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다시 일어 서십시오(눅7장11-17)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9. 10. 20:19

다시 일어 서십시오(711-17)


출 처이동원목사

 

 

우리 조선후기의 역사에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보는 입장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게 되는 매우 역설적인 지도자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가 걸출한 한 한 시대의 지도자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유교질서의 통제를 위해 한때 서원 철폐를 명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결과를 물었을 때 의외로 전국의 유생들이 조용하다고 보고하자 그는 갑자기 혀를 차면서 "정말 큰일이로군. 그러면 이땅의 청년들이 다 죽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는 일화를 남긴바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고 묻는 참모에게 "내 명령을 따르고 안 따르고 보다 청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정의라고 믿는바를 위해 움직일줄 아는 기개인데 아무도 반대함이 없다는 것은 이 땅의 청년들이 기개를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은 이 땅의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의 청년들의 죽음은 몇가지 현상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 자살율의 급속한 증가(경찰청 통계/1-36/그중 20명이 20-40), 둘째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고,

셋째는 청년들의 이민 선호율의 증가이며,

]넷째는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야말로 죽음의 징후인 것입니다.

죽은자는 더 이상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과연 이땅의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지를 묻지 않을수 없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죽어버린 한 청년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한 과부의 독자였다고 의사 누가는 기록합니다.

과부 여인의 외아들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이 외로운 과부어머니에게 이 외아들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죽어 나가던 상여행렬은 문자 그대로 절망의 행진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한 순간 이 절망의 행진이 멈추고 이 행진은 부활의 행진으로 바뀝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이 청년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무엇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신 것일까요?

이 시대 이 땅에 죽어있고 주저앉은 청년들을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서게 할수 있다면 도대체 그것은 예수의 무엇일까요?

 

1.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미움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형제를 미워함이 곧 살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크리스쳔 유머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답니다.

한 노인 할아버지가 혼자 손을 드시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아니 할어버지는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셨습니까?"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랍니다.

"아니 옛날에 많았는데 다들 죽었지" 이 유머의 레슨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 할아버지는 미움으로 이웃을 죽인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머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간과해버린 교훈이 하나 있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은 이웃을 죽일뿐 아니라 자신을 동시에 죽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유머는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움으로 자신과 이웃들을 파괴해 왔는지요?

미움은 독입니다.

미움의 독이 우리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경체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본문에 나타난 죽은 이 청년을 살려 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과부를 보시던 그 눈은 어떤 눈이셨습니까?

사랑의 눈, 긍휼의 눈이 아니었겠습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두 개의 화분에 같은 종류의 화초를 놓아두고 같은 조건에서 하나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주고, 또 하나에게는 미움의 눈길을 주면서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길을 받은 화초는 그렇지 않은 화초보다 시간적으로 네배나 더 긴 시간동안 생명을 지속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사랑의 힘이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이 힘은 어떠할까요?

무엇이 오늘날 죽어가는 이 땅의 청년들을 다시 살려 낼까요?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가족, 자녀, 이웃들을 살려 낼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그 사랑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유일한 구원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큰일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가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라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바로 해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알게 해야 합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에 미국 청년들은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죽어가던 마약 세대 히피 세대들이었는데 갑자기 그들 가운데 누구도 시키지 않은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자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삶의 허무를 노래하던 기타반주에 새 가사를 붙여 거리에서 비치에서 일어나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그 신선함 전하고 싶으리

(Pass it on--it only takes a spark to get a fire going)

 

이것이 당시 미국을 깨운 Jesus-movement 큰 불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저는 동일한 주님의 사랑이 이땅의 청년들을 살릴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그 작은 불꽃을 경험하면 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결정적으로 이 청년이 일어난 것은 주님이 이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살렸습니까?

말씀이었습니다.

단순한 설교나 도덕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처방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살린 것입니다.

