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택하신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9. 17. 15:25

택하신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 |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13 |추천 0 |2015.09.15. 10:22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37 

9월의 말씀 산책

 

전주의 기전여·중고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곳을 떠나야 했는가? 나는 이곳에서 신앙이 성숙해 갔지만 말씀의 묵상은 부족하였다. 다만 믿음의 형식만 따라 정신없이 살고 있었을 따름이다. 전주로 옮겨 올 때는 허니문 베이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자마자 한 달도 못되어 아내는 예수병원에서 4월에 첫 딸을 순산하였다. 이어 나는 대책 없이 씨를 뿌리고 아내는 거두어서 618월 첫 아들을 갖게 되고 62년에는 또 아내는 셋째를 잉태하였다. 아내는 두 아이를 유모차에 또 하나는 배에 담고 30분도 넘은 시장 길을 오갔다. 지금 같으면 여성의 반란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기쁨으로 이를 감당하며 좁은 셋방에 살면서도 글 쓰는 남편이 책상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밥상이면 된다는 것을 굳이 책상을 맞춰서 들여 놓았다. 우리는 참 가난하였다. 광주의 중학교는 봉급을 제때 주지 않고 이·삼 개월 늦게 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에 등록하면 군대를 안 가도 된다는 것 때문에 대학은 영화 촬영장의 세트를 세워 놓은 것처럼 겉만 멀쩡하게 세워 놓고 학원기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할 때였다. 그 대학의 부속 중·고등학교는 대학의 재단에서 운영하는 탄광이 어려워지면 함께 힘들었었다. 그것이 그곳을 더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광주를 떠날 때 단골 중국집에 외상값도 갚지 못하고 전주에 올라와서 용케도 셋방살이를 하고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또 셋째를 가졌다. 그래도 그때는 출산 경험을 쌓았다고 느긋이 진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만 일이 지나도 산기가 없더니 갑자기 하루 밤은 새벽 2시쯤 진통이 밀어 닥쳤다. 그 집에는 전화가 없었고 또 가까운 집에도 당시에는 전화가 없었다. 차를 잡으려면 학교에 가서 전화를 하거나 좀 번화한 먼 길까지 나가 기다리고 섰다가 차를 타고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다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병원은 미나리 강둑을 걸어 언덕길을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는 30분쯤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좀 어렵지만 걷기로 하였다. 미나리 강을 건너는 곳까지는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고갯길을 오르면서부터는 진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초조해지는데 업고 갈 수도 없고 큰일이었다. 나는 뒤에서 밀고 아내는 몸을 뒤로 젖히고 정신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진통이 오면 또 쭈그리고 앉아 얼마를 신음하였다. 둘이서 진땀을 흘리고 그래도 별 일 없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4시가 다 되어서였다. 병원에서 그녀는 미리 와 있는 한 산모를 딴 곳으로 보내고 금방 아들을 순산했는데 그 때가 121445분이었다. 아내는 길에서 출산을 할 번했던 것이다.


아내를 병원에 눕혀 놓고 학교 교무실에 와 보니 대전대학으로 옮긴 이곳 교장이었던 한 교장으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장학금을 마련해 주겠으니 대전대학으로 옮기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분도 내가 미국 유학을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시 유학 시험에는 필수로 영어는 물론 국사 과목을 통과해야 하는데 나는 그 과목들을 통과한 뒤였다. 그런데 한 교장은 선교부에서 미국유학 장학금을 받으려면 적어도 정규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욕망이 너무 컸다. 안정된 직장으로 옮겨주시고 귀한 생명을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감사히 받고 안정된 삶을 추구해야 하는데 나는 탐욕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퇴원하고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나는 한 교장의 이야기를 꺼냈었다. 어떻게든 회신을 해 주어야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 대답도 않고 있던 아내는 며칠 뒤 중대선언을 했다. 나는 유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애들을 다 키워 놓고 떠나면 너무 늦을 것이기 때문에 공부를 바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평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평탄한 길만 기대할 수 있겠느냐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기회일지도 무른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모험의 길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겨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28개월 만에 다시 미지의 길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가는 길을 축복해달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느냐?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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