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성령님, 진리를 가르치소서/요한복음 14:26외/(고)옥한흠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14. 06:22

성령님, 진리를 가르치소서

 

(옥한흠 목사)

 

 

(요 14:26, 15:26-27, 16:7-15)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어령 교수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라 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어떤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그 할아버지는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얘 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한 일인데 오늘밤에 한번 자 보고 대답 해주마."하고는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수염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이불 속에 넣고 자니 답답하고 내놓고 자니 이상하고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이 잘 때 이불 속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가 이제 그 것을 의식하니까 그렇게 불편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가끔 이런 할아버지와 비슷한 분들이 계십니다. 모든 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지 밖에 계시는지 하고 질문을 하면 선뜻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펴놓고 있는 이 본 문 말씀을 통해서 내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성 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마치 답안지를 놓고 채점하듯이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여러분 자신을 비추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성령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 마음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성령이여, 내 마 음에 오시옵소서." 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우선 요한복음 14장 17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 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 라."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여기서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16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 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리라." 성령은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내용은 성령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은 오직 듣는 것만 가지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가 들려주시는 진리만을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은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알 게 하십니다. 장래 일이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이 세우고 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4절에서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성령은 진리를 말하시는 진리의 영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성령은 자기 자신을 놓고는 말씀을 거의 안 하십니다. 아무리 성경을 이리 저리 읽어보아도 성령이 자기를 놓고 무슨 이야기하신 곳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를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성령은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을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게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 입니다. 가끔 보면 성령 충만이 바로 예수 충만 이라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교회 안에 예수편이 있고 성령편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예수님, 예수님"하고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성령님, 성령님"하고 부릅니다. 또 어떤 목사는 「성령님, 안녕하세요?」하는 책을 써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불러야 될지, 예수를 불러야 될지 한참 헷갈리게 만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다 한 하나님이시니까 누구 이름을 불러 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법칙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또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가끔 가다가 '예수님, 도와주세요' 하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누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느라 기도합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가 기도하도록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끔 '성령님, 도와주세요.' 하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만 무작정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 성령님'하고 기도하는 것은 조금 잘못된 기도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진리 되신 예수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 입니다. 이것이 방금 읽은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리라 다음으로 우리가 살필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무엇을 하시느냐, 어떤 일을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 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 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을 전파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간증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독특한 사역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예수를 증거 하면 이 세상에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납니다.

 

16장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그 다음에,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먼저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면 그 증거의 말씀을 듣는 세상 사람들이 책망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가책을 받게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가책을 받게 만듭니까?

 

첫째는, 죄에 대하여 가책 을 받게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을 보십시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 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무엇이 죄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았 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 을 듣게 하시면 당장 가책이 와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분을 박대했구나. 그분을 안 믿었구나. 그분을 30년이 지나도록 이때까지 내 마음에 영접하지 않았구 나. 내가 큰 죄를 범했다. 정말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구나.'하고 깨닫게 만듭니다. 이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의에 대해서 가책을 받게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의에 대하 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오셨다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의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뭔가 선한 것을 한 것을 들고 나와 가지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 시기를 바라고 은근히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쓰 레기 통에 던지는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휴지조각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까짓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네가 구원받기를 원하느냐? 이 의를 꼭 네가 소유하고 와야 한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자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의가 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내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의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 예수님만이 나의 의구나. 이 예수님을 붙들어야 되겠다. 믿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는, 심판에 대하여 가책을 받게 됩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세상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고 외쳤기 때문에 그 음성을 듣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 임금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하늘에서 쫓겨 나와서 지금 세상에 추락되었습니다. 지금 집행 유예를 받고 있을 뿐이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증거 하면 사람들이 마음에 '내가 예수 안 믿은 게 죄구나. 예수님만이 나의 의구나.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이 시작 되었구나.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 믿어야 되겠다.' 하는 가책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자마자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꾜?" 하면서 가슴 을 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오셔서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진리를 증거 하십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 이제 드디어 주님이 예언하신 성령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졌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령 임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도대체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장만 봐도 그런 장면이 몇 번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말씀하니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들어선다고 말씀하실 때 빌립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 완전히 동문서답 아닙니까?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형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해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를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 하나 하나의 의미를 전혀 깨우치지를 못했습니다. 어두움에 갇혀 있었지요.

