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사랑하는 자 요삼 1-8
오늘 말씀 요한삼서1-8절을 중심으로 [참으로 사랑하는 자여]라는 제목으로 주시는 은혜 받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삼서는 사랑의 사도인 요한의 세 번째 서신으로 요한사도가 가이오(Gaius)라고 하는 사람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우리는 수신자 가이오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행19:29), 더베의 가이오(행20:4),고린도의 가이오(롬16:23)등 여럿이며 가이오라는 이름은 우리의 철수처럼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신자는 사도가 참사랑하는 자 가이오이고 본 서신을 전달자로 알려진 데메드리오 그리고 비난을 받는 디오드레베가이다.
여기서 가이오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한 사도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즉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 요한 사도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발신자를 다만 장로라고만 밝히고 있지만 그 당시 그렇게만 말해도 알 수 있는 장로는 요한 사도였습니다.
장로(프레스뷔테르로스;πρεσβύτερος)는 교회의 직책이며 동시에 연륜과 인격을 존중하여 부르는 호칭으로 교회의 기둥입니다. 기둥이 되기 위해 나무는 땅의 욕망이라는 뿌리에서 잘려 죽어야 합니다.
생나무 마르지 않은 나무는 썩어버리고 벌레가 먹기 때문에 수분을 빼고 잘 건조해야 비로소 성전의 기둥으로 귀하게 쓰일 줄 믿습니다.
그리고 자기생각 연구 상식의 가지를 잘라내고 곧아야 정직해야 합니다.
비틀어지고 굽은 나무는 기둥으로 쓰지 못합니다.
단단하고 곧은 나무여서 지붕의 무게를 항상 버티고 이겨낼 만할 때 기둥으로 쓰이듯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오래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기둥은 반드시 주춧돌 위에 올려 져야 하듯 장로는 말씀위에 바로 서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내야 합니다.
이런 장로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는 자 즉 주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누구인가?
주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기원해야 합니다.(1-2)
참으로 사랑하는 자 (έν άληθεία)는 진실성 믿음성을 말하며 참으로써 , 진실로서, 진리에 부응하여라는 뜻을 가집니다.
사도는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최고의 기쁨이었기에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진정성을 가지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을 주는 성도가 바로 가이오였다는 것입니다.
바이오가 항상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였기에 장로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절 말씀은 흔히 3중 구원론이라고 잘못 해석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만약 영혼(ψυχή푸쉬케) 범사(πάντων판톤)강건(ύγιαίνειν휘기아이넨) 3 명사가 동격이라면 그렇게 해석해도 될 것이지만, 같이라고 해석된 카도스(καθώς) 때문에 구원론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자여라고 한 άγαπητός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인간적 친근감 이상으로 영생에 동참할 영적 동반자로써의 종교적 사랑이란 의미입니다.
여기서 카도스(καθώς) 는 영어의 as(같이)가 아니라 just as(수준만큼, 동일하게 )이란 뜻으로 네 영혼이 잘 된 수준만큼 동일하게 범사도 그 수준이 향상되고 건강도 그 수준만큼 동일하게 향상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가이오가 믿음은 좋은데 범사 즉 환경은 그보다 못하고 건강 또한 좋지 않은 현실을 보며 가이오가 믿음이 높은 수준에 있는 것처럼 세상환경 물질도 좋은 환경과 수준이 되고 건강도 강건하여 주의 일을 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수준을 높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건강도 좋아진다는 삼박자 구원론이 아니라 영혼이 높은 수준에 있는 것처럼 범사의 환경도 건강도 그 수준만큼 동일하게 좋아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외되고 외로운 자, 핍박받는 자, 억울한 자, 폭행당하는 자, 착취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자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도가 참사랑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잘되면 되는 것이지 육체는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영지주의자들에게 , 영혼육의 전인적인 존재이지 분리할 수 없다는 말씀이며, 영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육체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영혼과 육체는 서로 균형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주신 복을 누리며 그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가이오에게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가 전도자와 목회자를 후히 대접하는 등 항상 진리와 선을 행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즉 가이오는 탐욕스럽게 자기 것만 움켜쥐는 자가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낯선 나그네에게도 자기의 것을 나누고 베풀며 후히 대접할 줄 아는 겸손하고도 사랑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로 밀어붙이면 땅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선한 행실도 없이 이기적인 자세로 무조건 복을 달라고 떼는 쓰는 자가 아니라 가이오처럼 겸손한 믿음과 선한 마음으로 묵묵히 진리와 사랑을 향하는 자를 기쁨으로 축복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영육간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땅에 속한 욕심을 내어 버리고 오히려 주님과 같이 겸손히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온전히 헌신해야 될 줄 믿습니다.
2절을 원어의 뜻에 가깝게 재번역하면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된 수준만큼 환경축복과 건강축복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를 지속적으로 간구하노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 기원이 아닌 축복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 까지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의 축복은 물론 땅의 것들까지 풍성히 받는 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인 줄 믿습니다.
주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로 진리 안에서 행하여 주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3-4)
주님의 칭찬을 받는 성도가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고 증거하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하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증거(마르퇴룬톤:μαρτυρούντων는 단 한번 뿐만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계속되는 일인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분사형은 여러 번 설명하지만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거 증언 증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본을 보여주시고 길을 안내한 대로 살아가라는 피가 묻고 피가 녹아진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영생으로 인도하되, 진리 안에서 행한다하니 내가 기뻐한다 말합니다.
