계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나이 45세였는데 귀국하면 학위는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여행 중 휴게소(Rest Area)에서 나와 아내는 집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 두 통을 그때야 뜯어보게 되었다. 하나는 동생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동생의 편지는 아버님 병세가 악화 되고 있으니 빨리 귀국하라는 것이었고 어머님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내가 손자들을 돌볼 테니 너는 미국에 가서 남편을 도우라고 보냈는데 이제는 네 애들이 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진학지도도 어렵고 특히 큰 딸은 등교 시 가끔 빈혈로 쓰러지기도 하니 책임을 못 지겠다. 너라도 돌아올 수 없겠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댈러스에 도착하면 바로 귀국 준비를 하자고 내 결심을 아내에게 말했는데 결국 거기서 학위를 마치게 되었다.


성경에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라는 말이 있다. 가정의 평화는 순종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 세 자녀를 맡기고 대책 없이 대학 공부를 시작할 때도 또 은퇴한 부모님께 네 자녀를 맡기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도 모아 놓은 돈도 없이 그런 모험을 하느냐고 꾸중한 일이 없었다. 시골 교장으로 계실 때 우물가에 수양버들을 심은 적이 있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 그분이 학교 동산을 조경할 때 나무들을 전정하는 것을 보고 수양버들 가지를 전정가위로 잘라버렸다. 많이 화가 나셨을 텐데 그 때도 꾸중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지금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는 내 아버지를 연상한다. 그런 아버지가 병상에서 내가 힘들다. 제발 학위를 빨리 마치고 돌아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병원을 가지 못하고 한의사만 의지하던 아버지가 한 번은 진료를 받으러 갔더니 새빨갛게 젊은 의사가 술 끊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귀가 길에 못된 의사라고 했더니 후레자식이라 그러지라고 했으나 당장 다음날부터 술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연명하여 아들을 보고 싶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셔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아버지는 인내와 사랑과 용서를 유언으로 남겨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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