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역사를 통해 바라본 오늘.../ 동부매일 발행인 박완규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1. 19. 09:25

 

 

 

 

 

  

 

 

 

 

 

 

 

 

역사를 통해 바라본 오늘...

  

 

  

    

 

 

  

 

 

 

 

  

 

어제는 한바탕 쇼를 했습니다.

 

저의 일정표를 보면 어제는 아침 일찍 무안에 있는 전남도교육청으로 가서 각 시군 미래교육위원장 협의회의 연찬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부리나케 무안으로 출발했습니다.

 

차 안에 조용필 콘서트를 녹음한 CD를 틀어놓고 가을비 내리는 고속도로를 노래까지 불러가며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2시간 여를 달려 도교육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보여야할 위원장님들이 한 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만석 서기관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교육청에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하고요. 그랬더니 아이고, 협의회 연찬회는 어제가 아니라 24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찬회 일정이 다시 잡혔는데 제가 일정표를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안까지 갔는데 그냥 여수로 돌아올 수도 없고 깍깝(?)했습니다.

 

이왕 간 김에 장만채 교육감님이 자리에 계시면 얼굴이나 뵙고 오려 했더니 안 계신 것 같았고, 김재인 교육국장님이 계시나 봤더니 그분도 출장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지인들을 만나 제가 이렇게 산다며 잔뜩 푸념만 늘어놓고 왔습니다.

 

그제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의 구회근 지원장님과 법원 관계자들과 함께 앵무산 등반을 했습니다. 처음 올라가본 산인데 참 괜찮은 산이었습니다. 능선 우측으로는 노을 진 순천만이 보였고 좌측으로는 광양항이 보였는데 좌를 보나 우를 보나 그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이순신대교 쪽을 보면서 김동현 부장판사님이 묘도 일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순신대교의 주탑과 주탑 사이의 거리는 1545m인데, 이 1545m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년인 1545년을 상징한다는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임갑수 형사과장님이 임진왜란 발발연도는 1592년인데 학교 다닐 때 국사선생님이 1592년을 암기시키기 위해서 1592년은 ‘이러구 있을 때가 아니옵니다’하고 외우라 했다고 해서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은 우리들에게 연도 암기를 많이 시켰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행히 외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지라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암기부터 했습니다. 암기를 해놓으면 언젠가는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국사를 배우면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의병에 관한 기록들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국정교과서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지요? 얼마 가지 못해서 다시 바로잡힐 역사를 임기 중에 잠시 바꾼다고 해서 유구한 역사가 어찌 바뀔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임진왜란은 어찌 보면 관군의 승리가 아니라 의병의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로부터 44년 후에 우리는 병자호란을 겪게 되는데 그 때는 의병 얘기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늘 궁금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의병들이 왜 병자호란 때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저는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백성보다 먼저 의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선조가 머물던 경복궁은 왜군이 아닌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타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백성들은 전쟁을 막지 못한 무능한 정부에 분노했고, 싸우지도 않고 의주로 도망간 선조에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족쇄와도 같은 신분제도에 분노해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이었습니다.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자신과 비빈들과 가신들만 살기 위해 백성과 강토를 버리고 중국에 복속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그 요청을 명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저의를 의심했고 실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명나라는 선조를 요동의 빈 관아에 유폐시키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낌새를 눈치 챈 선조는 자신을 무시한 명나라에 망명을 하기 보다는 왜나라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우유부단한 그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왕은 이렇게 도망을 갔지만 백성은 나라를 지켰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병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비들로 하여금 왜군의 수급을 가져오면 양민으로 회복시켜 주겠다는 면천법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왜군의 모가지 하나만 들고 오면 지긋지긋한 천민에서 벗어나 양민이 될 수 있다는데 의병을 마다할 노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만약에 그 제도가 제대로 시행이 됐다면 임진왜란은 짧게 봐서는 국가적 불행이었지만 길게 봐서는 조선이 계급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우선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한 선조는 이 약속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전쟁 영웅들까지나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의병장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덕령을 역적이라는 혐의를 씌워서 죽였습니다.

 

 

   

  

 

 

 

 

  

 

 

이순신까지도 제거 대상이었습니다.

 

선조실록에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늘 의심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까닭은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는 해석을 내놓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한 전쟁 중에도 당파싸움을 일삼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남인으로 분류했고, 서인의 부추김을 받은 선조는 이순신을 불러들여 한 달간 모진 고문을 하고 결국은 백의종군까지 시켰습니다.

 

정작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은 죽이거나 제거하고 서로 당파싸움과 이간질만 일삼는 간신만 남는 조정이 된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조정(?)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역사는 거짓말을 안 하고 늘 되풀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이 나라의 조정 모습이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힘들어 죽겠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 싸움이나 일삼고, 선조와 대비되는 대통령은 국민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른 말 하는 대신은 쳐내고 간신들에게 둘러싸여서 역사나 바꾸려고 합니다.

 

이순신 대신에 등장한 원균이 한산도와 칠천도에서 왜군에게 대패하고 조선수군은 궤멸됩니다. 그러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선조는 수군은 이제 끝났다고 판단하고 수군 해체령까지 내립니다.

 

그때 이순신이 장계를 올리지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고. 이 배로 사력을 다해 싸우면 능히 왜적을 무찌를 수 있다고. 오늘날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국에 우리나라에는 이순신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간신들만 득실거리고.

 

그렇게 긴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 전쟁을 통해 수백만 명의 백성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죽음 위에 선조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왜적을 죽이면 양민으로 신분을 회복시켜주겠다는 면천법을 아예 없던 일로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선조를 가장 치욕적이고 무능한 왕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44년 후에 병자호란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왕을 믿지 않았고, 조정의 간신들을 믿지 않았고,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에게 더 이상 속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경복궁이나 청와대나, 조정이나 여의도나, 지난한 당파싸움이나 좌파 우파의 이념 논쟁이나,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위정자의 모습이나, 외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나라의 처지나, 그 외세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이나, 그러고도 안에서는 제 잘났다고 서로 싸움질이나 해대는 모습이 과거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비 옵니다. 비오는 비요일에 또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고운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동부매일 발행인
박 완 규 올림

  

 

 

 

 

 

 

 

 이 분은 광주지방법원의 구회근 순천지원장님입니다.

광양 출신으로 법원 안팎에서 신망이 아주 두터운 분입니다.

만나보면 참 소탈합니다. 이분을 잘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