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예수닮기(11) 지키기(롬 7;15-25.10.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0. 25. 11:10

예수닮기(11) 지키기(롬 7;15-25.10.16)

 

 

지키기/7;15-25.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닮아 가고 있나요?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았는 말을 듣고 있나요?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말은 본질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나 아닌 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물은 육과 혼이 있습니다. 영은 없습니다. 돼지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닭들은 찬송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속에는 영이 있습니다.

달걀이 껍질, 흰 자위 그리고 노란자위 셋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속에도 나 아닌 나가 들어 있습니다. 혼속에도 나 아닌 나가 들어 있습니다. 영속에도 나 아닌 나가 들어 있습니다.

나 아닌 나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나 아닌 나에게 지면 안 됩니다.

나를 지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잘 키지신 분이십니다. 한번도 예수님 아닌 다른 것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육속에 <나 아닌 나>

우리의 육속에는 나아닌 나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생충입니다. 기생충은 나 아닌 나로서 나를 쓰러지게 하는 육의 적입니다. 기생충을 잡아야 합니다. 나 아닌 나를 내 속에 기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나 아닌 나가 있습니다.

암 세포입니다.

내가 사는 쾌적한 환경이 있습니다.

 

1. 좋은 공기속에 숨을 쉬어야 합니다.

2. 좋은 물을 마셔야 합니다.

3.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4. 적당한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5.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기분좋은 삶입니다.

6. 몸을 따뜻하게 하여 주어야 합니다.

7. 적당한 휴식을 취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암 세포가 살기 좋은 환경은 반대입니다.

1. 나쁜 공기속에 숨을 쉬며 살아 갑니다.

2. 좋은 물을 마시지 못 합니다.

3.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삽니다. , 마약, 담배등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입니다.

4.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고 삽니다.

5. 스트레스를 받고 항상 기분나쁘게 삽니다.

6. 몸을 차게 하여 줍니다.

7. 적당한 휴식을 취하지 못 하고 과로합니다. 그러면 내 몸속에 나 아닌 나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나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병이고 죽음입니다.

내가 잘못하여 암을 만들고, 의사에게 고쳐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내 육체속에 나아닌 내가 존재하지 못 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프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한 구절도 없습니다. 예수님 육체 안에는 진정한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은 육체속에 나아닌 내가 존재하지 못 하게 하여야 합니다.

몸 관리를 잘 하여야 합니다.

몸 관리를 잘 하는 것은 영혼 관리를 잘 하는 것입니다. 몸과 정신은 하나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정신은 곧 몸으로 연결됩니다.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맛있는 것을 보고 정신이 먹고 싶어지면 육체는 침을 내보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육체는 금방 엔돌핀, 다이돌핀을 분출합니다. 분노를 품으면 금방 시안이라는 독이 몸에 나옵니다.

그렇게 정신 관리를 잘 하면 육속에 들어있는 나아닌 나가 일어나지 못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입니다.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혼속에 <나 아닌 나>

자동차를 사게 되면 기본적으로 핸들이 있고, 바퀴가 있고, 의자가 있는 것같이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양심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칸트도 말했습니다.

 

하늘에는 반짝이 별이 있고 마음에는 빛나는 양심이 있다.”

 

그 양심대로만 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양심에 어긋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양심대로만 사람이 산다는 것도 바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은 표준이고 양심은 기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는 심방하다가 남의 차를 약간 스쳤습니다. 도망가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목사냐?”

그래서 신고하였습니다. 경비가 말했습니다.

목사님이라 다르네요. 내가 이 곳에서 경비 7년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신고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나는 전화 번호를 적어 주면서 고치고 연락하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지나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한 달 후에 경비를 만나서 왜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경비가 껄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 그 날 기분 좋아서 안 가르쳐 주었지요.”

양심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양심 구원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양심대로 산다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들어 나는 것일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돌아 올 때였습니다. 한 친구는 소니 캠코더를 샀습니다. 200만원입니다. 나는 빔프로잭트를 샀습니다. 아무 것이나 올려 놓으면 비쳐 지는 기계인데 400만원이었습니다. 둘 다 관세를 물건값만큼 내야 합니다. 그 친구는 가방에 넣고 거냥 나왔습니다. 나는 신고하였습니다. 세관원이 물었습니다.

이 것 팔 것 아니지요?”

물론이지요. 사용하려고 샀습니다.”
팔 것 아니면 중거품 산 것으로 하여서 세금을 계산하여 드리겠습니다.”

중거품 아닌 데요.”
어제 샀어도 오늘은 중거품이예요.”

그리고 10만원 세금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왔더니 몰래 캠코더를 숨겨가지고 나와서 나를 기다리면 친구가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안 걸렸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일가요? 정말 양심적일가요? 양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가요?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9:1)

 

양심이 양심적이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알아야 합니다. 양심에는 선한 양심, 바른 양심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믿지 못 할 세 가지 양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약해진 양심

양심이 건강하지 못 합니다. 약합니다. 양심이 진정한 양심을 이기지 못 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 졌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렇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한가하게 거닐다가 멀리에 한 여인이 발가벗고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밧세바였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지금 전쟁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양심은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데려다가 간음을 하였습니다. 한번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반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두 양심에 거스리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양심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가요? 다윗은 양심이 약하여졌습니다. 충신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양심대로 살면 죄하나도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약하여졌을 때가 문제입니다. 양심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했습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2)

 

2. 화인맞은 양심

화인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양심을 불인두로 지졌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도저히 양심대로 살지를 못 합니다. 스타린은 집권하자 말자 제일 먼저 자기 부끄러움을 알고 있는 친구 친척들을 한 명 한 명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과거를 노출시키기 싫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친한 친구를 다 죽이면서도 양심이 마비되어 가책을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양심은 전적으로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거지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신사가 지갑을 열었습니다. 7만원이 있었습니다. 1만원은 쓸 곳이 있기에 남기고 6만원을 주었습니다. 거지는 6만원을 받고 그 신사를 따라 가다가 1만원을 빼앗으려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양심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 더러운 양심

깨끗한 양심이 있고 더러운 양심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1:15)

 

양심이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달려졌습니다. 기준이 다르면 행동도 다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히틀러가 유대인들 600만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학살입니다. 히틀러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독일을 사랑합니다. 독일을 좀 먹는 유대인들은 다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독일사람들도 히틀러가 민족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을 좋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했습니다.

