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고 서애하 사모님께 바치는 조사(1996-10-21) / 오승재 장로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8. 18. 14:03

弔辭

 

고 서애하 사모님께 삼가 조사를 바칩니다.

인생의 수명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더니 하나님께서 고인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이재화 목사님과 평생을 해로하게 하시고 5 1녀의 어머니가 되게 하며 80수를 하게 하시더니 이제 때가 되어 부르시니 인생의 한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귀와 영광은 세상을 떠날 때 가져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인께서 살기 좋아진 이 세상에서 좀 더 편히 사셨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꽃다운 스물 한 살의 나이에 목사님을 만나 60년을 동거하시면서 제가 뵙던 기간 동안은 고생뿐이셨습니다. 아들들이 대학에 가겠다고 집을 떠나 잉크가 어는 허술한 자취방에서 살고 있어도 안타까워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가보처럼 남겨진 재봉틀을 아무리 돌렸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서울까지 큰 보따리로 된 이불 솜을 가지고 가서 팔았어도 그것이 어찌 등록금이 되었겠습니까? 그저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고인께서는 자식은 어버이가 기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길러 주신다는 것을 신앙을 통해 체험하고 감사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살림도 안 되는 사례금으로 다섯 아들들을 어떻게 다 서울 대학을 졸업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고인의 믿음 위에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고인께서는 목사님을 내조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외에는 세상의 낙과 사치를 모르고 지내신 분이었습니다. 고운 옷을 입기를 원하며, 패물을 좋아하고, 백화점 나들이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청교도적으로 청렴하시고 엄하기만 하신 목사님을 내조하고 가난 속에 산다는 것은 주님 의지하는 신앙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또 목회를 하면서 세상적인 교인들 때문에 당한 수모와 상처는 또 얼마나 컸는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주거환경의 낙후성은 어떤 여인이고 받아 드릴 수 없는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인은 불평 없이 십삼 년이 넘는 세월을 하천 가의 도룡교회 움막 같은 주택에서 기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훌륭한 대덕 교회를 건축하셨으며 그 뒤로도 모든 교인들이 엑스포 때문에 땅을 팔고 떠나갈 때에도 몇 명 안 되는 학생 교인들을 붙들고 지금 이 교회가 선 땅을 불하 받기 위해 끝까지 연탄을 때며 그 후진 집에서 교회를 지키셨습니다. 불하를 해 받고 한빛아파트로 옮긴 것은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허리가 굽고 자유롭게 잘 거동을 못하실 때였습니다. 자녀들이 모시겠다는 편한 생활을 거부하신 것은 한빛교회를 세우겠다는 목사님의 평생을 건 사명감 때문이었으며 목사님을 떠난 삶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땅 값과 건축비를 위해 천 원을 두고, 또 만원을 두고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신 결과는 지금 한빛교회라는 이 위대한 기적을 또 낳았습니다.

고인께서는 사랑과 정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찾아 뵐 때마다 배가 차서 들어가지 않을 만큼 주셔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습니다. 또 무엇이 있으면 싸서 주고 싶어 못 견디어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정 많고 사랑 많으신 분이 막내아들이 유신 반대 대모 때문에 잡혀가 옥바라지 할 때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인을 무척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주기적으로 피를 맑게 하는 투석으로 거의 주사 바늘을 찌를 수 없을 만큼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수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은 그 아들이 성공회 대학에 취직한 것을 보게 하시고, 둘째가 외교관 생활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하시고, 교회가 든든히 선 것을 보게 하시고, 말없이 늘 웃으며 보살피는 목사님의 뜨거운 사랑을 순간순간 확인케 하시며,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청명한 가을날을 골라 편히 눈감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소천 되시기 6주일쯤 전에 오정교회의 강 권사님과 함께 찾아 뵌 일이 있습니다. 그날도 과분하게 따뜻한 사랑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떠날 때는 몸이 불편하신 데도 꼭 나오시겠다고 휠체어를 타고 현관까지 나오셨는데 우리가 차를 타자 미쳐 차까지 걸어 나오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손을 흔드시었습니다. 그 때 흔들어 주시던 손짓이 살아남은 저희들에게 마지막 주신 인사였습니다. 편히 살고 잘 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지만 자손들이 잘되는 일에는 욕심이 많으셨던 고인께서 이 세상에서 걱정하고 당부하실 것이 많아 자손들에게는 차마 마지막 하직하는 순간에도 손을 흔들지 못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고 서애하 사모님 !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과 주를 위해 받은 핍박과 끊지 못한 정들을 다 끊어 버리시고 하나님 품에 고이 잠드소서. 눈물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없고, 사망이나 곡하는 것도 없고, 해가 지지 않은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먼저 일어나 썩지 아니한 것으로 다시 살며,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사시어 부활된 몸으로 뵙기를 원합니다.

1996 10 21

 

평소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장로

오 승 재 올림

 

 

 

 

 

徐愛河 女士 略歷

 

1. 1916 12 2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서상준씨와 이귀 인씨의 5 삼녀 3녀로 태어나다.

1. 1933 18 영동군 용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다.

1. 1936 3 6 이재화 목사님과 결혼하다.

1. 1936 기업 전수학원을 졸업하다

1. 1937 청주 성경학원을 수료하다.

1. 1937 남편이 옥천 죽향교회(현재 동성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자 역자의 아내로서 헌신을 시작하여 평생 60 간을 목사의 내조자로 충성하다.

1. 1996 현재 슬하에 5 1녀를 두다.

장남 영웅: 한화 그룹이 운영하는 프라자 호텔 대표 이사

차남 영현: 외교관, 현재 외무부 기획심의관

삼남 영관: 의사, 이치과 의원

사남 영호: 인하대학교 교수

오남 영환: 성공회 대학 교수

사위 성하: 성모여고 교사 장녀 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