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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호와의 이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26. 08:23

여호와의 이름

 

 

한정건(구약학) 교수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단지 불려지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나타내어 주기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름이 큰 의미를 가진다. 이름과 그 사람의 인격체는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과 성격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구약에서의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존재(內的存在)의 표현이다. 에서는 자기 아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창 27:36).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을 위해 이렇게 변명한다: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삼상 25:25). 이와 같이 이름은 그 사람을 구속(拘束)할 수 있는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본질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이름이 변하면 그의 인격도 바뀌는 것으로 인식한다. 대표적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경우를 볼 수 있다(창 32:28). 이로써 그의 인격이 변하게 된다.

  하나님에게 이름이 붙여질 때에, 그 이름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성격을 드러낸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름의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보편적인 이름으로 엘로힘 (!yhila>), 엘(lae), 엘 올람(!l;/[ lae, “영생하시는 하나님”, 창 21:33), 엘 엘리온(@/yl][, lae,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18-20,22) 등이 있다. 그 이름 중에서도 “여호와”(hwhy)라는 이름이 대표적이며, 또 가장 많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 여호와 이름이 6,823회 나온다.

  “여호와”의 이름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고 그것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던 이름이다(출 3:15). 그러면 여호와란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이름의 의미를 잘 파악하면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1. 번역성경에서 여호와 이름에 대한 번역의 문제

  ‘여호와’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네개의 문자 이름”(nomen tetragrammaton)으로 불려지고, 현대 문자로는 YHWH(히, hwhy)로 표기된다. 그 정확한 발음을 신약 이전에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이후(제2 성전시대) 이미 그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부르기를 꺼려하였다. 비록 사적으로는 간혹 불렸겠지만, 공적으로는 부르기가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네 개의 문자를 발음하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yn"doa})로 발음하였다.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였기 때문이며, 행여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가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 5:11)는 계명을 범할 수가 있음을 우려한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맛소라 학파들이 본문에 모음을 찍어넣을 때에 YHWH가 나오는 곳에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놓았다. 그런데 YHWH가 아도나이와 함께 나올 때에는 아도나이 아도나이로 반복하여 읽을 수 없으므로 이때에 YHWH를 엘로힘(합하여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음)으로 읽었다.

  구약성경에 YHWH 이름이 6,823회 나온다. 맛소라는 6518 곳에 아도나이(yn"doa})의 모음을 찍어 ‘여호와”(hwO"hy])로 표기하였고, 305 곳에는 엘로힘(!yhila>)의 모음을 빌려와 찍었다.

  한글 성경들에서는 개역성경이 그 이름을 ‘여호와’로 표기하였고, 공동번역이 ‘야훼’로 바꾸어 부르다가, 표준 새번역 성경은 네 개의 문자를 “주” 혹은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표준 새번역 성경의 번역을 주관한 민경진 박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힌다:

① 유대교 회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제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네 글자를 절대로 직접 발음하여 읽지 아니하였다.

② 고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본들이 거의 주(主)로 번역하였다. 고대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본이 kurio"(주)라고 번역하였고, 라틴어는 Dominus(주), 루터의 독일어역도 der Herr(주)로 번역, KJV도 the LORD(주)로 번역하였다.

③ 여호와라는 이름은 중세기에 인위적으로 만든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어버렸으며, 많은 학자들은 원래 이름이 야훼일 것으로 본다.

④ 신약에서 kurio"로 사용했다.

