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묘한 한국이름
알렌(安連) 선교사
우리나라에 들어 왔던 선교사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한국 이름을 썼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구약 인물들의 이름이 신앙적 의미와 시대적
상징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묘하게도 특별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한문으로 이름을 지을 때 원래의 이름과 같은 소리를 가진 한문들을
골라지었는데도 그랬다.
우리나라에 제일 처음 들어왔던 선교사가 알렌(安連)이었다.
의료 선교사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선교사보다는 의사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신정변 때 사경을 헤매던 당대의 거물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치료하여
완쾌하게 하였다.
이 일로 선교의 길이 뚫려 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세울 수 있었고
후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 설립을 통로로 복음 선교의 길이 환하게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한국 이름이 안련(安連)이다.
사실은 음역인데 ‘안전하게 연결하여 주었다’라는 뜻으로 그의 의료사업이 복음선교를 안전하게 연결하여 주었다는 뜻이 아닌가.
이렇게 절묘하게 그의 역사적 위치를 상징하고 있으니 묘한 일이다.
다음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그 한국이름이 원두우(元杜尤)이다.
두우의 두(杜) 자는 막는다는 뜻이고 우(尤)는 더욱, 많이, 그런 뜻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은 닥치는 환난과 압박 그리고 시련을 더욱 많이 막아내는
근원(元이)란 뜻이다.
초기 한국 선교사의 이름치고는 실로 혀를 두르게 하는 절묘한 이름이다.
근대 초기 한국 선교의 가진 방해와 압박을 모두 힘있게 막아내고
전도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의 아들 언더우드의 한국 이름을 원한경(元漢慶)이다.
1890년생으로 서울 태생이다.
서울에 경사가 났다고 해서 그 아버지가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 원한경의 아들이 원일한(元一漢)이다.
1917년 서울 태생인데 6·25사변 정전회담 때에 유엔군측 수석 통역관으로
커다란 공헌을 세웠다.
‘원’, ‘일’, ‘한’ 이렇게 하면 111이 된다.
그래서 자기는 111세까지 살 것이라고 하더니 여든 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감리교 선교사로 처음 입국하였던 분이 북감리교의 아펜젤러인데
그 한국이름이 아편젤러(亞扁薛羅)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넓적하고(扁) 맑은 대쑥으로 만든(薛) 새그물(羅)과 같은(亞)것’이라는 뜻이다.
선교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서는 이 이상의 묘한 비유가 없을 것이다.
아펜젤러라는 그의 이름이 묘한 여운을 남기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제물포에서 장로교보다 먼저 상륙하여, 한국 선교는 감리교가 먼저 시작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먼저 ‘앞에 설라’고 지어졌다는 유머가 있다.
그때 함께 들어온 이가 스크랜톤인데 한국이름이 시란돈(施蘭敦)이다.
란(蘭)과 같은 우아함과 아름다움 그러나 억세고 강한 것이 복음인데
그것을 베풀어 퍼친다(施)는 뜻이었다.
우리나라 선교사들 중에서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직을 동시에
15년 간이나 맡았던 인물이 캐나다 출신 에비슨 선교사였다.
그는 대단한 인물로서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이미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의과대학의 교수였다.
그의 이름이 한국말로 어비신(魚丕信)이었다.
발음으로는 거의 근접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살펴 보면 “물 속에 사는 모든 동물들은 다 드높고도 거대한(丕) 믿음(信)을 가졌기 때문에 살 수 있다”라는 뜻이다.
고기는 물속에서만 살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오면 더 이상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안에서 살 때에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는 감사의 믿음에서만 생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인데, 초기 선교사의 이름치고는 참으로 소신에 넘치는 이름이었다.
의료선교사로 입국하였던 혜론 선교사 역시 대학 교수였다.
우리나라 선교사들은 서양 사회에서는 내놓고 싶지 않을만큼 거물들이 많았다.
혜론(惠論) 선교사는 입국한지 5년 만에 과로로 숨진 분이었다.
기독교를 은혜(恩惠)로 전파(論)하다가 눈을 감았던 인물이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에 끼지 않았던
34인 중의 하나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도 한국 오기 전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였는데
한국에서의 의학 발전과 독립운동 옹호자로 그 공적을 인정받아 독일 뮌헨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및 고려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독립만세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 의해 추방되었던 우리 겨레의 혈친이었다.
그런 공로로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그의 한국 이름이 석호필(石虎弼)이다.
그 이름이 어떻게 그렇게 신통하게 맞아떨어질까.
필(弼)이란 것은 휘어진 화살을 제대로 잡아주는 틀을 말한다.
