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골 3:22-23)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0. 25. 11:28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골 3:22-23

 

                                                                                                 출 처| 이동원목사

 

 

1937년에 만들어진 월트 디즈니의 만화 영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는 전 세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은 아마도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이 스토리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 사이의 우정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공주와 왕자, 혹은 공주와 난장이의 사랑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1930년대 초의 세계 경제 대 공황이후 일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던 대중들을 대상으로 노동의 신성함을 설득하고 계몽하기 위한 숨은 의도야 말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모 왕비의 위협을 피해 숲속 난장이들의 오두막에 도착한 공주는 자신의 공주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깨끗이 쓸고 열심히 정돈하며 일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공주의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일하며 휘파람을 불어요. /그럼 모두 즐겁게 정돈을 할 수 있지요. /다 함께 흥겨운 가락을 중얼대요. /발걸음을 맞출 노래가 있다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방을 청소하면서 빗자루가 당신이 사랑하는 어떤 이라고 상상해 봐요./ 그럼 가락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여기서 백설 공주의 아름다움은 힘든 일은 절대로 안 하고 입으로만 명령하는 이미지(백-만인이 설-설기는 공-포의 주-둥아리)가 아니라 땀 흘려 일하는 이미지(백-만인의 설-거지 분량도 공-포 없이 감당하는 주-부다운 주부)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상관없이 열심히 그리고 즐겁고 신나게 일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노동의 원리 혹은 직장 생활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는 주일의 교회가 아닌 월요일에서 금요일(혹은 토요일)까지의 삶의 일터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주일은 일터의 승리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일 예배의 장에 나아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을 경험했다는 사실의 결과가 월요일의 가정생활, 월요일의 직장생활의 변화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일터에서 진정한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모든 일의 영역을 주의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의 일’하면 무엇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나요?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일, 성경 공부하는 일, 봉사하는 일, 전도하는 일, 선교하는 일을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직장에서 맡겨진 직무들과 씨름하며 이것이 주의 일이라고 얼마나 생각해 보셨는지요? 전업주부들인 자매님들은 가정에서 아이들과 씨름하고 가사를 돌보면서 이것이 주의 일이라고 정말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일들은 거룩한 일, 그리고 일상생활과 관련된 일들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르쳐 이원론적인 사고라고 말합니다. 흔히 한국 교회의 최대의 과제는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의 극복에 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도 오늘 날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의 전도와 선교에는 열중하면서도 일상의 삶의 장에서 즉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사업의 장에서 불신자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 없고 이웃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23절과 24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우선 우리가 열중해야 할 보다 중요한 일보다 거룩한 일이 따로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23절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24절은 우리가 이런 일로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일상생활의 장이 주님 섬김의 장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골로새서라는 바울 서신의 한 대목인데 골로새서의 주제가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주인이시라면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주가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실 때만 주여! 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빨래하다가 주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도 주여! 하셔야 하고 직장에서 지혜가 필요할 때도 주여! 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정 그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아닌 주님을 의식하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일을 망치는 경우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일을 맡기고 감독하는 주인 혹은 보스를 지나치게 의식할 때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로만 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여기 눈가림이란 말이 KJV 번역에 보면 ‘eye-service'라고 표현(not with eye-service)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떴다 하면 일하고 주인이 사라지면 손을 놓고 있는 모습 곧 주인의 눈치만 보면서 기회주의적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노동의 태도를 보통 노예근성 혹은 노예의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닌 보이지 않으시나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주인 의식은 우리가 어서나 무엇을 하든지 여기에도 계시고 나를 보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그분 앞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 개혁자들은 ‘Coram Deo'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Coram은 라틴어로 “--앞에서, 면전에서”라는 뜻이고, Deo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창17:1에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의식은 직장의 피고용인 뿐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골4:1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저는 이런 의식이야 말로 진정한 성경적 주인 의식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의 상전이신 주님을 의식하고 다만 그분 앞에서 일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의식을 갖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인간적 노예 의식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상황 모든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3.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터에 설 때마다 늘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해야만 고통스럽지 않게 즐겁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아주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방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3절이 대답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주께 하듯’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일을 내게 맡기셨다는 생각을 늘 갖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라면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같은 맥락의 교훈을 기록한 엡6:7에 보면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라고 했습니다.