  표준 새번역이 여호와의 이름을 성경에 쓰기를 거부하였지만, 여섯 곳은 여호와란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창 22:14; 출 3:15; 6:2; 17:15; 삿 6:24; 겔 48:35). 그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이는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5을 개역성경은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라고 번역한다. 표준 새번역은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로 번역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스스로 부르시면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기억할 “이름”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만약 “주”로 대치한다면, 어떻게 이 “주”가 여호와의 독특한 그분을 대변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이스라엘이 대대로 기억해야할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어려움 때문에 표준 새번역도 예외적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출애굽기 6:3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엘 샤다이(전능의 하나님)와 여호와 두개가 서로 비교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만약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버리면 두 이름을 대조시킨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번역성경들이 YHWH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름의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바른 태도일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해 표준 새번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출애굽기 6:3의 경우에 영어번역 성경들도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출판한 유대인 성경 TANAKH the Holy Scripture는 이 부분에서 네 문자를 “주”라는 말 대신 YHWH로 표기함으로써 히브리어 자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위의 구절들만이 여호와라는 이름이 꼭 사용되어야 할 구절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5:11에 개역성경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번역하는 대신 표준 새번역은 여호와의 이름을 생략하고,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고 번역했다. 그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어떻게 그것을 함부로(혹은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는가? 출애굽기 33:19에서 개역성경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라고 번역되었다. 반면 표준 새번역은 “...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신다고 하고서는 그것을 “주”라고 한다. “주”가 어떻게 그의 거룩한 이름이 될 수 있는가? “주”는 존칭이지 명칭이 아니다. 출애굽기 34:5에는 개역성경은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라고 번역하는 반면, 표준 새번역은 “때에 주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거룩한 이름을 “주”라고 번역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는 그에 대한 존칭이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두 곳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분명히 알리고 선포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양자 모두 통일하여 여호와 이름을 사용했어야 한다.

  시편 83:18에서도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하소서”하였는데, 표준 새번역은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며, 온 세상에서 주님만이 홀로 가장 높은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라고 번역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호세아서 12:5에 개역성경은“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라고 번역하는 대신 표준 새번역은“주는 만군의 하나님이다. 주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분의 이름이다”라고 번역한다. 본문은 에브라임이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와 또 애굽과 언약을 맺음을 책망하고 그들을 징계하실 것을 말하면서, 그러나 옛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또 자기의 이름 여호와를 기억하심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돌아와서 다시 인애를 베푸실 것임을 말하는 구절이다. 본 구절의 문맥 전후에서 주어가 인칭 대명사가 아닌 여호와라는 이름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강조하고 있으며, 이 여호와의 이름은 그가 계속 기억하고 있는 이름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주’라고 바꾸어 버리면 ‘주’라는 이름이 그가 계속 기억하는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아모서 9:6에 개역성경은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하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고 번역하는데, 표준 새번역은“하늘에 높은 궁전을 지으시고... 쏟으신다. 그분의 이름은 주이시다”로 번역한다. ‘주’는 이름이 될 수 없으며, 또한‘주’라는 말을 6절에 묘사된 그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의 능력에 합당한 이름이 될 수가 없다.

  구약 성경에는 자주 여호와의 이름의 독특함이 강조된다. 이사야서의 일부에서만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야 24: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사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여 땅도 조성하시고.... 나는 여호와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8:1-2, “...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등등. 위의 구절들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독특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여호와” 이심을 밝히신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이스라엘에게만 사용했으며, ‘주’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주’라는 말은 하나님의 독특한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하다.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ASV)은 네 개의 문자를 여호와(Jehova)로 번역하고, 그 외에도 네 개의 문자를 여호와 혹은 야훼(Yahweh)로 표기하는 성경들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Jerusalem Bible(야훼), Emphasized Bible(야훼), Translation of OT Scriptures (by H. Spurrel), Holy Bible containing OT and NT (by American Baptist Pub), A Rendering of the Book of Psalms (by J DeWiitt), Young's Literal Trans. of H.B. (by R. Young), 한글 공동번역성서(1977년도판, 야훼).

  여호와 이름을 주로 바꾸어 성경을 번역하는 문제는 또 다른 어려움을 낳는다. 여호와 이름이 들어간 합성어의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표준 새번역은 이러한 경우에 여호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등).

  또한 아도나이와 네 문자의 이름이 함께 사용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도 있다. 영어는 아도나이 YHWH는 “the Lord GOD”(RSV, 창 15:2,8; 수 7:7; 삿 6:22 등)으로, YHWH 아도나이는 “GOD, the Lord”(시 68:20; 합 3:19 등)로 번역했다.

  KJV(1611)와 NEB(1970) 등은 대부분 YHWH를 LORD라고 번역하면서도 출 6:3 등 몇 곳에서는 JEHOVAH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들 번역들은 여호와 이름이 들어간 복합 고유명사에서도 여호와를 살려, “Jehovah Jireh"(창 22:14), "Jehovah-Nissi"(출 17:15) 등으로 번역한다.

  이상에서 볼 때에 여호와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어려움이 있음이 드러났다. 어차피 일부에서 여호와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면 그 이름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된다.

