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은혜의 공동체(딛2장11-14)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2. 26. 09:05

은혜의 공동체(211-14)

 

출 처이동원목사

 

필립 얀씨의 저서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 회의가 열렸을 때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가라는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성육신의 교리가 아니겠느냐고 했을 때 어떤 학자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근거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아무래도 부활의 교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자 또 다른 학자들은 죽은자의 환생의 교리는 기독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 유명한 영국의 C.S. Lewis교수가 일어나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른 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기독교만이 제공하는 일관성있는 메시지는 은혜라고 지적하자 결국 모든 이들이 동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가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할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설교하고 어떻게 교회를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로마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강조했고,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역설한바가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유명한 엡2:8-9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같은 강조를 바울은 딛3:5에서도 반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치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은혜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저주가 아닌 사랑을 베푸심이 바로 긍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가도록 만세 전부터 준비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사도는 동일한 관점에서 목회서신인 디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실로 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주님은 각각의 혼자로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안에서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야 할 삶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성도들이 은혜 공동체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 것입니까?

 

1. 과거의 불법들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이유를 설명하며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우리를 불법에서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피흘리시는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불법이란 단어는 죄에 대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죄는 곧 불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하고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 법을 어기고 행한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곧 그의 은혜로 우리는 이런 불법에서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불법을 행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픈 과거 회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땅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애급을 떠나서도 자꾸 기회만 있으면 애급을 그리워하고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사람들중에 창조적인 미래를 만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는 너무 히스토리칼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히스테리칼을 잘못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히스테리칼이 아니라 히스토리칼이래요.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옛날 결혼전의 자기 과거를 기회만 있으면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히스토리칼(historical)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아내에게 하나님은 히스토리칼하지 않으시다고 그분을 본 받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러나 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 스탭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떠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까?

 

베드로 전서2:1-2에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의 은혜 받은 교회 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이유가 오늘의 성도들이 버릴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를 최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만 해도 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었던 것이 성도들이 일단 예수를 믿으면 버릴 것을 분명하게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람피우지 않고, 술 끊고, 도박을 포기하고, 이런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주의 은혜가 다시한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은혜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무엇인가를 버리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미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강조한 바가 있었습니다.

2:8-9에서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엡2:10에서 바울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선한 일-선행)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그는 다시 오늘의 본문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심이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선행가운데 살아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이런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당위의식으로 말미암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선행은 믿지 않는자도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 선전하는 수준의 선행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율법주의적 선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필립 얀씨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명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의 여인 제니의 사랑에 대한 반응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큐 75의 우직한 저능아 검프-아무것도 의미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받은-그가 어느 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달립니다. 그에게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간증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그 은혜,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저앉을 때마다 우리는 조건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준 그분의 음성-그리고 그의 사랑을 겅험한 동료들의 소리를 듣고 일어납니다. “포레스트-, , (달려, 달려, 달려야 해)”

 

3. 미래의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다면 세상이 우리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처받고 좌절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어할수록 더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기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해서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12절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12절 하반부에는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라고 가르칩니다.

 

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한 인격의 표상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이시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선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을 단순히 죄를 피하고 안 짓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1:27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미숀을 주께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도 지칠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13절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의 못다 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못다 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그분을 온전히 닮은자로 그분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이십니다.

 

제가 비전의 신을 신고 걷는다에서 인용한 마더 테레사어쨋거나(Anyway)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인용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용서하십시오/

 

당신의 친절에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친절하십시오/

 

당신의 성공을 보고 주변에서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온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공하십시오./

 

당신의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속인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정직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에 걸쳐 성취해온 모든 것을 사람들이 하룻밤에 다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취 하십시오/

 

당신이 찾아 낸 행복과 평화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행복하십시오/

 

당신이 오늘 베푼 선함을 사람들이 내일은 다 잊는다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선을 베푸십시오/

 

당신이 가진 최선을 이 세상에 다 내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라 해도 어쨋거나 당신의 최선을 내어 주십시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을 에베소서 2:8-10과 비교했을 때 공통적인 강조점들이 무엇입니까?

2. 본문 12, 13, 1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각각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12:

·13:

·14:

3. 본문 14절에 의하면 성도의 선한 일의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4. 금번 여름 우리가 각자가 헌신하고 싶어하는 선한 일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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