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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찌하여 어찌하여 (1월24일 주현절 셋째주 설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 25. 06:25

어찌하여 어찌하여 합2:4-20

오늘 말씀 합2:4-20을 중심으로 [어찌하여 어찌하여]라는 제목으로 주님 주시는 은혜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박국은 포옹하다, 매어 달리는 자라는 뜻으로 두 가지 질문(1;3,1:13)에 대한 답변(2장)과 찬양(3장)으로 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BC609년 유다의 16대왕 요시야가 앗수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차 애굽이 앗수르를 지원하려고 갈르미스로 가는 것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애굽은 17대 여호와하스를 폐위하고 18대 여호야김을 세웠으나, 애굽이 바벨론에 패하자(BC605) 여호야김과 귀족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간 제1차 포로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정치 외교 국방 전 분야에서 큰 혼돈과 위기에 처해 있던 남유다는 국민적 통합과 단결은 고사하고 경제 도덕 종교적으로 타락이 극했습니다.

조공을 바치기 위해 위정자들은 백성을 탄압하고 착취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잡아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이스라엘에 남아 있던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선지자가 하나님께 매어 달리어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범죄가 있으며, 어찌하여 더 악한 바벨론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할 수 있느냐는 하소연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므로 구원하시고 더 큰 악인 바벨론은 멸망시키시려는 구원의 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더 큰 악을 이용하여 작은 악을 징계하신 후 작은 악인 선민 이스라엘은 구원하고 큰 악인 바벨론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아웃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인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약 5년 정도 평균적으로 더 오래 사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고통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훈련하면서 흘린 땀 한 방울이 전쟁터에서 피 한 방울이 되고, 조개의 상처가 그 고통을 감추려고 아름다운 진주를 생산하듯, 운동선수가 훈련장에서 흘린 땀방울의 양이 시상대 메달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 고통도 감사히 받아야 되지 않을까요?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가요?

첫째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려고(2:1-4)

1-4절은 응답의 서문이며 5-20절은 응답의 본문입니다.

1절에서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통하여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관련해 파수군이 되어 성루에 서서 보겠다는 것입니다.

파수군이 적의 침입을 발견하고 경고를 발하듯이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파수군이 되어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질문뿐 아니라 구한 것은 오래참고 기다리는 기다림은 성도의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충성 봉사하여 거룩한 사명이 완수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것을 기다리는 것 만큼 중요한 사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를 드린 후 이후에 즉시 다시 그 문제를 놓고 염려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문제를 맡겼으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두고 우리는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문제로 염려하거나 걱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막11:24절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하박국은 더 이상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전전긍긍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문제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의 무대인 성루에 올라 파수합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그 응답을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하시며, 그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가장 선하고 복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응답을 주시든 기꺼이 수용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의 방향까지 결정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 태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없는 불신자와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방향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최선의 응답으로 받아들이며 순종으로 반응할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줄 믿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를 결코 공수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던 하박국에게 선민을 심판한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게 앞으로 일어날 묵시를 주시며 기록하게 한 것이 4-20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를 찾아가시며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을 간구하셨다면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 것인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응답이 비록 더딜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판에 명백히 새겨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묵시를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 전달하라는 말입니다. 통섭적 사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을 얻는 지혜가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바로 헤아릴 수 있으며, 영적 어두움, 심판의 자리에서 나아와 진리의 빛 구원의 자리 위에 굳건히 설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할 때 참된 축복의 삶을 살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통독해야 합니다.

읽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알았다면 전하기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3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것이 응할 성취의 날이 확실히 정해져 있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무 계획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계획에 따라 추호의 착오도 없이 진행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이미 작정하셨고 그 작정에 따라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시며 전개하고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에는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때가 찼기 때문이고 다시 오심도 하나님의 경영가운데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의 때는 70년 후 고레스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거나 성취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이 정하신 때에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하나의 남은 약속인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기다린 것이 2천년입니다.

오랫동안 무수한 성도들이 기도하고 기다려도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재림도 불원간 그래도 이루질줄 믿습니다.