  ‘주’는 타 종교에도 사용할 수 있으며, 종교가 아닌 문학작품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분명 타 종교에서 사용할 수 없는, 이스라엘 종교에서만 특별하게 사용되는 신의 명칭이다. 따라서 여호와 이름 대신 공통적인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 독특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며, 또 이스라엘 종교를 일반종교화 시키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 된다.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함을 그의 이름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밝혀내고,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가 믿는 여호와 종교의 참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2. YHWH 이름의 발음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유대인들이 네 문자의 이름을 오랫동안 불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름의 발음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네 문자가 나오면 아도나이(yn"doa})로 대신 읽었다. 주후 5세기부터 시작된 맛소라 학파들이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을 붙일 때에 원래의 이름을 잃었기 때문에 네 문자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여호와’로 발음하도록 하였으며, 만약 네 문자가 아도나이와 함께 나타날 경우에는 엘로힘의 모음을 붙였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발음은 원래의 이름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그 이름의 원형(모음이 붙은)을 찾기 위해 성경 안에서와 밖에서의 다양한 참고자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발음의 근거로서의 첫 번째의 자료는 여호와 이름의 단축형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 이름의 단축형이 출애굽기 15:2과 17:16에 yāh(Hy:)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할렐루야 시에서도 나타난다(시 68:4,18[히, 5,19절]). 구약성경에 이 형태가 50번 나타난다. 그 외에도 사람의 이름에서도 이 단축형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여호나단(@t;n:/hy] = “여호와께서 주셨다, 삼상 14:6,8)과 여호사밧(fp;v;/hy] = “여호와가 심판하신다”, 왕상 22:42 등).

  이 단축형은 고어로써 최초의 형태라는 견해와, 또한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여 전체를 부르지 못하고 약식으로 단축하여 불렀다는 견해로 나뉜다. 이러한 단축형은 우갈릿어에서 y로, 아랍어에서 yā로도 나타난다. 또한 아람어로 쓰여진 이집트 파피루스에서도 yh와 yhw로 나타난다. 이집트의 엘피판틴 문서(페르시아 시대)에는 합성어에서 접미어로 -yāhȗ 혹은 -yāh로 나타나기도 한다.

  앗수르의 자료에서 아하스의 이름이 ia-ú-ḥa-zi로 쓰였는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yahū-ḥaz로 음역되며, 아사랴의 이름이 az-ri-ia-a-ú로 쓰였는데, 히브리어는 azri-yahú가 된다. 히스기야의 이름도 나타나는데, 그것을 히브리어로는 ḥāzaqi-yahū가 된다. 이 이름들이 모두 여호와 이름의 약칭이 들어있는 형태로 여겨진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지역인 주전 5세기의 닙불(Nippur)에서 발견된 기록에 여호와 이름과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여러 이름들이 나타난다. ia-a-ḥ-u-natan은 히브리어로 음역하면 yahū-nāṯan가 되고, 또 이름의 끝글자에 -ia-a-wa가 나타나는데, 히브리어는 -yaw에 해당한다. 이 단축형에서 우리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이름의 첫글자가 야(yāh, Hy:)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성경 외의 고대 문서들에도 그 이름에 대한 많은 참고자료들이 있다. 고대 헬라어 문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iaoue 혹은 iabe가 자주 등장하고, 또한 iaō로도 나타난다. 또 교부들의 글에도 iaō, iaōou, iau, ieou, ieaō, iaou 등의 발음으로 나타난다. 라틴어에서는 yaho가 발견된다. 이것들은 당시 그 이름을 약자형인 YHW로 사용한 것이다. 이상의 증거들에서 히브리어로 복원해 본다면 야호(/hy:) 혹은 야후(Why:)가 된다.

  YHWH(hwhy)의 어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야(hy:h;)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본다. 그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성경적 근거는 출애굽기 3:14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네 개의 문자 YHWH(hwhy)는 하야 동사의 미완료형 삼인칭 남성 단수형이 되어야 한다. 미완료 삼인칭 남성 단수형에서 접두요소 야(y:)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사역형(힙일) 밖에 없다. 따라서 네 개의 문자의 발음은 야훼(hw<h]y:)가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야훼가 가장 정확한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Jerusalem Bible과 한글 공동번역 등이 그 이름을 야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가능한 정확하게 재생하여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따라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야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도 정확하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반드시 야훼라고 부르기를 강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 맛소라 성경이 여호와로 부르고 있으며, 또 수세기 동안 여호와로 불러왔기 때문에 계속 여호와로 부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사실 그 나라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최’씨를 영어는 ‘쵸이’(Choi)라고 발음한다. 그렇다고 꼭 ‘최’라고 발음하기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예수는 헬라어로 ‘예수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라고 발음하며, 영어는 ‘지저스’(Jesus)라고 발음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어를 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이 틀렸으니 바로 고치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