말씀이 처방이고 말씀이 해답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도대체 말씀이 무엇이기에?라는 반문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다고 가르치십니다. 바로 이 말씀으로 또한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섭리하신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동일한 이 말씀으로 죄인인 인생을 새롭게 다시 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 5:25에서 이 말씀이 죽은자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아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장년이었던 나사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는 무덤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제는 죽은 청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리고 청년은 살아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으로 장년도 청년도 소녀도 일어났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도 육체의 부활이상의 사건이요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채 하나님없이 살던 영혼들에게 말씀이 들려오는 순간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새인생의 길을 걷는것-이것이 바로 영혼의 부활이요, 영혼의 소생이요, 영혼의 일어섬이 아니겠습니까?

 

영혼이 살면 육체가 삽니다.

문제는 직장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나려면 주님의 말씀이 들려와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임하도록 기도하시겠습니까?

 

3. 주님의 손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청년을 살려내는 일에 주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두 가지 절대로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문둥병자이고,

또 하나는 시체였습니다.

 

유대인 지도자인 랍비의 책임가운데 하나는 이 두가지를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의 랍비로서 이 두가지 규칙을 다 깨트리고 만지신 것입니다. 그는 문둥병자들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은자의 시체를, 관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자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고 일어섭니다.

죽은자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의 손길의 만지심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만지심의 기적이야 말로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만지심이기 때문입니다.(Love is a touch!)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린 순간부터 엄마와의 접촉을 통해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접촉이 결핍되면 인간의 정서적인 성장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됩니다.

 

카톨릭 사상 가장 선한 목자요 평화의 사도로 평가받는 요한 23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영화 "교황 요한23"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소개됩니다.

그가 한 고아원에 방문했을 때 훈련받은 대로 "교황이여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소리치는 아이들속에 전혀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차라리 그 눈에 적대감이 가득차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사실 아 아이는 모든 방법을 다해도 수녀 선생님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었던 말썽꾸러기 아이였습니다.

수녀들은 당황하고 있었지만 교황은 조용히 다가가서 아이를 두팔에 안고 오래 동안 꼭 껴안습니다.

처음에 다소 저항하는 듯 하다가 아이의 뺨에는 잠시후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한번도 본일이 없었던 밝은 미소가 그의 볼에 번집니다.

 

그러더니 아이는 교황을 바라보며 "교황님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 이 아이는 완전히 변했다고 합니다.

 

교황이 고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황의 손길을 통해 아 아이에게 다가선 예수님의 손길, 예수님의 터치가 이 아이의 상처를 치유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된 복음성가 가운데 "그가 나를 만지셨네(He touched me)"라는 곡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나를 만지셨네-그가 나를 만지셨네/

오 내 영혼에 넘쳐나는 이 기쁨/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것-난 그걸 아네/

그가 나를 만지셨고 나를 온전케 하시었네-----
무거운 짐으로 묶여있던 나/

죄책과 수치로 눌려있던 나/

그런데 예수의 손이 나를 만지셨네/

그리고 난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라네(--Then the hand of Jesus touched me. And now I am no longer the same)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의 손길이 바로 인생의 소망입니다.
구원입니다.

이 시대 죽어가는 우리의 청년들의 희망이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희망인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수 없을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잡아주십시오."라고. 그리고 말로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하지말고 당신의 자녀들을 힘껏 안아 주십시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당신이 이렇게 안아 달라고"

 

저는 작년 미국 코스타에 갔다가 토니 캄폴로라는 유명한 사회학 교수의 감동적인 간증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옆 좌석에 앉은 분에게 전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뜻 밖에 비행기 가운데 좌석에 앉게 되었는데 양쪽에 인상이 험악한 깡패처럼 보이는 두 사람사이에 끼어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냥 네 머리를 그 사람 어깨에 기대라"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떨며 머리를 옆 사람 어깨에 기대고 있었더니 자꾸 흘깃 흘깃 보더니 내릴 무렵 "당신 혹시 예수 믿느냐고 묻더래요"

그래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더니 당신이 기도하고 있었던 같아 보였다고 자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주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기적의 터치였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운데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이런 동일한 기적의 손길이 우리에게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 땅의 청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만지시면 우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일어 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 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에서 상을 당한 가정의 비참한 처지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2.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현들을 찾아보십시오.

3. 이 죽은 청년을 살린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습니까?

4. 오늘 나의 삶의 장에서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나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은 무엇인지요?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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