4절에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입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를 강조하기위해 롬1:17절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의인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행위만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즉 행위가 의롭고 완전한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할 때 행위가 의롭거나 완전한 자라기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는 자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삶을 영위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롬4:20-22).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지만 합2:4절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합니다. 믿음이 인격화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관계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누가 어떤 믿음을 갖느냐는 것이며, 믿음에 삶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 삶의 순간 순간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참된 의인은 오직 믿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데 고생이 있고 희생이 있고 뼈를 깍는 아픔이 있고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만큼 극심한 위험과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되 기쁨으로 감사하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신 것은 구원하시기 위함인 줄 확실히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에 입각해 행동을 결정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기쁘시게 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가요?

둘째로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시려(5-14)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죄를 다섯 가지로 지적하시며 심판하겠다 하십니다.

첫째 죄악은 5-8절로 탐욕의 범죄와 심판 선포입니다.

술을 즐기고 거짓되고 교만하여 자기 욕심을 넓히며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은다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와 다국적 기업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둘째 9-11절은 바벨론의 부당한 이익추구와 범죄지적과 심판 선포입니다.

셋째 12-14절은 수탈과 강제노역부과의 범죄지적과 심판선포입니다.

14절에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니다.

13절에서 바벨론이 다른 나라의 백성을 동원하여 고통을 주며 건설한 바벨론 성읍과 바벨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불탈 것이라 하였습니다.

14절 첫머리에 키(כי)는 왜냐하면 ~때문이다는 인과 접속사가 있어 13절의 이러한 심판이 있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완벽히 세워지는 세계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혹은 구현되기 때문에 탐욕과 불법과 폭압의 바벨론을 완전히 멸망시킨다는 것입니다.

즉 불법의 바벨론이 새로운 질서의 공의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것을 매우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여호와의 영광(כבוד יהוח )는 여호와의 임재와 다스림을 함의(출24:15)하므로 여호와의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 공동체 한 가운데 임재하사 좌정하시면서 그들을 다스릴 것을 나타냅니다.

바벨론의 멸망이 단지 그들의 악행에 대한 보응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지키실 뿐 아니라 악한 세상 나라를 심판하실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 ,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영광을 온 세상이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선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가득함 즉 양적 채움뿐만 아니라 충만한이라는 질적인 채움이라는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충만하다는 것은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특히 인정하다(ידע 야다의)는 단순히 사실 관계를 인지하는 지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앎 체험을 통한 생생한 앎, 그러한 앎을 근거로한 신뢰관계를 포함하므로 여호와을 단순히 아는 것으로 끝나지않고 인격적 관계에 근거해 생생한 신앙적 체험을 통해 알게 되는 온전한 선교를 말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전도하고 선교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가요?

셋째로 그 성전에 계신 여호와만을 오직 경외하게 하기 위하여(15-20)

15-17절은 바벨론에 대한 네 번째 저주선포로 이웃의 타락과 멸망을 조장하는 바벨론의 악행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하체를 드러나게 할뿐 아니라 수치를 드러냄으로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게 하는 자와 약소국을 향한 폭력행사에 대해 심판 하겠다 하십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아파하는 꼴을 보고 박장대소하는 것이 우리들 심보입니다. 유머는 스스로 디스할 때 터집니다.

바벨론이 복속시킨 약소국들이나 주변국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방탕과 타락 음행을 일삼고, 무자비하게 짐승을 죽이고 사람의피를 흘리는 등 포악을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땅이 큰 나라 고관대작이라면 주변국들이나 약소국의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마치 우리 이웃 일본 /중국처럼 경제동물이 되고 미국 /러시아처럼 무기를 앞세운 제국이 되어 주변 나라의 신뢰와 존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이웃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그 활동이 저급해서 경멸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파괴적이고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일만 일삼고 추악하고 퇴폐적인 문화로 주변국들에게 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군사력과 물질문명을 대단했지만, 그들의 생활과 윤리는 바닥에 있었고 삶은 음란하다 못해 더러웠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사탄의 일곱영이 생각나시는지요?