  이름을 부를 때에 발음이 어떠하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더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지만,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불러오던 것을 바꾸도록 강요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맛소라 학자들이 ‘여호와’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름을 부르느냐 부르지 않고 존칭(‘주’)으로 대체하느냐 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차선의 선택으로 여호와 그 이름을 불러야 할 것이며, 또한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에서 우리는 맛소라 본문이 표기한 ‘여호와’라는 발음을 계속 사용하도록 하겠다.

 


3. 여호와 이름의 의미

 


  여호와 이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참고구절은 출애굽기 3:14과 6:3절이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을 통하여 여호와 이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1. 출애굽기 3:14

 


  출애굽기 2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역으로 인해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3장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셨다. 3:10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였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만약 내 백성들이 당신을 보낸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하리이까?”(13절)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하여 이중으로 대답하신다. 첫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히, hy,h]a, rv,a} hy,h]a,)(14절)라고 하셨고, 둘째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로로 기억할 나의 표효니라”(15절)고 말씀하셨다. 이 두 구절은 이중 혹은 반복으로 볼 수 있다. 전자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밝히시고, 후자에서 그 이름 자체를 바로 밝혔으며, 또한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졌다. 이 구절들을 합하여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밝혔으며,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임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구절의 축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것에 대하여, 그들이 그 이름에 대해 무지(無知)했는지, 아니면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내기 위해 질문했는지 단정하기 힘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오랫동안 지내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않았던 것(겔 20:8) 등을 보아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모세가 족장시대 보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 혹은 그의 구원사역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얻어내기 위해 질문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대답하신 구절 중 히브리어 hy,h]a, rv,a} hy,h]a,를 한글 개역성경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하였고, 영어 성경은 대체로 “I am that I am” 혹은 “I am who I am”으로 번역한다. 이 번역에 의하면 이 문구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하심을 나타내는 듯하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실존하는 하나님이다”(I am He who is)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카슈토(U. Cassuto)는 출애굽기 3:12절에서 하나님이 이미 밝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니라”(&M;[i hy<h]a,,AyKi)는 말과 결부시켜, 그의 현존하심의 의미를 확인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은 그들을 돕고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을 말하며, 또 앞으로도 그들의 자손과도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밝히신 것이라고 한다.

  기스펀(W. H. Gispen)은 15절과 연관지어 하나님은 족장들과도 함께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현존하는 자신의 존재를 이스라엘에게 알리신 것으로 이 구절을 풀이한다. 아이히로트는 여호와 이름은 “존재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꼭 들어맞는 이름으로써,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하여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여호와 이름을 부를 때에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언제나 상기시킨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영어번역 성경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이름의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사실 하야(hy:h;) 동사는 존재를 뜻하는 ‘being’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순수존재(pure being)라기보다는 ‘활동하시는 존재’(active being)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여호와 이름을 순수 존재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옳은 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6:3을 함께 풀어야 할 것이다.

 


3.2. 출애굽기 6:3

 


  출애굽기 5:1에 모세는 아론과 함께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때에 2절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했다. 바로는 모세의 그 거만한 소리를 듣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학대하였다. 학대가 더 심해지자, 백성들이 모세를 만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5:21)고 원망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어 이 백성으로 더 큰 학대를 당케 하십니까?”(5:22); 둘째로, “왜 약속한 대로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십니까?”(23절).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답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너가 보게 될 것이다”(1절)고 말씀하시고는, “나는 여호와로라”(2절)고 자신을 밝히신 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히, 엘 사다이, yD;v' lae)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셨다(3절).

