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
우리가 추석절과 같은 명절은 자연스럽게 가족을 생각하고 또 가족 들과 함께하는 그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계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 합니다. 추석 특집 KBS 프로 그램 가운데 이야기 좌담, 토크쇼 로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인의 멋 이라는 그런 좌담을 잠시 청취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출연한 러시아 사람 교수에게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 살고 한국 사람을 접촉하고 한국을 연구 하면서 한국인에게 단점과 장점이 있겠지만 한국인의 장점, 저력을 하나 들자면 뭐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이분이 서슴없이 상당히 유창한 한국말로 그것은 가족주의라고 생각을 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더 라구요.
가족주의 그것은 가족을 특별히 귀하게 생각하고 가족의 견고 한 유대감 이것이야말로 IMF나 한국이 역사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나온 저력이다. 저는 그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객관적인 외국인의 시각에 비친 그 견해로서 타당 하다는 것을 저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제 마음 속에는 한국인이 견고한 가족주의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가족관은 때때로 그 범주가 범위가 너무 좁다는 생각을 저는 했습니다.
이런 의식의 밑바탕에는 우리 식구가 아니니까, 내 사람이 아니니 까라는 의식이 지배합니다. 저는 한국이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가족관이, 가족의 개념이 좀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동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의식의 전환, 공동체를 커다란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집, 우리의 사회로 볼 수 있는 이런 안목, 그래서 이웃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이웃으로 이웃을 발견하려는 그런 노력이 어느때 보다도 아쉬운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마땅히 해야 할 줄로 알면서 하지 않은 죄를 말할 때는 'commission'에서 'c' 자를 빼고 'omission' 이라고 말합니다. 'sins if omission' 마땅히 해야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것 그것도 죄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줄 알면 서도 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한것 그것은 죄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그것이 어떤 죄일까요?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래서 시작되는 이야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 30절 이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22장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어떤 계명이 가장 커다란 계명입니까?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가장 큰 계명입니까? 네 마음을 다, 목슴을 다, 뜻을 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랬더니 다시 율법사가 반문하기를 내 이웃이 누굽니까? 이렇게 질문을 대답을 주고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대답은 뭐예요? 네 이웃이 누구냐? 네 이웃은 옆집에 사는 사람,우리 아파트 바로 앞동에 바로 앞에 사는 사람만이 내 이웃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람이 내 이웃이지만, 내 가족 내가 늘 어울리는 친지 친구들만이 내 이웃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 여리고 길처럼 내가 걸어가는 인생 길에 내가 발견하게 된 피흘려 쓰러져 누워 있는 사람, 나의 사랑을 요구하고 내 관심을 요구하고 또 내 주목을 요구하고 내 앞에 누워있는 사람, 그는 누구이든 내 이웃일 수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도움과 사랑을 요청하는 모든 사람을 내 이웃으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 그것 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에 대한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절대로 나누어 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 었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재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어디에서 제일 잘 나타났다구요? 십자가에서. 누구를 통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를 넘어서는 사랑. 조건이 없는 사랑. 초월적인 사랑. 정말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진정한 사랑이 시사된 자리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의 사랑의 교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계속 읽어 보시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마암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바 되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끝나지 않아요.
요한일서 4장의 정점이라고 그럴까요?
이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한다면 이제 마지막 결정적 사랑의 테스트는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 을 체험한 사람, 그리고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내 옆에 내 곁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제를 내가 사랑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할 수가 있느냐? 때로는 그 형제가 거북하고 좀 까다로운 형제라 할지라 도. 때로는 나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형제와 자매라고 할지라도 그를 사랑할 수가 있느냐? 여기 사랑의 테스트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 십니다. 큰 계명, 가장 중요한 계명, 이것을 큰 계명이라고 붙이신 이유는 그것은 주님의 가장 커다란 기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기대를 깨뜨리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마 땅히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를 깨뜨린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의 범죄인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그 것이 어떤 죄인가? 아닙니다. 그곳은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잘 알지않는냐 마씀하십니다.