 

우리가 가끔 전도하러 나가서 사회적으로는 박사라고 하는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하면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우리 가끔 보지 않습니까? 심령이 캄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감동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금까지 그들의 마음에 의문사로 남아 있었던 것이 감탄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이전까지 퀘스천 마크만 달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의문들에 대해 해답을 얻게 되니까 의문사들이 '와!' 하는 감탄사로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교훈들과 눈으로 보았던 표적과 이적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환하게 꿰 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셨는지 설명을 안 해주어도 그들은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짧은 기간인데도 나중에 성령 충만해서 설교 할 때 구약에 있는 시편과 요엘서를 꿰뚫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언제 베드로가 구약 성경을 그렇게 공부해 가지고 해박해졌을까요? 공부할 틈 이 없었을 뿐더러 공부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구약 성경이라고 하면 큰 두루마리였는데, 이런 것은 성전이나 회당에나 있었지, 개인은 소유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어디에 가서 구약을 펴놓고 일일이 공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편과 요엘서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얼마나 힘있게 증거 합니까?

 

사도행전 2장14절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여러분이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가 다 설명해 주겠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가 갑자기 그렇게 변했습니까?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자 초자연적인 기억력이 살아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가 계속 말씀을 듣고 있는 요한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60년 후 내지 70년 후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이 책을 쓴 요한은 이미 나이가 80에서 90에 들어가는 고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마치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생생하게 받아 쓴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상상도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이 떠나신 지 60년 내지 70년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모든 학자들로부터 검증을 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60년 내지 70년이 지난 후에 그것도 나이가 90에 가까운 고령의 사람 이 그때 일을 펜으로 기록한다고 할 때 어떻게 이처럼 상세하고, 세밀하고,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자마자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또 성령이 임하자마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하여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 다"(행3:15)라고 외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났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성령에 대해 약속하신 말씀이 진리였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나를 가르칠 것이요, 나를 기억하게 하 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조명해 주시는 성령님

 

