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마5장21-26) / 옥한흠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14. 06:29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521-26)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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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고)옥한흠목사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참 놀라운 말씀을 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느끼는 것을 여러분도 똑같이 느끼실 것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번 다시 읽고 싶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굉장한 부담감을 주고 어떻게 보면 우리 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당시의 제자들이나 청중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죽이지 않는 이상 자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살인죄를 엄하게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기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입니다.

 

이목구비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본성의 많은 점을 우리에게 이양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면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습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대치하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96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즉 살인을 하면 그 사람이 자기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살인을 엄하게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나 청중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는 생각들을 다 가지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나는 살인을 한 일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굉장한 선언입니다.

"너희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웠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정도로 배웠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제 이 계명에 들어있는 참 뜻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바 대로,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가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당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계명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이제 밝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수준의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지금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시면 참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그리고는 공회, 지옥 불 등의 말이 이어서 나옵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가 받는 사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면 살인자가 받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는 욕설을 하는 자는 살인자가 받는 공회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고 모독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살인자는 지옥에 간다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갖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헬라어에 화를 낸다는 표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라는 말입니다.

 

두모스는 가랑잎이 활활 타다가도 금방 꺼지는 것처럼 기분이 나쁠 때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끈 화를 냈다가 자기도 모르게 금방 그 화가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성격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르게 쪽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한번 화를 냈다 하면 그 화를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쌓아가는 것입니다. 분노를 마음에 쌓아가면서 그 분노가 증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증오로 바뀌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해서 말이 험하게 나옵니다.

 

그를 대할 때마다 좋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고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에 대할 때마다 말이 좋게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라가'라는 욕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가'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 머리 빈 깡통아!'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련한 놈'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곰보다도 못한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인격을 짓밟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에 미움이 섞여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말이 좋게 안 나가는 것입니다.

말로써 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 머리가 빈 깡통아. 곰처럼 미련한 놈아.' 하면서 깔아 뭉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마음 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살인하는 행위요, 형제를 향해서 말 속에 분노를 담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행동 전에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먼저 주시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서 피를 흘려야 살인인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에 칼을 들기 전에 벌써 마음에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살인한 자와 똑같이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라고 역대상 289절에 분명히 명시하셨고, 잠언 16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있으면 하나님은 벌써 살인한 사람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15절에는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입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눈을 피할 것입니까?

멀리 있어도 우리 생각을 통찰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눈을 누가 피할 것입니까?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분노를 쌓아놓고 있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규정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면서 무릎을 꿇고 "아멘." 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 속에 들어 있는 이 중요한 뜻을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합니다.

 

분노가 살인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또 자주 봅니다.

 

미국의 문화를 흔히 분노의 문화라고 일컫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화를 잘 냅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앞뒤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잘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총을 들고 나가는 것 아닙니까?

다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총을 들고 나가서 난사를 함으로써 1년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살인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은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저 자신도 가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깜짝 놀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고 우리 가슴에 아픔을 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러브 호텔 문제입니다.

나라의 장래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공무원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히 어느 곳에다가 러브 호텔을 허가해 줍니까?

 

차를 타고 오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막 가슴을 치고 싶어집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산자락 밑에 초막집이 있어도 마음이 차지 아니할 텐데 러브 호텔이 서 있다니 말입니다.

 

학생들이 날마다 우글거리는 학교 주변에 러브 호텔이 줄줄이 서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허가해 준 공무원들에 대해 솔직히 분노하고 있고 그들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고 살인자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가 러브 호텔을 보면 저도 모르게 무슨 말이 불쑥 나오는지 아십니까?

"불이나 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는 제가 놀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밤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객실 50개에 한 100명이 둘씩 둘씩 다 들어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거기에 불이 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오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수십 명을 죽이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 옳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화를 내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이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저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런 교훈 앞에 초연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유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또 한번 당혹감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욕하는 사람, 형제를 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형제라고 합니다.

 

맥스 루카도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기독교 저술가는,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눈을 뜨고 보아야 하고 살을 비비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분노하기 쉽고 욕하기 쉽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상처주기 쉬운 사람들을 일컬어서 '꼼짝 없이 매인 사람들'이라는 재치 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꼼짝 없이 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임 병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임 병의 증세는 무엇입니까?

자꾸 짜증이 나고 화를 잘 내고 속에 쌓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돈에 팔촌도 안 되는 모르는 사람 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들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때문에 짜증이 자주 납니다.

 

화가 자꾸 치밀어 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 자꾸만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숨기고 쳐다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오늘날 약 80% 정도의 부부가, 마음에 숨겨놓고 쌓아놓고 있는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상담가는 자기를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 부부나 개인을 놓고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고 감을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답니다.

그럴 때면 마음 속에 가만히 숨겨 놓고 있는 분노가 있는지를 한번 체크해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80%가 적중을 한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의 뿌리가 그 분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삭이지 못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마다 가끔 치밀어 오르는 화가 있습니다.

 

자식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루에 몇 번씩 아내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몇 번씩 남편과 자녀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에 쌓여 있는 분노가 나중에 증오의 감정과 뒤섞여서 결국은 어떤 사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감정,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이것은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죽입니다.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입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 옥한흠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