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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 시대를 활짝 열어 가자 (5월17일 주일 설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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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시대를 활짝 열어가자 약2:21-26

주신 말씀 약2:21-26절을 중심으로 [ 믿음과 행함의 조화로 새 시대를 열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19절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귀신들은 놀랍게도 한 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달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더군다나 장차 자기들이 무저갱에 들어갈 운명인 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단의 무리들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주님마저도 시험할 정도로 성경에 능통한 존재이며, 예수가 어떤 분인지 지옥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는 영물들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믿음과 순종없이 성경지식을 이용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믿음, 순종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위험하여 더 큰 책망과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로 새 시대를 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행위가 따르는 온전한 믿음이 온전한 축복의 전제조건이다(21-22)

21절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 말씀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원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창15장에서 이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심을 받았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며, 구약성경에 정통한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2절에서 행위를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해졌다는 말씀을 참고하면, 행함 하나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증거로써 이전에 의롭다 하신 것을 더욱 확실히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전 에는 의롭지 않았는데 이삭을 바친 후에 비로소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들을 바치는 순종을 통해 더 이상 그의 믿음이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분명하게 됨으로써 그의 의(디카이오수네) 역시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훤히 보시는 분이므로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아셨을 터인데 외적인 행위를 왜 증거로 보이라 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육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영적 축복뿐만 아니라 육신에 필요한 것들까지도 아울러 공급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를 영과 육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으니 축복 또한 영육간의 온전한 축복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을 구할 때는 온전한 축복을 구하면서 반대로 하나님을위해 무엇인가 할 때는 부분적인 순종에 그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 말하면서 육신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고백 역시 입술에 그칠뿐 손발의 수고는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요 또 하나는 가슴에서 발끝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의 생각을 마음의 결단하기가 쉽지 않고 마음의 결단을 손발의 행위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따를 때 입만 움직이고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실 때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려고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모든 복을 쏟아 부으시기 위한 기초로써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함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은 또 다른 증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더 온전한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위가 따르는 믿음을 요구하실 때 불평하지 말고 , 기도할 때는 온전한 축복을 구하면서 순종은 부분적으로 하는 불충하고 불의한 모습을 과감히 털어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더 큰 믿음과 순종으로 축복의 그릇을 넓힘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복을 넘치도록 받아 누리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로 새 시대를 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로 철저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23-2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이를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벗이나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역대하20:7“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 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 하셨나이까

사41:8“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까지 바치는 순종을 보임으로써 더 이상 그의 믿음이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분명해지자 하나님께서도 그를 친구로 삼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창15:6절에서 그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 창22장의 그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지 티끌에 불과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철저한 믿음과 순종이라는 행함으로 벗을 삼아 주심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친구요 벗이라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벗(φίλος)은 사랑받는 친구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아는 자인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되 친구는 안다는 것입니다(요15:15).

하나님의 친구요 벗이라는 칭호는 모든 성도에게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칭호가 아니라, 특별한 자, 곧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만 붙여지는 영예로운 칭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이가 밀접함을 묘사하는 이 칭호는 분명 그가 칭의 받았다는 그 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우리를 하나님의 벗이요 친구라고 불러 주심을 감격하고 감사하며 오직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키고 순종하며 날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그 뜻을 헤아리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되시기를 원합니다.

24절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뿌리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 합니다.

즉 믿음이란 뿌리에서 영양분을 공급해야 행함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단지 믿음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신득의 원리를 배척하고 믿음과 함께 행위로 구원 받는 다는 말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이신득의 원리를 확실히 알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다는 진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 중에 믿음이 먼저이고 행함이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무 미련 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없이 아들을 죽이려 했다면 아브라함은 그 당시 자식을 몰록에게 드리는 우상신을 섬기는 자들과 다를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행위도 결국 믿음의 열매였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 그러나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동반한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내야한다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동시에 항상 믿음이 열매를 맺기위해 최선을 다 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믿음의 선한 열매를 풍성히 드리는 충성스런 성도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로 새 시대를 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로 오직 믿음에 근거한 행위만이 허물을 가릴 수 있습니다. (25-26)

25절에서 야고보는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생 라합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하나님 앞에서 가려주고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오직 믿음과 그로 말미암은 행위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이자 남자이며 존경받는 족장이지만 라합은 이방인이고 여자이며 천한 신분의 기생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조적인 두 사람을 들어 믿음과 함께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는 차별이 없이 여자나 남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한결같이 믿음에 근거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는 결코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오직 믿음과 그로 말미암아 행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고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해 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선적 행위나 명망 있는 자들과의 교분이나 학위, 비싼 옷, 성형수술로 자기의 부족함을 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까지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철저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 볼 때 모든 죄와 허물을 씻고 영원히 의롭다 하심을 받는 지혜롭고도 복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예를 들어 지식만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탄함을 ,아브라함과 라합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참된 믿음과 행위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믿음보다 귀신의 믿음을 닮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믿음은 그의 행함과 함께 구체적으로 알 수 있고 보여지며 진정한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믿음은 그의 행함과 함께 구체적으로 알 수 있고 보여지며 행함 안에서 성취되게 될 줄 믿습니다.

창11:4에서 성읍과 바벨탑을 쌓는 인본주의가 인류발전이라는 긍정적인 면으로 확대되었으나 ,이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것이 헬라적 사고인 인본주의를 낳았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차이를 인식하고 우리 이름을 내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온 지면에 흩어져 복음을 세상 방방곡곡에 전해 하나님의 사랑이 편만해지기를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26절에서 참 믿음은 연합하다 맺는다에서 온 말로 믿음이 행함보다 선행하나 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지식적 차원에서 머무르고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가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숨을 쉬지 않는 육체에 비교하면서 믿음을 육체에, 그리고 행함을 영혼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번역된 프뉴마(πυνεύματοϛ)호흡, 생명, 숨이란 뜻에서 ‘호흡이 있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호흡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 는 것 같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은 믿음을 온전케 하는 줄 믿습니다.

주의 할 것은 혹이라도 행함을 강조하여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은 믿음을 온전케 하는 줄 믿으시기를 축원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믿음과 행함의 조화로 새 시대를 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행위가 따르는 온전한 믿음이 온전한 축복의 전제조건이다(21-22)

둘째로 철저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23-24)

셋째로 오직 믿음에 근거한 행위만이 허물을 가릴 수 있습니다. (25-26)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하고 행함은 믿음으로 온전케 되는 줄 믿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은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즉 헬라식 사고방식이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킨 공헌이 있으나 그것이 최종적인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서로 융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융합의 신학 히브리사고방식에 의한 새로운 믿음운동이 새로운 세상을 활짝 열어가게 만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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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서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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