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마 5:1-12)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2. 24. 10:07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마 5:1-12

 

출 처| 이동원목사

○ 팔복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오늘 종려주일의 주제는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소위‘적극적인 사고방식’(Power of positive thinking)의 화두를 우리 시대에 던져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한번은 기차 여행을 가면서 식당에 있는 열차 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건너편에 한 초로의 부부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을 향해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소리가 건너편에 앉아있는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거 야채가 왜 이래? 고기는 너무 질긴 것 같고, 포도도 너무 신 것 아니야? 이 열차의 온도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 날씨도 안 좋고 여보 우리 괜히 여행 나온 것 아니야? ”

 

이렇게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 부인의 소리가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필 박사를 의식한 듯 부인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얘기를 건네 왔다고 합니다.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제 아내가 본래 직업이 그렇습니다.”

 

필 박사의 호기심이 발동을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죄송합니다만 부인의 직업이 무슨 직업이신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다시 “예, 제 아내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죠.”

 

그러자 다시 필 박사가 물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제조하시는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필 박사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 제 아내는 불행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 불행을 만들면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

이 단어가 어떤 느낌을 주십니까?

 

만약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본문이 마태복음 5장입니다. 5장 1-12절 까지를 우리는 흔히 팔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팔복 가운데 화평케하는 자의 복’이 들어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를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하지 않습니까?

피스메이커가 존재한다면 행복 메이커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을 만들어 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불행 메이커이십니까?

아니면 행복 메이커이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짤막한 시간에 소위 이 산상수훈의 첫 부분인 팔복을 상세하게 공부하고자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시간도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괄적인 살펴봄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여러분과 제가 행복을 만드는 사람으로 우리의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느냐를 함께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팔복이 가르치는 첫 번째 행복한 인생의 열쇠가 있습니다.

 

 

1. 행복한 인생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 이 팔복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혹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이것을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자면 사실은 ‘복이 있도다’ 라는 낱말이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그 다음도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로 ‘마카리오스’ 혹은 ‘마카리오이’ 라는 단어가 먼저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blessed 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 하면 먼저 연상되는 단어가 있죠? happiness 혹은 형용사로 happy 라는 단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용하는 단어는 happiness 가 아니라 여기서 blessing 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것은 소위 happiness 와 어떻게 다를까요?

 

happiness 란 단어는 happen 이라는 동사에서부터 유래한 단어이죠.

이 happen 이라는 것은 우연히 어떤 일이 발생하다는 의미이고, 만약 행복이 그런 것이라면 행복은 어떤 우연의 선물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happiness 가 아니라 blessing 인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때 God Bless you ! 하지 않습니까?

이 blessing 이라는 단어는 본래 앵글로 색슨 단어에서 blood 라는 단어에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피란 말이죠.

 

이 단어는 본래 피의 제사를 뜻하는 말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바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희생 동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가 용서 받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구약의 피 제사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blessing 이라는 단어의 배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는 중요한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 왜 그랬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팔복을 살펴보면 이 팔복의 모든 내용은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를 느끼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표준, 혹은 하나님의 가치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혹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목적 앞에 자신을 드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복음을 삶으로 그리고 자기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인생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사는 사람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르켜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열쇠는 단순한 행복의 처세를 익히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2. 행복은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인생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좀 더 권력을 소유하고 좀 더 명예를 소유하고 좀 더 큰 집과 좀 더 큰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팔복에서는 행복을 철저하게 소유가 아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흥미로운 얘기가 있습니다.

 

아주 게으르게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가 어느날 자기 아들에게 교훈을 시작했습니다.

“아들아! 너 열심히 일해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아들은 묻습니다.

“왜 열심히 일해야 해요?”

 

“야 ! 그래야 돈을 좀 벌지.”

 

아들은 다시 묻습니다. “돈은 벌어서 무엇하게요?”

 

“ 야! 그래야 너도 편히 좀 쉴 수 있고 편히 놀 수가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잖아?”

 

그러자 아들은 빙그레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이나 마찬가지네.”