제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제게 마지막 인생의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대답을 할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마다 자기 대답이 있어요. 그러나 설령 자기의 목적과 명분이 정당해 보이고 올바르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러나 지나가는 애매한 이 나그네를 희생자로 삼아서 그를 패고 그를 죽게 만들은 사건.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역사에서는 기독교 윤리를 말할 때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베이직, 그 기초적인 것으로 늘 이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강도야. 바로 내가 이 강도일 수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을 목적으로 인격으로 다루지 못하고 그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내 속에 있었다면 그래서 그를 피 흘리게 만들었다면 우리는 이 강도가 바로 우리 자신 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서야합니다. 다시 본문에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십시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뭐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마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저는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맞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 자리에 와 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더 나아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십니까? 예배의 목적이 뭐예요? 아마 좀 성경 공부를 하신 분들은 이렇게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예배와 사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w o r t h, worthy 그러면 가치 있다. 가치 있는, 가치. 왜 예배를 드려요? 하나님은 예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창조자이신 하나님, 구속자이신 하나님, 섭리자이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에게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고 예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우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드는 것 이예요. 그리고 그 예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 한다면 어떻게 그 사랑은 또 표현 되어야 할까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까지 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예배해서도 안되고 예배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웃을 존중 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웃을 존중하는 것, 왜 존중하십니까? 다시 한번 그것은 이웃에 대한 가치를 인식했을 때, 여러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때로는 그 사람들이 사람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저는 요즘 매스컴의 보도를 지켜 보면서 좀 안타가운 사건이 하나가 있어요. 소위 권희로사건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일본 사람에게 차별당한 그 심정적 동조 때문에 이 사람을 동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도 그것을 쑥스럽게 여겼는지 나는 영웅이 아니라는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매스컴은 계속 그를 영웅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사람을 죽인 것, 민족차별에 항의하기 위해서라는 고상한 명분이 있다고 해도 사람 을 죽인 그 행위 그 자체는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이 권희로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가 있느냐? 제가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나도 나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내가 주변의 사람들을 다소나마 이용하려는 그런 경향이 내 안에 있었고, 그리고 내 이웃들에게 상처를 준 사실이 있었더라면 나는 권희로를 향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나도 죄인이다. 이것이 이 사건 앞에서 내가 느끼는 솔직한 소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것 그것은 이웃을 도구화 시키는 죄악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왜 죄일까요? 그것은 성도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셋째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성도의 나라는 존재의 존재의 이유를 포기하는 혹은 존재의 이유를 거부하는 범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 하고자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존재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별로 안 중요한 이유가 아니예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어떻게요? 그 구체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예배라면 나는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을 표현하고 그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 한다 맞죠. 인간의 고상한 존재의 이유이고, 존재의 목적입니다. 이웃을 예배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웃을 존중히 여기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못지않게 소중한 우리의 존재의 목적 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를 귀히 여기는 것. 이것은 내가 인생에서 해야할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내가 여기 살아있는, 내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예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 내 존재 이유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이제 사장과 레위인이 나오면 그냥 제 눈이 걸려요. 내가 꼭 이제사장 같아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1 절, 32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그때 내 변명이 뭘까요? 이 제사장의 변명이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제사장은 지금 아마도 제사드리러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처럼 예배를 인도하러 가는 길, 지금 우리 교회 에 천명, 이천명이, 삼천명이, 오천 명이 내 설교를 듣기 위해서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머물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틀림없이 그 자리를 빗겨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생각을 바꾸었어요.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나하면 내가 설교 준비를 왜해? 이런 질문이 생겼어요. 내가 설교준비를 왜하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을 증거해서 어쩌자구요?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이 폭풍우 같은 세상에서 삶이 견고해 지고 그리고 인생의 전선에서 그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 섬기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전한다면 지금 이 사람과 앉아서 이 사람을 돕고 얘기를 들어주고 기도하는 일 이것은 바로 설교의 목적이 아니냐는 말이예요. 설교의 목적이 아니냔 말이예요. 그 생각을 하니까. 요즘은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토요일 날 어쩔 수 없이 불려나가는 경우에도 그러나 옛날처럼 끓지는 않아요. 아, 그러시겠군요. 이것도 설교 준비의 일환이다. 내가 이분을 섬길 수가, 세울 수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 mission, 내 소명이기 때문에. 나의 미션만이 아니예요. 여러분 모두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있는 목적.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호흡을 가지고 이 땅에 살게하는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여기서 피흘리고 상처받고 어려워하는 이웃과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것은 부르심이예요. 소명이예요. 이 것을 거부하는 것 이것은 나의 존재 이유를 거부하고 포기하는 죄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마지막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웃을 정말 좀 사랑해 볼 수가 있을까요? 저는 본문에서 두가지 대답을 찾습니다. 첫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발견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해보자라는 것입니다. 발견된 이웃을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랑해 봅시다. 말이 좀 어려워요? 발견된 이웃을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해 보자는 것 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합시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그 실천을 거부하는 내 속에서 올라오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변명이 있다면 그 변명이 어떤 변명입니까?