그렇다면 우리 마음속에 자연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제자들에게 일어난 이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가?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을 우리에게도 임하였는데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그 초자연적인 기억력이라든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눈으로 본 모든 것에 대해서 깨달음이 왔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비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 드린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신 일을 일컬어서 흔히 신학적으로 '계시 '(revelation)라고 합니다. 베일에 가리워 있던 것을 하나님이 열어서 보게 함으로서 제자들은 오묘한 구원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하고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이적 기사들을 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마자 그들은 그 모든 것의 의미를 꿰뚫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사실들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 우리가 들고 있는 신약 성경 아닙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계시는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성령의 영감입니다. 제자들이 간 다음에는 계시를 받는 영감은 계속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 말씀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거의 18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들고 있는 이 66권 성경 외에 성경이 더 추가된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추가했다면 이것은 이단이지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신 일은 계시였습니다. 그들은 그 계시로 인해 보고들은 모든 것을 깨달았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으로 남겼던 것입니다(딤후3:16).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그런 초자연적인 기억력은 오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실까요?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실까요? 우리에게도 기억 나게 하실까요? 우리에게도 증거 하게 하실 까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자 들은 자기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해서 진리를 깨달았지만 우리는 제자들이 기록해서 남겨 놓은 계시의 말씀을 근거해서 성경의 말씀을 깨닫고, 기억하고, 증거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제자들은 기록된 말씀의 근거가 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지만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배우고, 깨닫고, 기억하고,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이와 같은 역사를 놓고 신학적으로 '조명'(illumination)이라고 말합니다. 무대에 가면 조명 장치가 있지 않습니까? 적당한 빛을 밝혀서 그 무대의 연출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 조명의 역할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우리가 기록된 말씀을 손에 들고 펼 때 마다 우리 마음 눈을 열어서 그 말씀을 환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을 조명이라고 그럽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셔서 말씀에 기록해 놓은 모든 복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입니다. 할렐루야! 어거스틴이 성령의 조명을 설명하기 위해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한 가지 들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비치기만 하면 우리는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떴다 감았다 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은 성령이 오셔서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이것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아니하면, 성령이 감동하셔서 열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성경을 천 번을 읽어도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한번 성령의 손에 의해 끌려서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가게 되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은 경지로 들려 올라갑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시력을 갖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비밀한 일을 깨닫고 그 말씀을 기뻐할 수 있는 경지로 끌어올려집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시력을 가지고 이전에는 보려고 해도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하던 것을 지금은 환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 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이것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성령이 임하셨으면 이와 같은 성령의 조명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펴놓고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빛을 비친 듯 밝게 깨달아지고 기억나고 그 말씀을 통해서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 임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설교 듣는 모습을 보면 여러분 모두 가 성령이 임하신 분인 줄을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이런 설교를 못 듣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수한 이야기를 가지고 울렸다 웃겼다 하는 설교 같으면 성령이 임한 사람이나 안 임한 사람이나 웃고 즐거워하겠지만 옥 목사처럼 이렇게 재미없는 설교를 그것도 어떤 때는 40분, 50분씩 하면 참 보통 고역이 아닐 것 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 날 집에 돌아가면 우리 어머니는 가끔 제게 이런 핀잔을 주십니다. "너, 설교 좀 짧게 해라. 20분 만 해라." 제 건강을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 이라는 것을 알지만 설교라는 것이 무슨 순서를 채우는 어떤 형식이 아닌 이상,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입으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그 영혼이 힘을 잃고 죽게 될 만큼 중요한 것인 이상, 마치 어떤 일을 해치우듯이 그렇게 가볍게 설교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도록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옥 목사의 재주로는 도무지 20분 가지고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서 그 말씀이 하나의 핵폭탄처럼 터지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사모하면서 자꾸 시간을 끌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입장에서 40분 동안 설교를 듣고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웬만하면 다 고개 숙이고 잡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거의 없습니다. 모든 분들이 눈을 아주 똑바로 뜨고 저를 이렇게 쳐다보고 계십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는 말이지요. 또 어떤 분은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성령이 그 마음에 조명을 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구나. 나에게 세상의 영을 받지 하지 않고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다 알게 하시는 구나.'하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막 떨립니다. 흥분을 합니다. 성령 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성령의 조명을 잘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좀 더 잘 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령이 비록 우리 안에 계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서,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기도 하고, 침침하게 내버려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펴기만 하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영광스러운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 영혼이 기뻐 뛰는 역사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구 말대로 우리 세포가 춤을 추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개인적인 이야기라 죄송합니다만 저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 외국에 나가든지 하면 조금 시간을 내어서 엉뚱한 데를 갑니다. 차를 몰고 제가 원하는 곳에 가서 5시 내지 5시 반까지 준비하고 앉아 있으려면 적어도 아침 4시 이전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장엄한 태양이 어두움의 장막을 열어 제치고 찬란하게 솟구치는 그 장면과 아침 태양에서 퍼지는 황금 햇살이 온 천지를 장식하는 그 장엄함은 그 시간에 안가면 못 보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찍는 사진들 가운데 참 감동적인 사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잠자고 있지만 피곤한 몸을 끌고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가 가지고 어떤 산 위에나 아니면 들판 아무도 없는 데 앉아 기다리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태양이 떠오르면 그 장면을 보고, 또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늦잠 자는 사람은 죽었다 깨도 이런 영광스러운 장면은 못 본다. 부지런하게 일어나는 사람만이 이것은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살기는 하지만 정말로 성령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우리 마음을 환히 밝혀주는 이런 황홀한 은혜는 우리가 태도를 바르게 가질 때만 가능합니다.

 

첫째로, 지도자들로부터 여러분이 부지런히 배우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신 것은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도자는 매일 자기가 남을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연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지도를 받지 않아도 읽자마자 금방 깨달아지는 아주 기본적인 말씀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 는 굉장히 어려운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은 안 배우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수양관에서 제자훈련 지도자 컨벤션을 하면서 저는 어떤 강사로 부터 희한한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부흥사가 어떤 교회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신 일이 있는데, 며칠은 설교를 잘 하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말씀 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명기 22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목사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보니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잘못 가르쳤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교인들에게 다시 지시를 했습니다.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된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여자가 바지 입고 오는 일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여자는 치마를 입을 것이요, 남자는 바지를 입을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여자가 바지를 입고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이 교회도 이 말씀대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어이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되는 지도 자도 이렇게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이 완성되었는데, 이 마당에 무슨 옷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교역자도 구약과 신약의 계시의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잘못 가르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평신도가 안 배워서 되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신 분일수록 잘 안 배웁니다. 다 안다는 것이지요. 상당히 중요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배우는데 게으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배우십시오. 그래야만 성령이 우리 마음을 항상 밝게 비춰줍니다.

 

둘째로, 말씀을 사모하고 기다리십시오.