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개역 한글 역은 ‘단 마음’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주께서 이 일을 맡기셨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비로소 노동은 괴로운 노동이 아닌 즐거운 노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타락 전과 타락 후의 노동관의 변화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함으로 비로소 노동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타락 전에도 아담에게는 에덴 동산을 경작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즐겁게 일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일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즐겁게 일해야 합니다. 노래하며 휘파람을 불며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때로는 불신자들이 맡겨진 일들을 신자인 우리보다 잘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실에 관한 한 우리는 불신자에게 지지 말아야 합니다. 3:22의 성실한 마음이란 희랍어에서 아플로테티(aploteti)(aploos,아프루스)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 말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 집중하는 마음 소위 single heart를 의미합니다. 주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서 전력을 다하여 최선을 다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실입니다. 장인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의 천정 벽화 ‘천지창조’를 오랜 시간을 들여 지나치게 세밀하게 그리는 모습을 보고 바티칸 관리였던 그의 친구가 여기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르치며 “저분이 보시고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실은 그리스도인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야 합니다.

 

 

4. 일의 보상을 주님께 기대하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우리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다가와 김빼기 작전을 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자네 그렇게 일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 있는 줄 아나?” 혹은 “그렇게 일한다고 월급이라도 올라 갈 줄 아는가?”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다시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상을 누가 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내 수고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때에 그분이 반드시 보상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보상의 기준은 성실과 의입니다. 얼마나 마음을 다하여 성실하게 그리고 정당하고 반듯하게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못하든 궁극적인 일의 평가를 주께 맡기고 주님의 상급주심을 믿고 일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 세상에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행한 바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달란트 비유의 교훈이 아닙니까?

 

저는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며 한때 동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고 괴로워하던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의 말이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여보, 하나님이 아셔요. 그리고 저도 알고요.” 회사의 창업자 오너요 사장되신 분이 회사의 손실의 원인을 그에게 책임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을 때 한마디만 하면 살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나 그의 바른 말로 동료가 죽을 것을 알고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렸 을때 그는 어느 날 사장님 책상위에 메모 한 장을 놓았다고 합니다. “사장님, 저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장님께서 저를 늘 신뢰해 주셨던 것처럼 금번의 일에도 더 이상의 책임추궁을 마시고 저를 믿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의 침묵을 저의 결백으로 믿어 주십시오. 저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결국 후일 일의 전모가 드러났고 그는 창업주의 신뢰속에 그 회사를 인수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사용하는 명함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God knows All)

 

저는 오늘의 말씀을 백설 공주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일의 모범을 보인 것은 비단 백설 공주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들인 난장이들은 오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장애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까지도 그들의 노동의 현장인 광산에서 그들의 장애를 극복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난장이들의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땅을 파는 것이 우리가 좋아하는 일이지요./금방 부자가 되는 비결이지요. /삽이나 곡괭이로 땅을 파요. 광산 에서 광산 에서--/무수한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곳에서 우리는 땅을 파요.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우리는 땅을 파요./ 보이는 건 모두 파지요. 우리는 다아아몬드를 많이 파지요. /수 천개 때로는 루비도---우리가 왜 보석을 파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땅을 파요. 헤이 호 헤이 호 /헤이 호 헤이 호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간다. 헤이 호 헤이 호”

 

아름다운 가사지만 한 가지 딱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보석을 파는지 모른다”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땅을 파는지 왜 보석을 캐고 있는지 알아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지요. 그리고 내 가족과 내 이웃을 위해서 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즐겁게 기대하는 맘으로 휘파람을 불며 일터로 나아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내일 월요일을 흥분된 맘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힘써 성실하게 일할 그 보람 있는 땀 흘림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지구촌 교회의 존재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가르쳐 평신도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셀 교회의 진정한 비전과 목표도 이런 일군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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