히틀러의 가장 큰 실수는 유대인들을 다 죽이지 못 한 것이다.”

그 때 히틀러를 죽이려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목사가 바로 본 회퍼 목사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미친 운전수가 자동차를 미친 듯이 몰고 가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목사가 할 일은 미친 사람이 죽인 사람을 장례치루어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동차에 올라가 미친 운전수가 사람을 치어 죽이지 못 하도록 끌어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히틀러 암살에 동조하였습니다. 결국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더러워진 양심에 대항하는 깨끗한 양심이었습니다.

 

식인종들에게 물어 봅니다.

당신들은 왜 사람을 먹습니까?”

식인종들을 대답합니다.

우리는 동족은 먹지 않습니다.”
동족만 안 먹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바른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나 속에는 나 아닌 나가 들어 있어서 나를 이기려고 합니다. 육속에도 나 아닌 나인 기생충과 암 세포가 들어 있어서 나를 이기려고 합니다.

혼속에도 나 아닌 나 잘못된 양심이 들어 있어서 나를 이기려고 합니다. 바른 양심을 지키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바른 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은 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영속에 <나 아닌 나>

우리 영속에도 <나 아닌 나>가 들어와 나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악입니다.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선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 후 우리의 영속에는 악이 들어 와 선을 추방하려 하고 있습니다. 나 아닌 나인 악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천사처럼 선할 수도 있고, 사탄처럼 악할 수도 있는 중간자라고 파스칼은 간파하였습니다. 바울같이 믿음을 지키고 산 사람도 역사상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런 고민을 솔직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2)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15-25)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선악 사이에서 고민하신 적이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켜려고 생명을 건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이 세계적으로 여기 저기에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눈물 어린 곳은 역시 로마에 있는 카타콤베입니다. 1세기에서 4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을 때 땅속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네로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16세기 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믿음의 영을 지키기 위하여 약 400년 동안 땅속에서 산 이들의 땅굴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굴을 조사하여 보고 모두가 경악하였습니다.

카타콤베의 총 길이가 800km였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의 거의 두배였습니다. 지금도 개발하고 있는 데 지하 묘지만 45개였습니다. 발견된 시체로 추측하여 본 결과 175만에서 400만명이 살았습니다. 땅속에서 살 수 있는 인원이 400만명이었습니다.

지하 6m를 파고 들어가서 수평으로 팝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면 또 6m 지하로 파고 내려 갑니다. 그리고 수평으로 파고 들어갔습니다. 교차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총 4층이었습니다.

영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카타콤베에서 태어나 카타콤베에서 죽은 사람들이 400여년 계속되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성만찬에 피를 마신다고 사람을 죽인 피라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한다고 방화범이라고 취급하였습니다.

황제숭배를 거절한다고 반역자로 몰았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안 지킨다고 율법 파괴자로 괴롭혔습니다.

 

붙잡히면 죽이는 방법도 가장 잔인하였습니다.

온 몸에 초를 발라서 정원을 밝히는 촛불로 사용하였습니다.

야생 동물 가죽으로 씌워서 동물처럼 보이게 하여 맹수들이 잡아 먹게 하였습니다.

바늘을 수백개 뭉쳐서 죽을 때까지 계속 찔렀습니다.

쇠를 녹여 시뻘건 쇳물을 입안에 부었습니다.

쇠접시를 시뻘겧게 달군 후 가장 민감한 곳에 붙였습니다.

눈을 뺐습니다.

사지를 네 말에 연결하여 4 방향으로 말이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어 죽였습니다.

고통을 길게 하려고 손발 끝을 불태우며 몸에는 찬 물을 계속 부었습니다.

이런 속에서도 영을 지킨 순교자들이 수 억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영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 수를 합하면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평안한 시대에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는다는 말은 내 영안에 <나 아닌 나>의 유혹을 받으면 안 됩니다. 사탄이 틈타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 와서 유혹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을 공격하였던 마귀

에덴동산에서부터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였습니다. 에덴의 안식과 부요를 빼앗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죽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죽게 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속에 있는 <나 아닌 나> 사탄의 공격에 넘어졌습니다.

 

욥을 공격하였던 마귀

욥의 가정은 참으로 행복하였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어느 날 마귀가 와서 안식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부자였던 욥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더니 자녀 10명의 생명도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그러나 욥은 <나 아닌 나>에게 승리하였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유다를 공격하였던 마귀

예수님의 제자 유다를 마귀가 공격하였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13;2)

마귀가 유다의 마음을 공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은 30냥에 팔아 버렸습니다. 제자들 사이의 안식이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돈을 맡았던 직분과 돈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유다에게 은 30냥을 주는 것같았지만 마침내 자살하여 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유다에게서 안식과 부요와 생명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영을 지키지 못 하였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그러나 마귀도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오늘도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안식과 부요와 생명을 빼앗으려고 공격의 공격을 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나지키기

예수님은 예수님을 지킨 분입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은 육속에 들어있는 <나 아닌 나>, 혼속에 들어 있는 <나 아닌 나> 그리고 영속에 들어 있는 <나 아닌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를 다 지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