 

성경을 편다고 해서 금방 깨닫습니까?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한두 마디 기도한다고 금방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마음을 열고 사모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텔레비전의 연속극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매일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직 방영 시간도 되기 전에 연신 시간을 체크하고, '오늘 저녁에는 그 아가씨가 어떻게 될까?'하고 궁금해 하면서 마음이 벌써 거기에 가 있는 것입 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그렇게 마음을 주는 일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이런 명령이 있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 모하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요, 젖이요, 영혼의 우유입니다. 그리고 '사모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포테오'(epipotheo)인데, 얻고 싶어서 가슴이 터질 듯이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보면 물을 찾는 사슴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이 '갈급하다'는 말이 바로 '신령 한 젖을 사모하라'고 할 때 '사모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목이 타서 물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모하면 그런 심령에는 성령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큰 기쁨을 맛봅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만나는 행복과 감격을 맛봅니다.

 

그러나 말씀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서 형식으로 한두 줄 읽고 넘어가는 식으로 해서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은혜를 절대 체험하지 못할 것 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주일학교 소년부 학생들이 수양관에서 성경 읽기 캠프를 했습니다. 마침 제가 수양관에 있었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 봤습니다. 300명이 넘는 소년부 학생들이 누가복음하고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러니까 신약의 거의 전부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일 동안 성경을 놓고 읽어내는데, 제가 참 놀랐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어린애들에게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나?'하고 생각했는데, 들어가 보고 제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을 펴놓고, 어린애들이 읽기 쉬운 현대어 성경을 펴놓고 앞쪽 강단에 교사 두 분이 앉아 가지고 차례대로 읽으면 애들이 어떤 때는 같이 읽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들으면서 읽기도 했습니다. 제가 옆에 가서 어떤 학생 뒤에 서서 한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이 놈이 얼마 만큼 잘 읽나?' 하고 봤더니 빨간 연필을 들고 읽다가 자기 마음에 드는 데는 쫙 밑줄을 긋고, 또 긋고 하면서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제가 옆에 와서 서 있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 것을 보면서 '하나님, 우리 한국이 소망이 있습니다. 이 어린 자녀들이 자라면 이 나라가 소망이 있습니다.'하고 감사했습니다. 성령이 그 어린 순진 한 마음을 환하게 비취니까 그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뭔가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니까 연필을 긋지, 긋고 싶다고 그을 수 있나요? 그래도 뭔가 깨달아지니까 쑥쑥 긋는 것이 아닙니까?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을 열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뿌리는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직업 문제나 실업 문제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기아를 당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속사람이 강건할 수 있는 양식을 먹지를 못합니다. 그래 서 사람들은 쓸데없는 신문지를 들고 씨름하고, 쓸데없는 책을 가지고 마음속의 허전함을 매 꾸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그것으로도 안 되면 마약으로 가고, 술집으로 가고, 도박으로 가고, 여자로 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내면의 세계가 병이 들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40일 동안 금식하고 그야말로 기절을 할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그 배고픈 것을 가지고 계속 도전했지 않습니까? "너, 배고프지? 돌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어라." 요즈음 우리가 경제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니까 마귀가 와서 이 경제문제를 가지고 계속 흔들지 않습니까? "너, 이래서 어떻게 살 거냐? 월급이 반으로 줄었는데 어떻게 살 거냐? 너, 내일 모레 직장을 잃으면 너 어떻게 될 거냐?" 계속 흔들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이 듭니까?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셨지만 마귀가 배고픈 문제를 가지고 흔들 때 이렇게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나, 죽겠다. 나 좀 살려줘. 떡 좀 가지고 오라." 주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 지금 죽을 지경이라도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 든 말씀으로 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양보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고 내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면 영도 살고 육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소생시킬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성령에게 의존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 순간, 그렇게 걱정스러웠던 것이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그렇게 무거웠던 십자가가 가벼워지는 희한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기만 하면 돌아 버릴 것 같던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꼭 붙들고 계시는 것을 느낍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이 말씀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담대해 집니다.

 

우리 고통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내면의 세계가 기갈을 당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은혜 의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우리라."하신 약속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문제를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깨달았으면 그 다음에는 순종해야 됩니다. 말씀이 내 마음의 밭에 뿌려지면 뿌리가 내리고 자라야 됩니다. 자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그 결과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확장됩니다. 엄청난 복이 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어떤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마음에 담은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으면 세상에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나타낸다'는 말을 집에 가서 한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보여 주실까요? 보는 사람만이 알지요. 예수님을 한번 만나 보십시오. 온 세상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근거하여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기억나게 하시고, 진리를 순종하게 하시고, 진리를 증거 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이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아름다운 생을 살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과일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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