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닮기 1/배척 (막 6:1-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 6:1-6)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예수닮기입니다.
불교는 석사 닮기입니다. 유교는 공자 닮기입니다. 회교는 마호멧 닮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닮는다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가요?
예수님의 특징은 배척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너무나 지혜로운 말씀에 그들은 칭찬하고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배척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배척은 칭찬의 반대말입니다.
칭찬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닯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받기를 좋아 하는 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을 받으면 좋고, 욕을 당하면 기분이 안 좋아 합니다. 칭찬받는 것은 그리 좋은 것만 아니라는 논문을 쓴 심리학 교수가 칭찬학을 발표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논문을 잘 썼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는 기분 좋아 하였습니다.
칭찬받으면 누구나 좋아 합니다.
그러나 칭찬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설교후 사람들이 설교 잘 하였다고 칭찬하면 입가에는 미소를 띠우지만 속으로는 외쳤습니다.
“나를 넘어 뜨리는 사탄아! 물러가라.”
사실은 칭찬은 좋은 것입니다.
칭찬에 대하여 극구 찬양하는 이가 있습니다.
켄 블랜차드가 쓴 책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최근 베스트 셀러입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재미있습니다. 킹슬리라는 사람이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일에서 벗어나 플로리다 해상 동물원에서 돌고래 쑈를 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돌고래를 조련사는 자유 자재로 재주를 부리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동물을 저렇게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돌고래는 조련사의 신호를 따라서 꼬리를 흔들기도 하고 링안으로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공을 농구선수처럼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익살스럽게 꼬리로 물을 튀겨 관중들에게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한참 보다 보니 사람들이 돌고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돌고래가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돌고래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돌고래가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돌고래를 보면서 킹슬리는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부하직원 몇 사람도 훈련시키지 못 하였다. 아니 직원은 그만 두고라도 내 자식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자식 하나 내 훈련시키지 못 하였는 데 저 조련사는 어떻게 하여 말도 못 하는 큰 돌고래를 저토록 멋지게 훈련시켰을 가?”
참으로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돌고래 쑈가 끝나자 조련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조련사를 찾아 갔다는 자체가 나와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돌고래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훈련시킨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두 가지 비결이 있었습니다. 신뢰와 칭찬입니다.
돌고래는 신뢰가 형성되기까지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비결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없으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살 때도 그 물건에 대한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상관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상관의 신임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려면 하나님이 신뢰하게 하여야 합니다.
돌고래는 조련사가 자기에게 시키는 일을 하면 먹을 주고 쓰다듬어 준다는 신뢰가 이루어질 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칭찬이었습니다. 잘 하고 나면 격려하고 칭찬하여 주었습니다. 돌고래도 자기를 사랑하여 주고 칭찬하여 주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킹스리는 돌고래 조련사로부터 칭찬의 기술을 배웠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 칭찬할 일이 생겼을 때 즉시 칭찬하라.
2. 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3. 가능한한 공개적으로 하라.
4.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하라.
5.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칭찬하라.
6. 거짓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칭찬하라.
7. 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칭찬할 점이 보인다. 칭찬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칭찬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8.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더욱 칭찬하라.
9. 잘못된 일이 생기면 꾸짖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 일을 유도하라.
10. 가끔씩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라.
칭찬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칭찬받기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닮는 것이 아닙니다. 배척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배척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가요? 왜 예수님은 배척을 받으셨을 가요?
1. 오늘 좋은 것이 아니라 내일 좋은 것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를 성경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의 지혜가 너무나 탁월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내일을 대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각자의 시계는 5분 빠르기에 사람들은 선각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우선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을 즐기기 위하여 내일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깊은 사람, 예수를 닮으려는 사람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합니다. 예수님은 오늘을 포기하고 내일을 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돈이 있을 때 내 돈 내가 쓰며 이 땅에서 살면 즐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돈 쓰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좋게 살지 말고 내일 좋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200만명이 모두 고통스러운 종살이할 때 궁중에서 살았습니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차이가 아니라 최상과 최하의 차이였습니다. 궁중에 가만히 살면 평생 호화호식할 수 있고 인생을 멋지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에 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3-26)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포기한 모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소에 바울의 집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 보다도 큰 집입니다. 부잣집이었습니다. 가브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최고 학부를 공부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똥입니다. 똥을 버리고 아까워 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성지순례 전날 300만원을 잃어 버리고 얼마나 아까운지 밤잠을 자지 못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18-22)
중국 송나라 때에 지방의 한 벼슬아치가 보석 감정인을 찾아 왔습니다.
"이 옥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 감정해 주시오."
한참 동안 옥을 자세히 살펴보던 감정인이 말했습니다.
"이 옥은 세상에서 구하기 힘든 진귀한 보석입니다."