우리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니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도와야 할 사람이 한 두 사람이야? 또 내가 비록 한 사람을 돕는다고하자 그렇다고해서 세상이 달라집니까? 또 나는 내 코도 석자인데 내 인생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아픔과 좌절이 많은데 나는 다른 사람까지도 울 수 있는 에너지가 내 속에는 없 다. 이런 변명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이 세상은 점점 더 어 두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다시 읽어보세요. 본문의 33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뭔저 중요한 단어는 그를 보고, 그를 보고 하는 단어예요.
보고, 안 볼 수도 있었어요. 아니 안보는 척 할 수가 있었어요. 못 본척하고, 우리는 시선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지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은 말하기는 이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았습니다. 보았습니다. 피하지 말라는 거예요. 보라는 거예요. 이것이 발견된 이웃을 향해서 가져야 할 태도예요. 보고, 쳐다 보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34절에 가까이 가서, 이것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쟎아요? 할 수 있는 일이쟎아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이런 변명이 계속 우리를 붙들 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세상은 달라 지지 않을 것이다. 너 혼자 구세주 인척, 성자인 척 그렇게 해 봐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안 달라지는 지도 몰라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이런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늘 떠오르는 만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지금은 차라리 썰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늘 저에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어요.
어느날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에 일제히 지구상에서 한 순간에 와하고 한번 소리를 질러보자. 거대하게 폭발하는 지구의 함성은 금성이나 화성 다른 곳에 생물체가 있다면 우리의 함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도록 한번 소리를 쳐보자. 그래서 지구인들이 합의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 시각이 가까워집니다.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 일제히 와하고 소리를 지르려는 시각이었어요. 그때 꼭 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어요. 꼭 한 사람이 야, 굉장한 소리 나겠다. 나 혼자 소리를 질러 봤자 그게뭐 거기 보태주는게 있겠느냐? 나는 좀 들어보자. 나 하나만은 들어보자. 드디어 모월, 모일, 모시, 모 분, 모초가 왔습니다. 얼마나 큰 소리가 났을 것 같아요? 사상 최대의 정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데요. 왜 그럴까요? 다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로 이웃이 처한 고통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을 해보자는 것입 니다. 본문의 사건은 주로 강도 만난 이 사람을 치료하는 일, 그를 회복시키는 일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꼭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의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질문이 생겨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여리고 길에서 계속 강도를 만난다면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여기서 사고를 만났어요. 다음 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또 계속해서 사고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계속 앰브란스를 보내고 간호사를 보내고 그래서 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 거기에만 집중을 할까요?
아니면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야 옳지 않습니까?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길을 좀 바꿔보면 어때요? 전보대 세우고 밝게 만들어보고 경찰에 부탁해서 순찰대가 좀 왔다갔다 하고 가급적 이면 파출소도 그 옆에 하나 세우고 이렇게 환경을 바꾸어 보면 좀 낫지 않겠어요? 그런 일도 해야된단 말이예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런 이유를 위해서 하나 님이 교회를 세워 주셨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길을 어느 정도 바꾸어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는 한국 교회가 또 우리 교회도 이런 일에 좀 관심을 가지고 뜻있는 사람 들이 모여서 스타디도 하고 교회 앞에 제안도 하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우리 주변의 사회를 바꾸기 위한 사회 행동에 우리가 건강하게 참여 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서 환경을 보존하는 운동, 환경 오염을 막는 운동, 선거 때 공명 선거를 실천하는 운동,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이 복지 사역에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일 , 그리고 낙태가 많아지는 이 시대에 낙태의 법이 낙태를 장려하지 않도록 법을 바꾸어 가는일. 함께 해야될 일이예요. 함께 해야될 일.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꾸어 질건가? 나 한사람의 행동이 쉽게 빠르게 세 상을 바꾸지 못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땅에서도 천국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사회에서도 이루어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내 작은 행동이 세상을 당장에 밝은 세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지금 이시간 주님께서 명한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쓰러진 강도에게 행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무엇을 원합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주의 말씀을 경멸하지마시고 말씀을 지키고 이웃에게 죄를 짓지 마시기를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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