  여기에서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족장들에게 알리지 아니했다고 했는데, 과연 조상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는가? 그러나 창세기에서 여호와 이름도 자주 사용되었다. 창 12:1과 출 3:12 사이에 여호와란 이름이 160회에 걸쳐 나타난다. 그 중에 40회 이상이 족장들의 입에서, 또는 그들의 대화 중에서 발견된다. 아브라함은 친히 여호와 이름을 부른 것으로 나타난다(창 12:8; 15:2, 8 등등). 또 하나님도 족장들에게 말할 때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창 15:7; 18:14 등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문서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를 잡는다. 창세기의 저자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 6장은 여호와의 이름을 몰랐던 E 문서, 혹은 P 문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며, 이 그룹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이전에는 몰랐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문서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족장들이 그 이름을 알았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6:3절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3.3. 두 본문 해석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점들

 


    첫째, 본문에서 두 이름이 대조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고찰하였듯이, 이름은 인격, 특성, 속성과 인격의 본질을 담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 두 이름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은 이 이름들이 불려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적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임이 분명하다.

 


엘 샤다이

  엘 샤다이(전능의 하나님)는 성경 다른 곳에서보다 창세기 족장들의 기사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었고, 욥기서에서 약 31회 가량 사용되었다. 샤다이는 일반적으로 앗수르-바벨론 단어 šadȗ에서(산)와 šaddai(산의 신)에서 나왔다고 보기도 하고, 우가릿어의 ṯdy (산들) 혹은 šd (가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게하르더스 보스는 샤다이와 히브리어 동사 샤닫(dd'v;, 지배하다, 파괴하다)와 관계를 찾으려 하였다. 그는 이 이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초자연적인 활동을 강조한다. 그는 능력으로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으로 본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기스펜은 샤다이의 어근적 의미를 “to be strong”으로 보며, 그를 “전능(Almighty)의 하나님”으로 번역한다.

  엘 샤다이는 창세기에서 족장들과 관계되어 여섯 번 사용되었데, 이때에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써 족장들에게 엄청난 일을 해 줄 수 있는 분으로 강조되었다. 자연을 지배하시는 그러한 능력으로 그는 족장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수립하고, 또 실천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엘 샤다이는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알려졌다. 족장들은 말씀을 통하여 엘 샤다이로서의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으며, 그의 축복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축복은 족장들의 이웃에게 넘쳐흐르기까지 하였다.

  족장들의 기록 외에도 엘 샤다이는 오경의 다른 곳에서 3회, 선지서에서 4회, 그리고 시편 68:15(히); 91:1; 룻기 1:20-21에 나타난다. 이 기록들에서도 족장시대의 그 용도에 일반적으로 부응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부름을 받는 자들과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하여 활동하시는 위대한 통치자이시다.

  결론적으로 엘 샤다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그리고 그러한 그의 능력을 앞세우고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엘 샤다이 이름이 족장들에게 현실성이 있는 적절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과(창 17:1) 야곱에게(35:11) 직접 엘 샤다이로 밝히셨다. 족장들도 엘 샤다이 이름을 의미있게 사용하였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면서 엘 샤다이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으며(창 28:3),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축복하시면서 자신을 엘 샤다이 하나님으로 선언한다(창 35:11).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을 보호하실 분으로 엘 샤다이를 언급한다(창 43:14).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유언할 때에 자신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엘 샤다이로 말하기도 한다(창 48:3).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엘 샤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창 48:14-22). 이상의 예들에서 볼 때에 족장들에게는 엘 샤다이가 자신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서 친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

  물론 여호와의 이름이 창세기에서 엘 샤다이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이 창세기에서는 출애굽기 이후의 책들보다 훨씬 적게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창세기에 여호와란 이름이 146번, 엘로힘이란 이름이 164번 나타나는 반면,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엘로힘이 125번, 여호와가 1,800번 나타난다. 출애굽기 이후에 여호와의 이름이 월등하게 많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에 족장들에게 여호와 이름의 의미는 모세 이후의 사람들에게보다 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약자인 야(yah)나 요(yo)가 모세 이전에는 개인적인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로 나타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도 족장시대에는 이 이름이 흔하게 사용된 것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모세 이후는 이러한 형태의 이름이 흔하게 사용된 점을 보아, 이 사건 이후에 여호와의 이름이 즐겨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ve/h)를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간 여호수아(['vu/hy])로 바꾸도록 하였다(민 13:16).