사실 그가 옥을 감정한 이유는 송나라 재상 '자한'에게 청탁을 할 때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그 옥을 가지고 '자한'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구하기 힘든 진귀한 옥입니다. 제가 보배로 여기며 지금까지 보관해 왔지만, 이제는 자한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그러나 평소 청렴하고 고결한 인품을 지녔던 '자한'은 이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옥을 보배로 여기고 있으나, 나는 탐내지 않는 마음을 귀한 보배로 여기고 있소.
내가 이 옥을 받으면 우리 둘 다 귀한 보배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소? 그러니 도로 가지고 가시오."
오늘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내일 좋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좋은 것을 전하였기에 오늘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2. 안 보이는 것을 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를 성경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유대인들은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아들입니다. 평범한 우리 옆에 사는 주민입니다. 그런데 지혜와 권능이 탁월하였습니다. 도저히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줄 수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을 지배하고 있는 데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안 보이는 것은 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물도 안 마시고 살면 한 달도 못 살고 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산소를 안 마시면 5분내에 죽습니다. 보이는 물보다 안 보이는 산소가 더 중요합니다. 바람은 안 보이지만 있습니다. 사랑도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천사나 하나님 모두 안 보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 보이는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하실 때 첫 말씀이 하늘나라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1)
안 보이는 천국을 전파하시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전쟁 끝나고 나면 두 단어만 남습니다.
“이겼다.” “졌다.”
죽고 나면 두 곳만 남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중간은 없습니다.
지난 주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박 명자 권사님은 의식이 뚜렷할 때 침상에 둘러 서 있는 우리와 인상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천사가 왔어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 가실 때 말과 똑같았습니다.
“천국이 보여요. 빨리 천국 가고 싶어요. 갈보리 사랑 많이 받았어요.”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눈을 쳐다 보면서 말했습니다.
“천국에 먼저 가서 있어요. 우리도 뒤따라 갈께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천국, 영원한 생명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밥상에 닭고기가 올라 왔습니다. 잡수려던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이 닭고기 어디에서 났니?”
아들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것은 묻지 마시고 잡수시기만 하세요.”
이런 때 탈무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아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두 사람이 같이 죽었습니다. 같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인지 몰랐습니다. 마침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어느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인가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앞을 보기 전에 당신들이 걸어온 뒷 길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자기 뒤를 보니 평탄한 길이었습니다. 좋고 즐거운 길이었습니다. 기분좋게 앞을 보았습니다. 쓰레기와 가시로 가득한 길이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이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가야 할 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이 뒤를 보았습니다. 지나온 과거는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땀을 흘리며 수고한 흔적이 역역하였습니다. 앞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흘린 땀이 거름이 되어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흘린 눈물위에 예쁜 꽃들이 만발하였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 길이 당신이 가야할 길입니다. 천국가는 길입니다.”
보이는 것만 보는 이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을 배척하는 이는 천국이 그를 배척할 것입니다.
3. 너무나 높은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지킬 수 없는 너무나 높은 수준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실은 높은 수준의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48)
이 정도의 수준은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말하지 못 하였던 수준입니다. 그런 높은 수준의 진리를 말하니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4-27)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높은 수준의 윤리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주목하여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느 여인의 고백입니다.
남편이 지글지글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 자녀 둘은 공부도 못 하고 학교에서 요주의 학생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가정은 경제적으로 찢어질 듯이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는 아픈 데 속까지 썩입니다. 들들 볶아 댑니다. 어디를 보아도 시원한 곳이 없습니다. 가출을 생각하여 봅니다. 자살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의자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습니다. 잠에 들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천국을 향하여 걷고 있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연약한 여자가 너무나 무서운 십자가를 메고 갑니다. 잘라 주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냐. 내 사랑하는 딸아! 네가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는 구나! 잘라 주지.”
그리고 십자가를 잘라 주셨습니다.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나 가다 보니 지쳐서 또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또 부탁하였습니다. 몇 번을 그랬습니다. 조그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데 가벼워서 좋았습니다.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건널 수가 없어서 앉아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저 먼 곳에서부터 오는 데 무거운 십자가를 자르지 않고 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지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속으로 말했습니다.
“미련하다. 주님에게 잘라 달라고 하면 잘라 주시는 데..........”
그 사람이 요단강 앞으로 오더니 요단강에 십자가를 놓았습니다. 다리가 되었습니다. 무사히 건넜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십자가를 메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외쳤습니다.
“주님! 나는 십자가를 잘랐기에 건널 수 없군요.”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을 보아라. 어디 십자가를 자르고 나를 따르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였지 않니?”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주님! 가정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로 알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더 열심히 전도하고 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기에 십자가 지기 싫은 사람들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증거입니다. 배척을 받지 않으면 세상과 타협하고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칭찬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의 길,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척뒤에는 큰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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