한국의 독립을 제대로 잡아준다는 틀로 억세게 서 있었는데, 호랑이처럼 돌덩이처럼
그렇게 확고하게 무섭게 서 있었다는 뜻이 아니던가.
스왈런 선교사는 1897년에 한국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선교의 허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호조, 요새로 말하면 여권을 처음으로 발급받았던 미국 선교사였다.
그는 1907년 정미조약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 당하는 등 한국이 비운에 울 때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지어 우리 겨레에게 눈물의 메시지를 남겼던
목자와 같았던 분이다.
그런데 그의 한국 이름이 소안론(蘇安論)이다.
옛날에는 예수님을 야소(耶蘇)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예수님(蘇)을 안전하게(安) 전파하고 론(論)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참 우연치고는 그런 우연이 없을 것이다.
그는 장로회신학교의 교장직을 역임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원상에서 선교하던
감리교의 하디라는 선교사이다.
한국 이름은 하리영(河鯉泳)이다.
그는 1903년부터 기도회와 사경회를 밤낮없이 계속하면서
마침내 평양의 감격과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한 장본인이다.
하리영! 그 이름이 기가 막히다.
넓직한 장강 하천에서 잉어가 떼 지어 물살을 가르며
장엄하게 헤엄쳐 간다는 이름이다.
잉어는 엄청난 힘의 상징이다.
한국교회의 광대한 장강에서 우리 교인들이 떼지어 힘 넘치게 물살을 가르고
씽씽 헤엄쳐 가는 모습이 그의 이름이다.
한국교회는 사실 그렇게 되었다.
1892년에 입국한 미국 선교사 중에 밀러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 이름은 민노아(閔老雅)로 밀러를 한문으로 써서 붙인 이름이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언더우드가 세웠던 예수교학당을 맡게 되었는데,
그 학교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민노아학당으로 개명하였다.
그와 함께 입국했던 부인 안나가 1903년에 죽자 정신여학교 교장이던 수잔 도티라는
여선교사와 그해 재혼했는데, 그 부인 역시 193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다시 그해 정신여학교 선생이던 딘 양과 또 결혼하였는데,
겨우 8년을 살고 세상을 떠난다.
밀러가 71세 때의 일이다.
나이가 들어 늙어도 우아하였다는 이름인데,
일생을 세 여자하고 살았으니 우아하도록 노력하였을 것이다.
한국에 와 있었던 선교사들은 이렇게 재혼, 삼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워낙 서양 사람들이 적었던 시절인지라,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어떤 여자선교사도 세 번 결혼한 일이 있다.
장로교 선교사 중에 솔타우라는분이 있었다.
만주 선교에 힘쓰다가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와 기독교서회 일을 오래 보았다.
그의 한국 이름은 소열도(蘇悅道)이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기쁜 길이라는 뜻의 참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는 6·25전란 중 한국을 찾아와서 부산에서 북한피난민교회를 한 때 돌보기도 하였다.
초대교회 감리교 선교사 중에 헐버트라는 분이 있었다.
1886년 조선 조정이 육영공원이라는 서양식 학교를 처음 세웠을 때에
그 학교 교사로 온 신학교 출신 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후에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남았고,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워싱턴에 달려가 미국 대통령에게 한미수호조약에 명시한 대로 한국문제에 적극 나서라고
대들었는가 하면, 1907년 해아밀사 사건 때에는 시종 밀사 일행과 동행하면서
그들을 도왔다.
그러다가 일본의 요청으로 미국정 부가 그를 소환하여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흘법(訖法)이다.
법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뜻인데, 참 묘한 일치이다.
그는 미국이 한국과 맺은 수호조약의 법을 그대로 지키라고
대들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백정들의 서러움을 알고
이들을 사회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 선교사들의 공헌이다.
말하자면 백정해방인데 그런 일을 주도한 사람이 사무엘 무어 선교사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모삼열(牟三悅)이다.
소가 큰소리로 울어대는 모습(牟)인데, 그런 것을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三悅)는 것이다.
삼열(三悅)은 성경의 사무엘이란 이름을 한국식으로 옮겨 놓은 이름으로
거듭 거듭 기쁘다는 뜻이다.
백정과 소는 관계가 깊다.
백정들을 해방시켜 그들도 상투에 갓을 쓰게 한 것이 얼마나 기뻤기에
소도 하늘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웃어댔을까 하는 것이다.
초기 선교에서 한국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 흠뻑 빠졌던 선교사가 하나 있었다.
게일이라는 선교사인데, 영어의 고전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영국 청교도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으로
그의 한국어 이름은 기일(奇一)이다.