  이상은 모세 이전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불렀지만, 그 풍부한 의미를 몰랐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즐겨 불렸던 이름이 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모세시대에 경험을 통하여 그들이 여호와 이름의 의미를 확실히 알았으며(경험적으로), 그래서 이제는 그 이름을 즐겨 부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이름이 브(B])라는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카슈토는 출애굽기 6:3의 구절에서 만약 문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론이 맞으려면 “나의 이름, 즉 여호와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주어가 여호와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내”가 주어이며, 이름은  서술어에 위치해 있다. 엘 샤다이 앞에 전치사 브(B], by)가 있다. 이 전치사는 “...으로써”(as)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것은 그의 신분을 담고 있다. 다시 본문을 번역하면 “내가 나의 이름을 그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yD;v' laeB], as El Shadai) 나타났으며, 내가 나 자신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는 그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했다”이다. 즉,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나타낸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어떠한 분으로 나타내셨느냐에 있다. 이름은 그 분의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 자체를 그들이 알았다거나 몰랐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름을 통하여 그분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 핵심된 사안이다. 즉 “엘 샤다이의 신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를 여호와라는 신분으로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셋째, 동사 야다([d'y:)의 용도를 바로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6:3은 두개의 단순재귀동사형(닢알)인 애라(ar;ae)와 노다티(yTi[]d'/n)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내가 알리지 아니했다”로 번역되는 노다티의 원형 야다([d'y:, 알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조상들은 전능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지식적으로는 알았지만, 아직 그 이름을 경험적으로는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러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알게하겠다”란 말은 그들에게 ‘경험하게 하여 확실하게 깨닫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에스겔 20:4과 22:2에는 같은 단어가 그들이 그 죄에 대한 값을 톡톡히 치루게하여 경험을 통하여 알게 하겠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이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무엇인가 하고자 한다. 그 일을 그들이 경험하고 난 후, 비로소 여호와라는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넷째,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 묻는 장면에서 마(hm;, 무엇)가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에서 미(ymi, 누구)가 사용되지 않았고, 마(hm;, 무엇)라는 의문사가 사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는 사람의 명칭(칭호)를 요구하는 반면, 마가 이름과 결부되었을 때에 그 이름 안에 있는 인격적인 특징, 그리고 힘과 능력을 찾아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존재론적인 의미, 즉 존재의 정적(靜的) 개념이 아니라, 무엇을 하시는 분, 즉 동적(動的)이며 활동적인 그의 임재(presence)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곧 모세와 이스라엘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그의 임재를 곧 경험함으로써 그를 알게 될 것이다.

 


3.4.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서 하신일

 


  그러면 여호와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시겠다는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두 가지로 대변된다. 첫째로, “너희들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어내어 구속하겠다”는 것이며(출 6:7); 둘째로, “약속의 땅을 주어 너희들의 기업이 되게 하겠다”(8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약속하신 것이며, 이제 그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과 관계된 이름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출애굽기 6:8절에, 결론적으로 “나는 여호와로라”고 다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다.

  성경은 이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계속하여 기록한다. 첫째 그가 하실 행동은 자기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그 중에 특히 마지막 재앙으로서 유월절에 행하신 일은 여호와의 이름에 걸 맞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풀어주어 떠나기를 허락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출발하던 아침, 애굽 사람은 통곡하였고, 이스라엘 사람은 당당하게 찬양하며 떠났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떠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의 절정은 홍해사건이다. 출애굽기 14장에,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나서서 행진을 할 때에 바로의 마음이 또 다시 강퍅해져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려 쫓아왔다(14:5이하).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고, 뒤에는 애굽 군대들이 맹렬히 따라왔다.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다(13절). 모세가 지금 홍해 가에서 즉 “여호와의 구원”(hwhy t['Wvy])을 보라고 할 때에 과연 어떤 구원을 말하는가? 출애굽기 14: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즉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향하여 나가서 싸워서 자기 백성을 구해내는 그러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홍해를 가르셔서 자기 백성들을 지나게 하셨고, 애굽 사람들이 들어 왔을 때에 물이 그들을 삼키도록 했다. 하나님이 물을 그들 위에 덮칠 때에,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 도다”(14:25). 애굽 사람들은 “물이 우리를 덮친다 도망하자”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가 우리를 치는 도다”고 외쳤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애굽 사람과 싸우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30절),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 구원의 상황이 끝났다.

  출애굽기 15장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즐겁게 노래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절).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 시로다”. ‘용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쉬 미르하마(hm;j;l]mi vyai)인데 직역하면 “전쟁의 분이시니” 이다. 그가 이루신 구원은 전쟁을 통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자기 백성을 무사히 출애굽시키신 분이시며, 또한 그 백성을 자기의 땅으로 들이신 그러한 구원이다.