여기서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디이아(άλήθεια )가 요한삼서에 무려 6번이나 사용되는데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합니다.
이 진리라는 단어는 요한의 편지를 받는 가이오의 바른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어 옳은 것을 분별해내는 기준이 진리이며, 동시에 전도자 일행을 접대하지 않고 접대하는 자를 교회에서 내어 쫓아내었던 디오드레베가 옳지 않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즉 옳지 않은 것을 분별해내는 기준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요17:17절에서 "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신 말씀처럼 바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으로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요, 목회자요, 사도인 요한에게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행하다는 페리파테이스(περιπατέις)는 περι(두루)+πατέω(밟다)의 합성어로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는 뜻으로 진리 안에서 생활하는 가이오의 삶이 언제나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요한은 심히 기뻐했으며,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순간에도 기쁨의 감격이 가시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상태가 너무나 컸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부모들에 있어서도 자식들이 바른 길로 가고 있음을 보고 매우 기뻐하듯이 , 복음으로 성도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에게 있어 말씀의 자녀들이 빠른 믿음의 길로 가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배워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물을 얻는 과정이 어쨌든 무조건 많이 벌어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라도 기꺼이 내어주어 베풀기를 원하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언가를 대접하기에 분주했던 마르다보다 오히려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던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먼저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진리를 배워 부지런히 실천하여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가 되시고 다음으로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주께로 돌아오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축원 합니다.
물질을 바칠 때는 많이 바치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질을 드리기전에 과부의 두렙돈처럼 마음의 정성을 드리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성도가 되기 원하신다면 성령의 전인 성도의 마음을 정결케하고 행실을 의롭게 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5-8)
1-4절에서 축복기도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에 대한 칭찬과 기쁨을 말한 사도는 5-8절에서 순회전도자를 환대하는 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다시 한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은 형제와 나그네 된 자들을 동격으로 보면 안 됩니다. 형제는 나그네를 포함하는 더 큰 범위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나그네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요한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른 교회를 방문하거나 전도여행을 하는 특정한 그룹을 가리킵니다.
5절을 다시 번역 [네가 형제들, 특별히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볼 때에 네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신실한 일이다] 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실한(πίστις)는 믿음직한, 신실한, 신앙적인, 충성된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인간적인 의미에서 신실함에 국한되지 않는 바른 신앙에서 나오는 인격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묘사합니다.
순회 전도자들인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가이오의 모습 속에서 건성이 아닌 그 자신의 신앙에 기초한 형제 사랑의 행위인 참다운 신실함을 본 것입니다.
6절에서 교회라는 엑클레시아는 εκ(~로부터)+καλεω(부르다)는 합성어로써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므로, 건물로써 교회를 이름이 아니라 어두움이 지배하는 세상과는 구별되어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무리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이름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마음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6절을 공동번역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서 떠나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순회전도자들을 가이오가 있는 곳으로 보낼 예정이었는데 그들이 그곳에 가게되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추후 여행길에 부족함이 없도록 잘 챙겨서 보냈으면 좋겠다는 요한 사도의 바람을 말하면서 그렇게 전송하리라고 미래의 상황을 이미 성취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리오의 선행이나 디오드베레의 악행을 온교회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님과 세상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죄를 지으면 감추려하고 선을 행하면 몰라줄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시고 계신 줄 믿습니다.
성도는 마땅이 죄를 범했을 경우 신속히 하나님께 나아와 이를 고백하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선을 행했을 경우 감추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마지막 날 우리의 선행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이를 증거하므로 더 큰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될줄 믿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전송하기를 바라는 이유가 7-8절에 나타납니다.
즉 저희가 주의 이름으로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므로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사례를 요구했지만, 복음전도자들은 이들이 시험에 들까봐 복음 전파 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물질을 구하지도 받지도 않았기에 먼저 믿은 자들이 복음전도자들의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특히 "주의 이름을 위하여(ύπέρ τού όνόματος)"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정관사 τού가 바로 유일무이한 그리스도를 지칭하므로 순회전도자들의 복음 전파는 그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복음전파임을 확실히 한다 할 것입니다.
8절에서 복음 전도자들을 누가 대접해야할 것인가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며, 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과 공동운명체이기에 우리가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접하는 방법으로 한 지붕 아래로 맞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나 공회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을 자신의 가정으로 맞아들여 그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필요한 물질로 공궤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의 축복을 받게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빚진 자로써 그들 복음전도자들을 영접하고대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특권임과 동시에 아름다운 의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을 잘 대접하고 영접하는 것은 직접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을지라도 전도자들과 동일한 동역자가 되도록하는 소중한 일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파송된 선교사에게 일정한 파송비를 부지속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파송하는 선교사 중 파송하는 선교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복음을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3-14)는 말씀처럼 말씀의 일군들을 후원하는 것은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을 위해 성도들이 인색하지 말아야하고 , 동시에 사역자들이 말씀을 구실로 교회에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도 주의해야합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목회자나 선교사를 위해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쁘게 정성을 다해 참여하되 그것이 복음의 전파에 동참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한 중요한 일인 줄 믿으시기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진리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기를 축원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주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기원해야 합니다.(1-2)
둘째로 진리 안에서 행하여 주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3-4)
셋째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난 수준만큼 환경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도 받아 누리기를 내가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맡은 자들과 함께 동역하는 것은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임종하면서까지 서로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택함 받은 성도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랑 실천에 항상 힘쓰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아 누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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