그는 선교사인데도 한국학 연구에 더 몰두하였고, 성경도 성서공회의 허락 없이 개인
자격으로 번역하여 출판하는가 하면, 정년 후에는 영국으로 가서 성공회로 전향했다.
참으로 기발하기가 일등이란 의미의 기일이란 이름이 어찌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더러는 기이상(奇異常)이라고도 불렸다.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성경 번역과 평양신학교 교수로 오래 일한
레이놀즈란 선교사가 있었다.
아주 보수적인편 이었는데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한국에 왔던 선교사이다.
그의 한국 이름이 이눌서(李訥瑞), 레이놀즈와 거의 발음이 같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말을 아주 더듬어서 오히려 상서로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한데 그의 고전어 실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와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말이 어눌하였다니, 이름치고는 겸손이라고 할까, 이율배반이었다.
이름이 그렇게 정반대로 되었던 사람이 하나 더 있다.
1909년에 한국에 들어왔던 홀드크로프트라고 하는 선교사로
주일학교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분이다.
그런데 1940년 미국의 장로교가 갈라지면서 과격 보수주의의 독립장로교단이 출범하자 거기 가담하였던 관계로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제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경남법통노회로 고려파가 갈라져 나갈 때
그 뒤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 홀드크로프트이다.
한데 그의 한국 이름이 허대전(許大殿)이다.
아주 좋은 이름이다.
집이 아주 크고 웅장하여(大殿)이어서 무엇이든지 다 허락(許)한다는 이름이다.
그런데 실상 그는 한국교회 분열의 장본인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주 좁은 마음의 집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의 훌륭한 이름과는 대조적이었다.
함경도는 처음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맡아서 선교하던 지역이다.
1914년에 내한한 스코트 선교사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간도의 은진중학교 교장
그리고 함흥의 영생중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많은 한국인들을 양육했다.
그런데 1930년에 본국 캐나다에서 교파 합동이 실현되어 연합교회가 되면서
함경도 지역도 연합교회가 맡아서 선교하게 되었다.
연합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한국의 근대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싹을 내기 시작했다.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강원용, 정대위, 김영주, 김춘배 같은 이들이
대개 이 함경도나 간도지역 출신이었다.
스코트는 신학의 근대주의사상을 널리 펼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한국 이름이 서고도(徐高道)였다.
‘고등비판의 신학사상을 모두에게 펼치는 길이었다’라는 뜻이다.
서(徐)는 ‘서서히’라는 뜻도 있지만 ‘모두 다’라는 뜻도 있다.
간도지역을 처음 개척하고 전도한 사람도 캐나다 출신의 바커였다.
그는 1911년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함경북도를 거쳐 간도로 건너갔다.
간도는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한국독립운동의 온상이었다.
이 지역을 김약연, 문치정(문익환의 조부)과 같은 이들과 개척해
기독교의 거대한 요새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제동병원과 용정명신여학교 그리고 용정중앙교회와 같은
기독교의 모뉴멘트를 확실하게 세워나갔다.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 바커의 비호와 도움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신병으로 1923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4년 후에 세상을 떠나자
간도의 한국인들은 그를 기념하여 용정에 커다란 묘비를 세웠다.
그의 한국 이름은 박걸(朴傑)이다.
순박하고 질박하였지만 걸출한 사람이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한 일에 더 이상의 적절한 이름이 없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선교사가 하나 더 있었다.
번커라는 분인데 장로교 선교사로 왔다가 감리교계의 배재학당의 교사 교장직을
맡으며 감리교로 이적한 분이다.
그는 1902년 독립협회사건으로 수많은 유위의 상류층 인사들 곧 이승만, 이상재,
박승봉, 유성준, 신흥우와 같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거의 매일 다니면서 성경을
비롯한 종교서적들을 반입하여 이들을 기독교로 입교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이들이 바로 한국사회에서는 기독교에 입교한 최초의 상류층 인사들이라 해서
대서특필되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번커의 한국 이름이 방거(房居)이다.
감옥 방에 있는 사람들을 기독교에 입교시킨 사람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적절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1932년 미국에서 별세하였고 유언에 따라 한국 양화진에 묻혔다.
우리나라 방안에 오래 거하고 싶어서였다.
(2012.9.29.한국장로신문 / 민경배 목사)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성경강해설교+전도교육자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나님 뜻의 두 가지 측면 (0) | 2015.12.26 |
---|---|
[스크랩] 하나님의 뜻’의 의미 (0) | 2015.12.26 |
[스크랩] [이름] "하나님"에 대하여 (0) | 2015.12.26 |
[스크랩] 여호와의 이름 (0) | 2015.12.26 |
[스크랩] 아름답고 거룩한 회고(송년 주일) (0) | 2015.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