  출애굽기 15:3 하반절에 그들은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이제야 여호와란 이름을 의미있게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야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떠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족장들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에 그 이름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3.5. 여호와 이름의 정의

 


  이제 다시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위해 6장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로라”하시고는(6:2),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1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하실 준비가 되셨음을 말하는 모습이다. 3절에, 전에는 족장들이 “전능의 하나님”, 즉 엘 사다이로 경험을 했지만, 이제는 다른 이름,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그들이 곧 경험할 것임을 말한다. 이제 곧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며, 그 일이 이루어 질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로서의 이름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준비가 되셨음을 알리는 이름이다. 두 가지 구속의 일을 하실 준비가 되셨다는 것이다. 출애굽의 구속과, 가나안 땅을 주는 구속이다. 6:1-3에서 이제 그는 이 일들을 시작할 준비가 되셨음을 알리시면서 자기 이름을 밝히시는 것이다.

  다시 3:14에 가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을 풀이한 단어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라는 번역은 좋지 못하다. 존재를 의미하는 상태적인 해석보다는 역동적인 해석(a dynamic interpretation)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동할 그러한 하나님, 즉 행동하심으로써 자신이 어떠한 분이시다는 것을 밝히실 분이시다.

  출애굽기 6:1-3은 또한 이러한 행동이 임박했음을 보여준다. 1절에“너는 이제 곧 보리라”고 말씀하셨고, 2절에는“나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으며, 3절에서는 “이제 너는 경험적으로 내가‘여호와’임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임박한 미래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행동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hy<h]a, rv,a} hy<h]a,는 “I am that(what) I will be"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히브리어 구절에서 앞의 hy<h]a,는 ‘be’로서 ‘나는 무엇...이다’의 의미이고, rv,a}은 관계대명사이며, 관계절 안에 있는 hy<h]a,는 ‘be 동사의 미완료인데, 미완료는 흔히 미래로 번역된다. 따라서 영어로 “I am that I will be” 혹은 “I am what I will be”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즉 “나는 ...어떠한 분인데, 내가 앞으로 있을 그러한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가 이제 곧 무슨 일을 함으로써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나타낼 그러한 분이시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나를 ‘아하, 여호와는 그러한 분이시구나!’라고 알게 될 것이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존재론적인 칭호나 존재의 정적(靜的) 개념보다 동적(動的)이면 활동적인 현존에 대한 약속이 담겨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 속에는 미래, 곧 임박한 미래가 또한 내포되어 있다. 그가 곧 어떠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어떤 일을 위한 ‘준비되었음(readiness)’을 알리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이름이다. 어떤 일인가? 구원의 약속을 이루실 일이다.

  유월절과 홍해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바닷가에 부셔진 마차와 적군의 시체를 바라본 이스라엘, 이제 그들은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라고 고백한다.

 

결론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이 “내가 내 이름을 거기 두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친히 그가 거기에 계신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된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이름이다.

  이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고, 또 하나님이 친히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강조할 때에 사용한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번역성경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 이름 대신 ‘주’라는 존칭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 근거하여,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부르기를 조심하였던 유대인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습관 때문에 여호와 이름이 잊게 되었으며, 70인역을 비롯하여 번역성경들에서 그 이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많은 성경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를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밝히면서 어떠한 독특한 일을 하고 계심을 밝히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이름을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러한 독특한 일도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름은 그분의 인격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하시는 일을 또한 대변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14은 그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성경에서 가장 핵심되는 구절이다. 그 해석에서 일반적으로 그 이름의 의미를 순수존재(pure being)로 해석하지만, 그러나 ‘활동하시는 존재’(active being)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는 출애굽기 6:1-3을 통하여 확실히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곧 경험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가진 그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출애굽과 땅을 기업으로 받는 그러한 구원의 일들을 경험하고, 그들은 여호와 이름의 위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6:3을 통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역동적인(a dynamic interpretation) 의미로 해석해야한다. 우리는 그 본문에서 임박한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이름을 가장 즐겨 불렀다. 그 어떠한 이름보다 가장 많이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어떤 일, 곧 구속의 일을 곧 하실 것(readiness)을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자가 누리는 그 엄청난 혜택을 우리도 또한 그 이름을 부름을 통해 누려야 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하셨다(출 3:15).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실 준비가 되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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