더러운 영, 악한 영, 잘 아는 영, 거짓의 영, 유혹의 영, 말못하게 하는 영, 듣지 못하게 하는 영이라 했지요. 사탄의 더러운 영이 바벨론을 장악한 것입니다. 높은 지위, 많은 물질을 소유했다 할지라도ㅐㅐ간장 명예회장처럼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방탕하면 존경받을 수 없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평범한 자리에 있을 지라도 가진 것이 없이 빈궁할지라도 선한 삶, 의로운 삶, 인자한 삶,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마침내 존귀한 자 영광스러운 자라는 칭호를 받고 일컬음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이 주변에 선하고 의로운 영향력을 끼쳐 주께 영광 돌려야 될 줄 믿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웃을 향해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한국초대교회의 선한 모습을 회복해야 될 줄 믿습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 나온 것처럼 화상으로 죽어가는 자를 위해 자기 피부를 떼어 이식수술을 시킨 한국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18-20은 바벨론에 대한 다섯 번째 저주 선포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심판 받을 것이므로 살아계신 절대 유일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에 계신 여호와를 경외하라합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탐욕이지만 그 열매는 허무일 뿐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뿐 우상을 섬기는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허무하고 무가치한 우상을 섬기는 일을 근절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놓고 그 우상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줄 대상을 찾은 결과 우상을 세워놓고 그 우상에게 신적권위를 부여하고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는 탐욕입니다.

증언 증인 증거는 순교 믿음은 충성입니다.

자기의 탐욕을 위해 우상을 섬긴다면 그의 탐욕이 채워질 수 있을까요?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사44:17절 말씀처럼 어리석고 우매하며 허망한 짓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어리석은 행위는 더 나아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는 것으로 (롬1:23)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20절에서 하늘 성전에서 절대 주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면전에서 잠잠하라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는 말씀은 생기가 없는 우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시다는 것으로 지상 성전이 아닌 하늘 성전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 성전에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성전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온 땅을 잠잠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그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국회에서 대통령 말을 안 들으니 대통령이 직접 대모에 참석하듯 경제활성화법 촉구 서명서에 서명하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절대적 왕권을 가진 왕 앞에서 신하나 백성들은 왕의 통치 행위에 대하여 어찌 그리 하냐고 항의하거나 불평하지 못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주권자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절대적인 말씀, 그 분의 뜻을 헤아려 그 말씀을 묵상하고 입술에 머금고 마음에 새겨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왕중의 왕이시며 절대 유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이 창조주시며 통치자시며 참된 신이신 하나님 앞에서 취할 합당한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찬양과 감사 절대신뢰의 고백만을 드려야 될줄 믿습니다.

실로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항의하거나 불평할 수 없고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통치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이 우주를 지탱하는 중심입니다.

히브리식 사고 즉 성경적 사고는 통전 통합 통섭이고 5체는 신중심 관계중심 직관중심 동사중심 의미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했습니다.

20절 첫마디를 오직 으로 해석했지만 원어에는 와우(ו)로 시작하여 그러나 로 번역하는게 옳습니다. 18-19절의 우상숭배는 어리석고 우매한 짓이지만, 20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 우상의 헛됨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저주와 화를 절감한 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을 성전이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의 개념을 하늘 성전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성막성전 내주하시는 성전이 있다 했지요.

여기서 성전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된 성도로써 항상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 사상을 가지고 순간 순간을 살아가야 될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온 땅이 그 앞에 잠잠해야 합니다. 바벨론 우상을 섬기는 자들 헛되이 섬기는 우상들과 대조되는 초월자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온 우주의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경배하라 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의 신앙의 핵심은 순간 순간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찌하여 성도가 어려움 고난을 당하느냐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왜 더 악한 악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느냐고 호소하듯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으신 경륜과 계획 섭리 따라 오직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가요?

첫째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려고(2:1-4)

둘째로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시려(5-14)

셋째로 그 성전에 계신 여호와만을 오직 경외하게 하기 위하여(15-20)

하나님은 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온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는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와 ,하나님이 계신 성전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교회를 이루시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서대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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