 

이 아들을 향한 관심 속에서 아버지의 타이름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하는가 라는 목적을 아들에게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수님 만나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격의 변화와 성숙이 이 땅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게 하려함인 것입니다.

이 팔복을 다시 묵상해 보시면 팔복은 철저하게 인격지향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기 위해서는 교만한 자신의 인격이 깨어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온유한 자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완벽하게 갖춘 모델 인격이 있다면 누구를 생각해 낼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시죠.

 

우리 예수님은 친히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교훈을 따라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롤 모델이 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좋은 역할 모델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이래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역할 모본이 되었던 어떤 분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어렸을 때, 혹은 초등학교 시절에 혹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스승, 혹은 어떤 형님이나 누님, 내 주변에 교회에서 만났던 어떤 장로님등의 좋은 롤 모델이 되었던 누군가를 연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음이 어찌 그리 축복인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완벽한 모델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주님 앞에 아버지 앞에 섰을 때 나를 인해 기뻐하시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기대야 말로 우리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라고 이 팔복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 행복은 이웃을 향해서 열린 삶을 살아갈 때 실현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인격의 연단이라든지 성숙은 나 혼자서 성취할 수 없는 목표인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깨어지고 다듬어지고 연단되어지고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주님이 기대하는 인격의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에 등장하는 모든 인격적인 요소들은 나 혼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인격의 모습인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 곧 겸손한 인격을 위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교만을 깨는 작업을 해야 되고 나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이 겸손의 인격을 빚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긍휼의 인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이웃의 약점과 허물을 품어줄 수 있는 긍휼히 여김 이것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빚어질 수 있는 인격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금세기 한 유대인 철학자를 통해서 전 세계의 진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 하나가 출간되었습니다. 유태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책 가운데 ‘나와 너’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관계속에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도 나와 영원자 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그는 말합니다.

관계하에서만 우리의 인격은 빚어지고 만들어집니다.

 

내가 이웃을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만나느냐 에 따라서 나의 인격의 연단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그냥 이용하고 차버릴 때, 이웃은 나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략한다고 말합니다.

 

탈무드는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여행을 하라.”고.

여행 떠나서 일주일이 지나면 집에 오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달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새 집으로 이사를 가라.”고.

새 집의 감격은 한 달을 넘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해동안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결혼을 하라.”고.

허니문의 감동은 일년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탈무드의 절정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생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이웃을 섬기라”고. 그렇습니다.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비밀 이것은 내가 이웃을 품고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하와이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거기 계신 목사님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와이를 우리는 지금 지상 낙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본래 하와이 섬은 낙원이 아니라 부족과 부족 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던 그런 섬이었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하와이의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구교와 신교의 선교사님들이 당도하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와이의 섬은 변화된 것입니다. 이 변화의 와중에 신화적 전설을 남긴 카톨릭 사제 한분이 있습니다. 다미엔 이라는 신부입니다. 본래 하와이 섬 중에 하나인 몰로카이 섬은 이 나환자들을 수용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미엔 신부는 그들과 함께 살며 나중에 그들과 연대화 되기 위해서 심지어 자기 자신이 나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다미엔이 마지막 자기 일생을 마무리 짓기 이전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을 아십니까?

“내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다.”고.

 

평생 이웃들을 섬기다가 자기 자신 일그러진 나환자의 얼굴을 가졌던 다미엔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이런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행복의 고백을 낳았을까요?

그것은 섬김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이웃들을 품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그는 놀라운 성경이 약속한 행복의 비밀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목장교회가 왜 필요할까요? 목장교회에 오시면 섬길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함께 목장을 넘어서서 이웃들을 품고 사랑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목장이 바로 우리의 행복의 하와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일생이 끝나는 어느날 이 고백을 나누고 싶습니까?

“내 인생은 정말 행복한 삶이었어.”라고.

그렇다면 이 팔복의 레슨을 붙들고 행복을 만드는 여행을 한번 시작해 보십시오.

 

 

 
//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

 이동원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