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카톡 공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8. 11. 17:52

카톡 공해|성경 말씀 묵상

은혜 | 조회 60 |추천 0 |2016.08.11. 06:57 http://cafe.daum.net/seungjaeoh/J75F/183 

8 월의  말씀 산책

 

    휴대전화를 쓰면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이 카톡이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카톡, 카톡하고 울리는데 안 켜 볼 수가 없다. 거의 대부분은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멍청한 노예나 바보를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카톡이야?”라고 처음에는 짜증이 나지만 계속 열어보고 있으면 그 내용에 세뇌되기 시작한다. 나는 노인이라 보수적인 노인들의 카톡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서 그렇게 유식한 말을 많이 듣는지 각종 가십들을 물고 온다, 자기들의 소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내온 내용들을 전달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었나 하는 일화들, 퍼 주기를 좋아하던 김대중 대통령이 얼마나 많은 돈을 차명계좌에 넣어 놓고 있는가 하는 일화들, 종북(從北)세력들의 음모들, 그런가하면 선교사들의 설교와 간증의 유튜브, 각종 암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가 하는 건강 소식들, 흘러간 영화 주제가의 유트브 등, 오락과 만화, 게임방의 초대 등에는 삭제나가기를 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친구에게서 온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미안해서 간단한 회신을 하면 카톡, 키톡하고 계속 보내온다.

    휴대전화는 문명의 이기이기는 하지만 쓸데없는데 정력을 낭비하고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기계임에 틀림없다. 요즘 젊은 애들이 길거리를 걸어가며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를 즐기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건 현대판 우민화(愚民化) 도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야 다스리기 쉬웠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 교육을 받는 것을 방해 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우리국민들의 문맹률은 90%였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열이 높아 문맹률은 1%라고 한다. 그러나 글을 쓸 줄 안다고 우민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의 뜻을 제대로 외치고 세상을 바로잡아보겠다는 꿈을 잃은 사람은 현대판 우민이다. 1970년대 TV멍청이 상자(idiot box)’라고 했다. TV에서 오락물이나 연속 방송극만 즐겨 보고 있으면 머리가 텅 빈 멍청이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TV는 우민화 장치였다. 5공화국 때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국민들을 살해한 범죄를 잊게 하기 위해 우민화 정책을 쓴 일이 있다. 볼거리 먹거리에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아시안게임, 프로 야구, 프로 축구, 프로 씨름, 농구 잔치 등 스포츠를 활성화 하고 1982년에는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문란한 행위를 눈 감아 주는 등 소위 3s(sports, sex, screen)정책을 펴기도 했다. 대학생들에게는 독서회나 토론회 등을 금지하고 되도록 야외에서 통기타치고 노는 것을 장려했다. 우리는 이렇게 우민화에 익숙해진 국민이다.

그런데 지금은 휴대전화로 우리가 우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책 읽기가 싫다. 생각하기가 싫다. 글쓰기가 싫다. 암산하고 기억하고 하는 것이 싫다. 일기를 쓰기 싫다.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가? 골치 아프게 읽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모른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된다. 필요한 것은 휴대폰에 사진을 찍어 저장해 두면 된다. 매월 스케줄도 플래너(planer)에 기억해 두면 알려 준다.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길이다. 이제는 3s 시대가 아니고 4s(sports, sex, screen, sns) 시대가 되었다. 휴대전화가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휴대전화가 아니고 나 자신이다. 막 잠이 들려는데 머리맡에 놓은 휴대전화에서 카톡, 카톡하고 소리가 나면 짜증이 나지만 휴대전화를 키고 내용을 살펴본다. 혹 여행을 하는 자녀들에게서 무슨 소식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가족들과는 그룹채팅을 하는데 미국에 세 군데나 흩어져 있는 애들과 소식을 전할 때는 아무래도 그룹채팅이 유익하다. 그들은 형제들의 가정에 무슨 애경사가 있는지 모르고 지낸다. 조카들의 생일이 언제인지, 입학식 졸업식은 언제인지 서로 모르기도 하고 또 바빠서 잘 잊고 지낼 때가 많다. 그래서 그들 가정을 초청해서 그룹채팅을 하면서 내가 어느 한 가정의 애경사를 올려놓고 일깨워 주면 서로 기뻐하고 걱정하며 기도도 하고 교제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휴대전화가 나를 바보를 만드는 현대판 바보상자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일까? 나는 휴대전화를 아예 없애거나 불요불급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쓰더라도 멀리 두어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이른다. 그런데도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꼭 잘 때는 그것을 내 베게 맡에 놔두고 잔다. 미국과 한국은 시차가 있어 한 밤중에 카톡, 카톡하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