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바자회에 내놓지 못하는 옷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3. 23. 16:25

바자회에 내놓지 못하는 옷|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23 |추천 0 |2016.03.20. 17:17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66 

3월의 말씀 산책

 

    나는 웬만한 옷은 다 바자회에 내 놓고 낡았거나 내 옷이라고 내놓기 어려운 옷은 아파트의 의류 수거함에 다 버린다. 그런데 내가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옷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 박사 가운이다. 이것은 누가 갖다 쓸 수도 없는데 또 내가 입을 기회도 없는 옷이다. 지난 번 대학의 총장 취임식에 내가 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혹 단상에 올라가는 사람은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 몰라 아내더러 찾아보라 했더니 옷은 늘 옷장에 걸려 있는데 모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여기저기를 뒤져 겨우 찾았다. 그런데 취임식에는 취임하는 총장과 이사장만 가운을 입기로 했다고 해서 용도폐기가 되었다.

    나는 공부를 해서 박사가 되는 것보다 박사 가운에 탐났었다. 대학 졸업식 때는 국기를 든 기수와 총장을 비롯한 대학 이사들 그리고 교수들이 모두 가운을 입고 의전 담당자의 지시를 따라 입장하고 그 뒤로 졸업생들이 줄지어 따르는데 참석한 학부형들이 부러운 듯이 쳐다보는 모습이 대학이 상아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흐뭇함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교수들 사이에 서서 박사 가운을 입고 입장하고 싶었다. 내가 대학에 전임으로 있을 때에는 구제박사(舊制博士)라는 것이 있었다. 1965년까지도 우리나라에는 국내외에서 받은 박사학위 소지자가 1,000여 명 안팎이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대학만 나와서 교수로 있는 분도 있었고 대부분이 석사 학위를 가진 분이었다. 그래선지 국가에서는 교직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논문만 내고 박사학위를 받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구제박사 제도라 한다. 이것은 19752월까지였다. 그때까지 서둘러 6,000여 명의 박사가 무더기로 배출 되었다. 이제는 박사가 아닌 교수는 대학에서 퇴출 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1976년에 미국에 공부를 하러 떠났는데 어쩌면 박사 가운을 못 입고 입장식에 따라다니는 것이 부끄러워 그렇게 떠날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지고 있는 가운은 1982년 학위를 받을 때 박사 예복을 미리 주문할 사람은 신청하라고 해서 북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졸업 한 달 전에 맞춰 입었던 것인데 졸업식 때를 빼고는 별로 입은 것 같지 않다. 귀국하고 보니 박사가 흔했고 또 서로 박사라고 불리는 것을 꺼려하고 자랑스럽게 입던 가운도 유치하다는 듯 안 입거나 졸업식에 불참하는 교수가 많아졌다. 박사가 되고 보니 박사가 필요 없었다.

나는 박사 논문만을 남기고 시골 대학에 취직해 있었는데 그곳에서 덩치가 큰 학생들이 닥터, 닥터하고 깍듯이 나를 존경해서 나는 아직 박사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 것을 참고 지냈다. 일 년이 지나 학생 앨범이 나오자 내가 박사가 아닌 것이 밝혀졌다. 다음 해 나는 학위를 받고 계속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때는 또 학생들이 다정한 티를 내며 내 곁으로 다가와 무거운 팔을 어깨에 턱 올리며 헤이 미스터 오.’ 해서 나는 미스터가 아니라 닥터야!’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또 참았다. 그때도 박사가 되었는데 박사가 필요 없었다.

계속 입어보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가운이 그래도 나는 감사하다. 한국의 대학 생활 보조도 끊어지고 너무 어려워서 학위 논문을 남겨 두고는 20여 군데 전임 강사 원서를 냈는데 한 곳에서도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할 무렵에 브라운우드 대학(Brownwood University)의 부총장이 면담을 하자는 전화를 해 왔다. 그 대학에 전임강사로 오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지도 교수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는데 나를 써 주겠다는 것이 너무 의외였다. 나는 박사 학위도 가지지 않았으며 영주권도 없는 외국인이었다. 그런데도 부총장인 케이디(Cady)라는 분은 나를 초빙하였다. 뒤 늦게 알았지만 그 자리는 미국인이며 학위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결정된 자리였는데 그가 학기 초에 임박해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새로 모집 공고를 내기가 어려워 받아 놓은 원서 가운데 내 원서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 대학은 나에게 2년을 여유롭게 살게 했으며, 영주권을 만들어 주어 내 애들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었다. 큰애는 보스턴 대학(BU)을 나와 지금 퍼킨엘머(PerkinElmer)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둘째는 하버드를 졸업하여 플로리다 주립대(UF)에 교수로, 또 막내는 휴렛 팩커드(HP)사에 근무하게 해 주고 있다.

이 가운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얽힌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는 옷이다. 용도폐기가 되어 죽을 때 까지 간직한다고 해도 나는 그 가운을 사랑하며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