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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식한 전도가 아름답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29. 09:09

무식한 전도가 아름답다 
 

 


"마음이 괴로우십니까? 일요일엔 교회로…

이렇게 되뇌는 굵은 바리톤 음성의, 검정 프록코트의 이상한 신사를 50대 이상 서울 시민들은 기억할 것이다. 아마도 5,60년대 10년 가까이 서울시내 버스란 버스는 모두 타고 다니면서 <과감한 전도>를 하던 그는 지금쯤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을 것이 확실하다. 그즈음 학생 신분이던 우리에게, 그러나 그 신사는 조롱감이었다. 위아래로 검은 양복 일색인데다 검정 모자에 수염까지 기른 그가 버스에 올라 "서울 ××××호 손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하고 목소리를 쫙 깔면, 승객 중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선 킥킥거리는 소리가 새나오기 일쑤였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한결같은 차림새로 이 버스 저 버스를 갈아타거나 때로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던 그는 기인이 아닐 수 없었고, 어떤 의미에서 그 모습은 한동안 서울의 명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70년대 중반 이후 자취를 감추었는데, 아마도 세상을 뜬 듯하다.

뜬금없이 지금 그의 모습을 회상하는 까닭은, 세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을 노상전도로 보내다시피 한 그의 행각이 문득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사 이외에도 노상전도를 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오늘도 지하철이나 버스간 혹은 거리에서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띠를 두르고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용감한 신자들이 있다. 개중에는 노상에 엠프 시설까지 설치하고 마치 세일즈맨처럼 외쳐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날이 갈수록 이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그 자리를 돌아가기 일쑤인데, 그들의 주장인즉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글쎄, 놀랍다고 할까, 이때 혐오감 운운의 비판적 목소리 가운데에는 같은 기독교인들의 그것도 적지 않게 섞여 있는 것 같다. 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전도 방식을 못마땅해 하고 있지 않을까, 꼭 그런식으로 해야겠냐는, 매우 점잖은 질책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무식한 방법'이라는 비난까지 한다. 나 역시 그런 전도의 현장을 지나갈때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 하곤 했으며, 지하철이나 노상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가 은혜롭기는커녕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양 기분이 나빠지는 때가 많았다. 또 무슨 구걸하는 사람이 오는가 보다, 하고 내심 경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그 이상한 신사를 떠올리면서 지금 나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아니 나 지신의 <반기독교적 문화성(?)>에 오히려 혐오감이 드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상한 사람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 말씀대로 방법을 막론하고 씨를 뿌리는 저들이 아니라, 얌전하게 뒷짐지고 저들을 피해가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특한 반성이 드는 것이다.

이즈음은 교회마다 이른바 문화사역, 혹은 문화선교가 유행이다. 멀티미디어 시대, 영상 시대로 진입한 덕인지 CD, DVD플레이어 등의 시설은 당연히 상비되어 있고, 대형 스크린에 빔 프로젝터를 이용한 찬양도 기본이며, 동영상을 갖춘 홈페이지가 없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음향시설도 고급화의 길로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월드컵 대회 중계방송이라는 서비스에 주민들을 위한 영화상영을 하는 교회도 있다.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특강도 듣고, 미술전람회를 교회 안에서 열기도 한다. 수준 높은 정기간행물의 발행과 출판, 방송을 통한 전도의 소리도 복음을 확산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 분야를 넓히면 학교와 병원 등 문화적인 형태를 통한 전도의 방법들은 너무도 다양하며, 이 추세는 점점 더 그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문화 전도는, 그러나 그 당위성이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할 몇 가지 사안들이 있다. 그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지식이나 시설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그대로 버려 두고 앞으로 달려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말한 첨단시설의 결과물과 연관된 설교나 찬양, 기타 프로그램을 잘 익히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계층, 혹은 연령층은 본의 아니게 <무식한> 사람들로 남을 수 있다. 그럴 때 문화 전도는 이 같은 사람들을 전도의 사각지대에 방치해 두는 셈이다. 게다가 문화 전도의 그 편리하고 세련된 방법만을 즐기게 될 때 노상전도와 같은 전통적 방법은 또한 <무식한>것으로 외면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타기될 수 있다. 나로서 심각하게 염려되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노상전도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야만적인 방법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이른바 문화 전도의 백성들은 노상 전도의 의지와 능력이 없는 것이지, 그들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우리 지식인이나 문화인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길가에 서서 먼지를 마시며 "예수를 믿으라"고
부르짖는 저들을 존경할지언정 결코 경멸해서는 안된다. 저들은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룩한 종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을 현대의 스테판 집사들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을 외치다 거리에서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

인간의 문화란 필경 세속화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의 말씀 속에 문화전도의 당위와 필연이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는 또한 인간의 욕망과 쾌락으로 연결되곤 했음을 역사는 보여 준다.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영적인 안목의 슬기를 잃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것은 문학을 하는 내게 있어서도 영원한 딜레마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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